아름다운 교회
(고전 12:18-27)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세상에는 많은 나라가 있고, 다양한 삶이 있습니다. 옛 전통을 이어가는 사람도 있고,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 수만큼 삶도 다양합니다. 가끔 각 나라의 행복지수를 발표하는 보도를 보게 됩니다. 늘 같은 것은 아닙니다.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 중에는 가난한 나라도 많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약 30년 전 초등학생 어린이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외쳤습니다. 누가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까요? 우리 사회는 행복의 조건을 따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그 조건에 가까우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행복지수 통계에도 나오듯이 행복은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중꺾마’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아마 행복도 마음에 있는 것일 겁니다.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이 될 때 행복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행복을 느끼지 못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중에 가장 큰 이유가 되는 것은 ‘비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해보니까 나는 부족한 것이 많고, 성취한 것도 적어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나보다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과 비교하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비교하는 순간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남들보다 부족해서 불행하다고 할 수 있고, 남보다 풍족하다고, 없는 사람을 무시하거나 비난할 수도 있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비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비교하는 것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비교하면서 낫다, 못하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이 가치판단입니다. 성공과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비교하면서 가치판단을 하게 되면 불행해진다는 말입니다.
어느 원시 부족 가운데 한 부족은 셋 이상의 숫자가 없다고 합니다. 숫자를 셀 때 하나, 둘, 그다음은 ‘많다’입니다. 셋을 셀 줄 모르지만 행복합니다.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수를 세고 있습니다. 옛날 미국에서는 백만 달러를 가지면 백만장자라고 했습니다. 요즘은 백만 달러가 우리나라 아파트 한 채도 되지 않습니다. 십억 달러, 1조 원을 넘어야 부자라고 하지 않을까요? 높은 단위의 숫자를 세기 시작하면 역시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과 비교하며 불행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숫자를 셀 줄 모르면 그냥 많이 가졌다고 인정하면 불행을 느낄 이유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삶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세상의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고 있다고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해줄 때 우리는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시기와 분쟁이 있었나 봅니다. 누구의 은사가 크고 좋은 것인지 비교하며 서로 자기가 받은 은사가 낫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남들이 받지 못한 은사를 내가 받았으니 내 믿음이 인정받았다고 자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랑만 했으면 그럴 수 있다고 할 텐데, 같은 은사를 받지 못한 신도를 무시하거나, 믿음이 부족하다고 멸시하거나 비판했을 수도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약하거나 부족한 것, 또는 성공과 실패 등을 믿음과 연관 짓거나 능력의 차이라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아프거나 실패하면 믿음이 부족하다, 죄가 많다고 쉽게 판단해버립니다. 자기 생각일 뿐입니다. 형편을 가지고도 비교하는데 은사는 더 하겠지요. 서로 비교하면서 자기를 낫다고 주장하며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나 그리스도의 선물(엡 4:7)은 모두 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인 은사가 높낮이가 있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누구는 많이 사랑하고, 누구는 적게 사랑하는 것이 되겠지요. 하나님이 차별하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누구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엡 4:12), 모두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고’(엡 4:13),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게 하심’(엡 4:16)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온전한 교회를 이루고,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믿음의 정도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며, 높고 낮음이 있는 것도 아니라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온전하게 만들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주님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사람 몸의 지체로 비유합니다. 우리 몸에는 서로 다른 지체가 있어 온전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눈, 코, 입, 손, 발이 서로 다른 모양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지만, 몸을 위해 일하는 것은 같다는 것입니다. 어느 지체가 귀하고, 어느 지체는 귀중하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약한 지체가 있으면 서로 도와 약한 지체가 해야 할 일을 나누어 짐을 짊으로써 온전함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약한 지체를 보고 무시하거나, 필요 없다고 하면 몸이 무너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각 지체가 주어진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약한 지체를 사랑하게 함으로써 서로 시기하거나 다투거나 교만하지 않고 서로 돌보아 한 몸을 이루게 하십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함께 아파하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두가 영광을 받게 되어 즐거워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까닭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각 지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여러 형태의 직분이 있으나 하는 일은 하나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말씀 선포나, 기도나, 아름다운 예배나 헌신과 봉사 모두 사랑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형제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비교하며 남보다 낫다며 교만하거나, 남보다 못하다며 주눅 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 돌보며 지내면 그것이 곧 주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가 그리스도와 한 몸입니다. 각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체라는 것입니다. 지체에는 여럿이 있듯이 교회도 다양한 교회가 있습니다. 큰 교회, 작은 교회, 도시 교회, 농촌 교회, 다양한 교회가 다양한 모습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낫다고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소중한 지체들입니다. 각 교회가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다양성을 존중할 때 교회는 빛이 납니다.
그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각 지체는 몸에 붙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작고 힘이 없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주저앉는 것은, 책망 받을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을 찾아야 합니다. 그 일을 해나갈 때 우리 교회의 아름다움이 드러납니다. 우리 자신이나 우리 교회가 남들처럼 될 수도 없지만, 남들처럼 닮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빛이 나게 만들면 됩니다. 창립 30주년이 되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잘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우리 내면의 신앙의 아름다움은 있습니다. 내 신앙에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따르는 신앙이 아니라, 배우고 훈련하면서 내가 믿는 신앙에 자신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나와 다른 신앙을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성장시켜야 합니다. 비교는 하지 마십시오.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분량대로 자기 맡은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일은 교회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정에서, 일터에서, 이웃과 지낼 때에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어디에서나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의 은사를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듯이 세상에서도 사람을 비교하고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판단하지 않을 때, 차별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모두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한창일 때, 적군의 공격을 받고 밀리게 되었습니다. 지휘관은 신호병에게 후퇴의 나팔을 불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때 신호병은 전진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래서 지휘관이 그를 꾸중하며 후퇴 나팔을 불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신호병은 ‘저는 전진 나팔밖에 불 줄 모릅니다’라고 대답하며 크게 나팔을 불었습니다. 지휘관은 그 말을 듣고 깨닫게 되어 병사들에게 전진을 명령합니다. 사기를 얻은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전투를 이겼다고 합니다. 사실인지 꾸며낸 이야기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처럼, 우리는 ‘사랑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4-35)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 교회의 아름다움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자랑하지 못해도 ‘사랑’만큼은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의 마음으로 일하십시오. 교회 올 때도 사랑하는 주님을 뵙고, 사랑하는 내 형제자매를 만나고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베푸신 큰 사랑에 감사하며 기쁨을 안고 세상으로 돌아가 사랑하며 서로 돕고, 존중하며 기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