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점은 고속 120킬로미터로 달려서 선을 만들었다. 그 선은 다른 선과 엮여 두 선을 만들었고 그 두 선은 하나의 길이 되었다. 하지만 점 안에는 또 다른 선이 있고 그 선 안의 무수한 점은 나를 혼란스럽게 한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매우 께름칙한 일임이 분명하다. 오늘 내 일상적 통행은 빨간 버스로 시작된다. 매우 피곤한 아침이다. 어깨가 뻐근하지만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 나는 어절 수 없이 고개를 오른쪽으로 젖힌다. 버스에서는 도무지 앞을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이곳에 머리는 있지만 눈은 없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곯아떨어진 사람 휴대전화로 채팅하고 있는 사람 그리고 저 앞 그저 해맑게 떠드는 어린아이들의 나열 속에서 나의 시선은 갈 곳을 잃는다. 양옆으로 붙은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눈총은 햇볕보다 따갑다. 고개를 꾸벅거리며 자는 친구 옆에서 나는 어색하게 앉아있다. 이상한 일이다. 차에서는 잠이 오지 않는다. 나는 차라리 창문이 없다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빨간 버스의 창문은 창이 아닌 벽이다. 검게 칠해진 창 안 한 쌍의 눈은 외롭게 밖을 지켜본다. 사람들이 잠을 잘 자는 이유는 별다르지 않다. 딱히 의자가 푹신해서도 아니고 온도가 적절해서도 아니다. 덜컹거리는 버스에서도 사방이 창문으로 둘러싸인 이 불편한 공간에서 안락한 수면행위가 이뤄지는 것은 이곳에 창도 있고 문도 하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방이다. 우리는 방 속에 갇힌 사람이다. 닫힌 방에서 눈을 감고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을 자는 일 뿐일 것이다. 버스 아저씨가 전적으로 소유한 큰 유리창을 보려 해도 내게 주어진 것은 오직 불균형한 검은 머리뿐이다. 제각각 비뚫어진 뒤통수를 노려보며 가는 것보다 차라리 창문을 보는 것이 내 마음에 한결 낫다. 나는 창밖의 이 길을 좋아한다. 버려진 크레인과 쌓인 먼지와 반쯤 망가진 차가 돌아가는 것을 보는 것은 차라리 유쾌하다. 해가 밝아오면 이 도시는 어두워지고 해가 질 때 차라리 밝다. 낮이나 밤이나 아무다를 것이 없다. 해질녘부터 도로에서 지시가 난무한다. [멈추시오! 이제 가시오! 기다리시오!] 멈추라는 건 빨간색 이제 가도 된다는 초록색 기다리라는 주황색빛은 낮에도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저 세련된 빌딩 아래 앉아있는 원색 주황색 환경미화원 아저씨, 지나가는 파랑은 고장 난 트럭, 뻘건 색은 섬뜩한 국기들이다. 이 도시는 단조로워서 알기 쉽다. 여과가 없는 것이 명쾌하다 못해 껄끄럽다. 하지만 모르는 일이다. 이 도시가 단조롭다는 나의 시선 역시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탄 이 빨간 원색의 관광버스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히 거만하지 않은가. 차가 출발한 지 20분이 지났고 복잡한 사거리로 들어섰다. 도로 중간 인력시장은 오늘도 역시나 북적하다. 이 사람들의 무리가 인력시강이라는 것을 나는 3년이 지나서야 알았다. 인력시장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끔 '힘 력' 은 이제 그 고개를 떨궈 흐부진 '칼 도' 가 되었다. 이제 그들은 작은 열매조차 자르지 목하는 무딘 쇵덩어리가 되었다. 군복을 입은 아저씨들 시계를 보는 젋은이들 담배를 피우는 이들 앞으로는 내가 탄 이 큰 버스가 지나가는 도로가 그들의 뒤로는 죽어버린 하천이 있다. 교차선 사이 밀려드는 차들 속에서 간신히 세워둔 한 줄은 위태롭고 권태롭기 짝이 없다. 낡은 군복을 입은 아저씨는 우리가 탄 빨간 버스를 텅 빈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도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와 나의 눈은 어느 한 허공에서 마주쳤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를 보지만 그가 보는 것은 크고 붉은 벽일 것이다. 나는 내가 결코 그들과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검게 칠해진 창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아도 그는 결코 나를 볼 수 없다. 그가 결국 볼 것은 창문에 반사된 찌그러진 그의 얼굴 주름일 것이다. 군복을 입은 아저시 옆 한 젊은이는 그의 친구와 함게 하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하천의 이름은 무엇일까. 찾아봐도 별다른 이름이 없다. 포장도로 옆에 놓인 한 하천의 이름 따위는 사람들의 관신거리가 되지 못한다. 겨울이 되어 하천이 얼면 노인들은 작은 판자를 대어 궁둥이를 붙이고선 빙판에 쾅하고 깼다. 그 중엔 간혹 젊은이도 있었다. 그들은 자질구레한 쇳덩이와 돌덩이를 가져와서는 얼어붙은 하천에서 낚시를 하고 했다. 그들은 끌어올려야만 했다. 무엇이든지, 저 밑 세상으로부터, 수면 위로. 가끔 누가 무엇을 집어 올린 날이면 몇몇 양동이가 남아있기도 했다. 낚시꾼들이 앉아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몰려와 구경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불투명한 하천 밑에 무엇이 사는지 궁금한 것이 아닐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얇은 낚싯대로 빙판 밑 고기를 끌어올리는 것은 일종의 생존임이 분명하다. 나는 그들이 잡은 고기를 먹는지 버리는지 박제하여 기념하는지 전혀 알 방법이 없다. 돌아오는 길 하천에는 부러진 누나뭇조각 몇 개와 얼음조각들과 허투룬 구멍들만 남았다. 그 허투룬 구멍들 뒤로는 불교 사원이 한 채 놓여있다. 덩그러니 놓여있지만 전혀 외롭지 않다. 저 달 닦인 포장도로 위에 세워진 건믈은 사원이란 말이 무색하게끔 가식적인 용모를 뽐낸다. 정갈하다 못해 아주 곧은 구 층 석탑 위 작은 부처는 세상을 내려다본다. 윤기나는 적색 기둥 밑에는 죽은ㅜ부처의 관조차 없다. 사원의 안뜰 안에는 여섯머리 백조가 산다. 오만하다. 거짓된 정직함조차 없는 저 뻔뻔함. 욕망으로 죽은 하천 바로 뒤 연못에서 여섯머리 백조는 석가의 유희를 담당한다. 백조가 푸드럭거리는 하얀 날개짓에 정직함 또한 함께 파도치며 흘러갔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오른쪽으로 스쳐 지나가는 아홉 조각의 돌탑을 보고선 생각한다. 저것의 어느 부분이 석가의 사랑일까. 인내일까. 정직일까.\자, 이제 거의 학교에 다 왔다. 저 뒤에 보이는 파란색 건물이 그것이다. 학교에 가려면 비포장도로를 지나야 한다. 이 길 바로 옆 유치원 앞 아이들은 누빈 옷을 입고 수업을 듣는다. 학교에서 우리는 영국식 교복을 입고 세계회와 세계평화와 빈곤과 국제적 태도에 대해서 배운다. 오늘 학교에서 나갈 진도를 생각하면서 창밖 찌그러진 드럼통을 굴리며 노는 두 사내아이를 보았다. 그렇다. 나는 아는 것이 많지만, 그들을 위한 답이 없다. 나는 아직 이 붉은 선에서 내리지 못했다. 선 안의 점이 선 밖의 점이 뒤기 위해서는 창문을 깨부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안다. 오늘 나는 창문 옆 붙어있는 빨간색 비상용 망치를 만지작거리다 주머니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