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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런던에 도착해 현지 교민들과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제 끄리빠사란 상 수상식을 마치고 캘커타 공항에서 새벽4시에 출발한 비행기는 장장 12시간을 비행하여 카타르 도하를 경유하여 오후1시20분에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히드로 공항 터미널로 나오니 정토회 유럽지구장 김선희님과 런던 교민 두 분이 스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습니다.
내일부터 3일 동안 런던과 파리에서 세계한민족포럼이 개최되는데 스님은 행사에서 한반도 통일에 관한 기조발제를 할 예정입니다. 런던에 하루 일찍 도착한 스님은 런던을 방문한 김에 런던에 살고 있는 한국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하였습니다.
▲ 런던시 한복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템즈강
런던 히드로 공항을 나와 숙소에 잠깐 드러 짐을 푼 후 곧바로 강연장으로 이동했습니다. 런던 시내 중심가의 Bookshop Theatre 안에 위치한 작은 공연장에는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을 듣기 위해 35명의 교민들이 꽉차 있었습니다. 큰 장소는 급하게 구할 수가 없어서 일반 교민에게는 연락하지 않고 기획 법회에 참석한 몇몇 분들에게만 연락하였다고 합니다.
▲ 즉문즉설 강연이 열린 런던 시내 중심가 Bookshop Theatre
스님은 법문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는 교민들을 향해 깊은 애정을 보이며 3시간30분 동안 즉문즉설 강연을 해주었습니다. 오후 3시30분에 시작한 강연은 저녁7시가 되어서야 마쳤습니다.
먼저 스님은 “다들 어디에서 왔어요?” 라며 인사를 건냈습니다. 멀리서는 파리, 암스테르담, 스코틀랜드에서 온 분들이 있었고, 샌디에고에서 다른 용무로 왔다가 들른 분도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모두 런던에서 살고 있는 분들인데, 대부분 작년 스님의 세계 100회 강연 중 런던 강연을 인연으로 올해 2월부터 스님의 영상 강좌로 모임을 해왔던 분들이였습니다. 7월부터는 정토회로부터 열린법회로 승인을 받아서 이제는 정기적인 모임으로 이어갈 예정이라고 합니다.
▲ 런던 교민들과 함께한 즉문즉설 강연
스님의 인사말에 이어서 교민들은 어제 벵갈 불교를 일으킨 끄리빠사란 스님의 150주년을 기념하여 끄리빠사란 상을 수상한 스님에 대해 축하의 박수를 보내주면서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이 “어떤 고민이든 편안하게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고 하자 여러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습니다.
아이를 갖지 못하자 자신과 이혼을 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 남편을 보는 것이 너무 힘이 든다는 여성 분, 회장 딸이 나이도 어린데 상사가 되어 많은 업무 지시를 해서 못마땅하게 여겨진다는 분, 고양이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일상 생활이 힘들다는 분, 아버지가 가장으로서 역할을 잘 못해서 많이 미워했는데 나중에 돌아가시면 후회가 될 것 같아 고민인 분 등 총 5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스님은 다양한 비유를 들려주며 쉽고 명쾌한 답변을 해주었습니다.
그 중에서 곧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어떻게 수행을 하면 좋을지 묻는 여성 분의 질문과 스님의 대답을 소개합니다. 유튜브나 인터넷을 통해 많은 분들이 스님의 법문을 듣고 불교 공부를 시작하지만 대부분 지식적으로 접근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스님의 답변은 일상 속에서 어떤 자세로 수행해야 하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런던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곳 생활을 다 정리하고 자유로워지면 다음달에 한국으로 돌아가서 풀타임으로 마음 공부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어떻게 수행을 하면 좋을까요?”
“마음 공부를 학교 공부처럼 생각하시면 안돼요. 자꾸 지식적이거나 기술적인 것으로 접근을 하지 마세요. 한국어 배울 때처럼 가나다라 순서대로 배우면 된다 이런 것은 지식이거든요. 기술이나 지식은 단계를 밟아서 순차적으로 배워가면 되는데, 마음 공부는 그 이치를 알고 나서 자기 스스로 꾸준히 연습을 해야 됩니다. 연습이라는 것이 어떤 수련에 참가해서 단계를 밟아나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일상 생활 속에서 계속 연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국에 오시면 우선 정토회의 깨달음의장 수련에 참가하셔서 마음의 이치를 먼저 이해하셔야 해요.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고양이 자체가 부정한 동물이라는 의식이 무의식에 베어 있거든요. 그런데 고양이 자체가 부정한 동물이 아니라 내가 고양이를 부정하게 보는 것이라는 지적 무지를 먼저 깨우쳐야 해요. 그리고 지적 무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거부 반응이 있습니다. 나의 무의식으로부터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지 고양이 자체에서 거부 반응이 오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런 이치를 먼저 이해해야 해요. 이론적으로 설명하면 ‘제법이 공하다’ 하는 것인데, 이것을 수련에서는 경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겁니다.
두 번째는 그 이치가 충분히 납득이 되었다 하더라도 현실에 딱 부딪히면 원래의 까르마대로 반응을 합니다. 이것을 ‘찰나 무지’라고 합니다. 반응을 하더라도 ‘아, 내가 또 거부반응을 하구나’ 알아차려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고 해야 합니다. 고양이를 보면 딱 싫은 마음이 일어나지만 ‘아, 이건 내 까르마이지 고양이 문제는 아니야’ 알아차리고 다시 고양이를 안아보고 내려놓고,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 어느 순간 또 갑자기 고양이를 보면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 찰나에는 알아차림이 없어서 무의식 세계가 자동으로 먼저 거부반응을 을이켜 버리거든요. 그러나 이 이치를 아는 사람은 그렇게 반응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어! 내가 또 까르마에 자동으로 반응을 했구나’ 그러면서 다시 평정심을 회복하는 연습을 일상 속에서 꾸준히 해나가야 합니다.
절에 들어와서 살면 조금 도움이 되는 것은 첫째, 나쁜 경계에 부딪힐 확률이 적다는 것이죠. 그러나 절에 들어와서 산다고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나쁜 경계에 덜 부딪히니까 마치 수행이 된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지 밖에 나가면 똑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래서 상처가 심한 사람은 가능한 상처에 부딪히지 않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초심자는 절에 와서 살거나 수련을 많이 하는 것이 좀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절에서 살면 매일 아침 일어나서 참회를 하게 되니까 ‘어, 내가 또 어제 미쳐서 지냈구나’ 이렇게 되돌이킬 수 있는 조건이 항상 있어서 도움이 되죠. 그러나 타성에 젖어 버리면 아무리 절에 오래 살아도 도움이 안돼요.
그래서 집에서 수행하는 사람이 오히려 더 수행을 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집에서 할 때의 문제점은 3일 이상 잘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할 수 있으면 집에서 하는 것이 더욱 도움이 됩니다. 집에서 수행하는 것은 남을 의식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고, 절에서 수행하는 것은 전체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도 굴러가게 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절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수행에 대해 자발적인지 점검하려면 집에 가 있거나 혼자 여행을 갔을 때도 되는지 안 되는지를 보면 됩니다. 대부분 절 밖으로 나가면 잘 못합니다. 그만큼 자발성이 떨어지는 것이죠.
한국에 오시면 깨달음의장, 나눔의장, 명상수련 등 스스로 자각하는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거기에 우선 참여해 보시되 그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는 혼자서 해봐야 합니다. 혼자서 하는 것이 잘 안 된다면 절에 들어와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혼자서도 잘 되면 굳이 절에 들어와야 할 이유는 없어요. 대부분 혼자서 잘 안 되죠. 그러면 백일 출가를 해본다든지 절에서 공동체 생활을 해본다든지 하면 혼자서도 공부할 수 있는 연습이 좀 되죠.
그러나 여러분들은 자꾸 수행을 기술적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즉 ‘티벳 불교를 하면 더 잘 될까’, ‘위빠사나를 하면 더 잘 될까’, ‘참선하면 더 잘 될까’, ‘염불하면 더 잘 될까’ 자꾸 이렇게 접근합니다. 이 마음 속에는 벌써 노력은 적게 하고 효과는 빨리 보겠다는 욕심이 숨어 있잖아요. 욕심으로 접근하면 장애가 생길 때 ‘달라이라마한테 가서 배워야 하는데 여기서 배워서 그런건가?’, ‘티벳 불교를 해서 업장을 먼저 녹여야 하는데 화두를 들어서 그런건가?’ 하면서 자기 내부에 도망갈 핑계 거리를 자꾸 만들게 됩니다.
이론을 많이 아는 사람들은 실제로 수행이 더 안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혀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 오히려 공부가 빨리 될 때가 있어요. 그것은 사전 지식이 많은 사람은 공부를 하다가 잘 안 되면 자꾸 방법을 바꾸려고 하거든요. ‘이 방식이 안 되면 저 방식으로 하면 잘 될까?’ 이렇게 까르마에 저항이 올 때 까르마에 끌려 회피를 하게 됩니다. 고양이가 두려운 사람은 한달이든 두달이든 꾸준히 고양이를 안아 보면서 두려워하지 않는 연습을 해서 극복을 해야 하는데, ‘최면을 걸면 잘 될까?’, ‘참회 기도를 안 해서 그런건가?’ 이렇게 핑계를 대어서 장애가 올 때 자꾸 도망가는 마음을 냅니다. 도망갈 때가 없어야 됩니다. 죽으나 사나 여기서 극복을 해야 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 저것을 하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방법을 알고 있으면 자꾸 도망갈 핑계를 만들게 됩니다. 까르마는 절대로 죽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의식까지 바꿔버립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한테 속게 됩니다. 이걸 차단해야 하는데, 그래서 옛날부터 스승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 겁니다. 스승이 대신해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핑계를 대고 도망가려는 것을 스승이 막아주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답변을 한 후 스님은 다시 질문자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런던에서 한국으로 오는 것이 왜 자유로워지는 거에요?”
그러자 질문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동안 런던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제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는 이루지 못한 것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시 한국으로 가서 부딪혀 보고 싶어요.”
스님은 질문자가 수행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음을 지적한 후 무엇이 수행인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수행이 아니에요. 그렇게 한국으로 가서 참선을 했다거나 명상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수행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수행은 주어진 시간에 한글을 가르칠 형편이 되면 한글을 가르치고, 아기를 돌볼 형편이 되면 아기를 돌보고, 주어진 형편이 업무를 해야 되면 업무를 하고, 주어진 형편이 명상을 해야 하면 명상을 하는 것입니다. 명상을 하고 싶어서 명상을 하고, 법문을 하고 싶어서 법문을 하고, 한국말을 가르치고 싶어서 한국말을 가르치는 것은 그냥 하나의 욕구에 불과한 것이에요.
이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해탈인데 우리는 수행도 욕구로 합니다. 나는 명상하고 싶다 해서 명상하고, 나는 염불하고 싶다 해서 염불하는 것은 욕구를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지지는 않습니다. 욕구를 채우는 것이지요. 영국에 오고 싶다고 해서 영국에 오고, 티벳 가고 싶다 해서 티벳 가고, 미얀마에 가고 싶다 해서 미얀마에 가는 것은 수행은 아니에요. 돈을 벌고 싶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이나, 수행하고 싶다고 해서 수행하는 것이나, 노래하고 싶다고 해서 노래할 때는 그 대상이 돈, 수행, 노래이냐의 차이만 있지 수행은 아니에요. 수행은 하고 싶어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에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은 욕구 충족에 불과한 것이에요. 여기에 수행에 대한 큰 오해가 있습니다.
경전을 읽으니 참 재미가 있다고 해서 경전을 읽는 것은 그냥 소설을 읽고 싶어서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욕구 충족에 불과한 것입니다. 단지 욕구 충족이 좀 건강하다고 할까요. (청중들 웃음)
경전을 읽고 싶은데 못 읽는 조건이 되어서 답답하고 불안하다면 먹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못 먹어서 불안하다는 것과 똑같은 것이거든요. 늘 명상을 하다가 명상할 수 없는 조건이 되니까 명상을 못해서 죽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진정한 명상은 앉아서 명상할 수 있으면 앉아서 명상을 하고, 강의를 할 수 있으면 강의를 하고, 밭일이 있으면 밭일을 하고, 한국에 갈 일이 있으면 한국에 가고, 미국에 갈 일이 있으면 미국에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어진 조건의 대상이 다를 뿐이지 이것 하면 좋고 저것 하면 싫고 하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부자연스럽다는 반증이거든요.
만약 영국에서 지내는 것이 갑갑하다고 할 때는 영국에서 지내는 중에 왜 갑갑한지 원인을 밝혀서 육체적으로 무리한 것이 원인이라면 업무를 약간 조정할 줄 알고, 집착을 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여기서 집착을 놓을 줄 아는 것이 수행입니다. 즉 결혼해 있는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혼자 있는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회사에 다니고 있는 그 상태에서 자유로워져야 하고, 영국에 살고 있는 그 상태로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이혼해도 되고, 결혼해도 되고, 회사를 그만둬도 되고, 한국에 가도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도 자유롭고 한국 가서도 자유로운데, 여기서는 속박이지만 한국 가면 자유롭다고 한다면 그것은 일시적 자유로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의 수행은 대부분 이런 욕구를 따라 수행을 하기 때문에 붓다가 말한 해탈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욕구의 대상이 바뀐 것 밖에 안 됩니다. 이것을 수행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대부분의 수행 지도가 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가르치지 않고 욕구를 쫓아가도록 가르칩니다. 다만 그 대상을 ‘돈’에서 ‘도’로 바꾼 것 밖에 안 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고 적게 벌고가 있듯이 도에도 높고 낮음이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겁니다. ‘위빠사나는 높은 단계의 수행이고, 명상은 낮은 단계의 수행이다’ 라고 하는 이런 말들은 ‘저건 지위가 높고 이건 지위가 낮다’ 하는 개념과 동일한 개념입니다. 이런 것 자체는 분별심에 속합니다. 분별심을 떠나야 ‘도’인데 우리는 욕구의 대상으로 ‘도’를 찾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구하는 마음으로 공부하시면 한국에 가도 해결이 안 되고, 불교에 귀의해도 해결이 안 되고, 정토회에 와도 해결이 안 됩니다. 금방 지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욕구가 충족되기 때문에 정토회에 오면 굉장히 좋겠죠. 정토회가 천국 같고 법륜 스님이 부처님 같고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 새로운 욕구가 또 올라와서 덜 채워지기 때문에 회의가 들고 마음이 멀어지고 다른 욕구를 찾아서 또 다른 곳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해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입니다. 지금 여기 무엇이 문제인가를 봐야 합니다. ‘지금 뭐가 문제인데?’ 이걸 알아차려서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네!’ 이렇게 가야 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자유로워져야 언제 어디서든 자유로워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양이를 두려워하는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다른 인간 관계의 문제에도 영향을 줍니다.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거부 반응이 고양이보다는 덜할 것 아니겠어요? 불가능할 것 같았던 고양이와도 잘 지내는데 다른 사람과 같이 못 지낼 이유가 없잖아요. 이렇게 연관해서 모든 문제에 적용되기 때문에 고양이에 대한 두려움을 해결하면 그것이 고양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자유로움의 폭도 함께 넓어지는 겁니다.
자기 분별심으로 부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집착하거나 늘 이 두 가지 경우입니다. 뜻대로 되면 집착하게 되고, 뜻대로 안 되면 외면합니다. 이렇게 되는 바탕은 욕구입니다. 이 양자를 다 경계해야 합니다. 그냥 꾸준히 할 뿐이어야 합니다.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내 업이 상대에게 안 맞나 보다’ 해야지 상대가 문제라고 보면 안 됩니다. 그런 것처럼 정토회의 수련법이 좋으면 ‘정토회는 나의 업식과 좀 맞나 보다’ 이렇게 받아들여야지 ‘정토회가 최고다’ 이렇게 접근하면 안 됩니다.
수행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구를 탁 접어봐야 합니다. 이혼하려고 할 때 ‘길 가는 사람과도 같이 지내는데 10년 같이 산 너와 못 살겠냐’ 이렇게 탁 내려놓고 한번 살아보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가 생각하는 잣대를 끝까지 움켜쥐고 가려고 하니까 해결이 잘 안돼요. 고양이가 두렵다면 오늘 집에 가는 길에 바로 고양이 한마리를 사가지고 키워봐요. (청중들 웃음)
그것이 백척간두 진일보에요. 천길 낭떠러지에서 죽음을 불사하고 한발 더 나가 버리는 겁니다. 제일 싫어하는 남자를 탁 붙잡고 한번 좋아해보는 겁니다. (청중들 웃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고양이를 다른 사람은 좋아하잖아요? 그러니 싫어하는 것도 내 문제이고 좋아하는 것도 내 문제이고 고양이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고양이는 그냥 그렇게 생겼을 뿐이에요. 나에게 고양이를 거부하는 까르마가 있는 겁니다.
이 컵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하나의 존재일 뿐입니다. 그것을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컵이 큰 것이 되고 작은 것이 되고, 좋은 것이 되고 나쁜 것이 되는 것은 다 우리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라는 것이 바로 까르마입니다. 무의식에서 형성된 대로 그냥 반응할 뿐인 것입니다. 호흡관을 한다면 다만 호흡에만 집중하지 반응하는 것에 끌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응하는대로 놀아나는데 가만히 호흡에만 집중하지 반응하는 데에 놀아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하면 반응이 점점 약해집니다. 무엇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아, 이렇게 반응하는구나’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가는 것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띠며 스님에게 “감사합니다”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큰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수행하는 것도 학교 공부하듯이 지식을 습득하는 정도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지 깊이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강연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많은 분들이 “수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았다”는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질문에 모두 답하고 난 뒤 스님은 오늘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한번 지식이 아닌 실천과 연습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스님이 떠나고 나면 열린법회 회원들끼리 영상으로 강연을 들으면서 스스로 마음공부를 해나가야 하는데 어떻게 관점을 잡아야 하는지 정신이 번쩍 차려졌습니다.
“이제 여기서 열린법회 하면서 스님 법문을 매주 듣게 되는데 첫째, 듣기라도 많이 들어야 해요. 그러나 유튜브로 즉문즉설 법문을 1000개나 들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어요. 듣는 것이 지식이 되어서 ‘이런 건 이래야 된다’, ‘저런 건 저래야 된다’ 이렇게 논리를 만들면 안돼요. 그러면 수행이 다시 지식화 되는 것입니다. 그냥 듣고 말아야 됩니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요. ‘아, 마음을 저렇게 써야 되는구나’ 이렇게 하고 끝내야지 지식으로 가면 안돼요.
둘째, 많이 듣는 것도 좋지만 그 중에 하나라도 집에 가서 실천을 꼭 해봐야 합니다. 그런데 실천이 잘 안돼요. 안되기 때문에 연습을 하는 것이죠. 잘 되면 왜 연습을 하겠어요? 잘 안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해야지 ‘안 되는데요?’ 이런 말은 할 필요가 없어요. 될 때까지 꾸준히 연습해서 하나라도 극복을 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구체적인 과제로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경전을 읽어야지, 불교 지식만 자꾸 늘면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해탈과 열반입니다. 괴로움과 속박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지느냐 이것이 목표입니다. 여러분들은 죽어서 어디 가는지에 관심을 갖는데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러워져버리면 죽는 것이 뭐가 문제가 되겠어요? 죽음이 두려우니까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가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자유로워지는 것이지 스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어요. 과식하는 문제는 자기가 해결해야지 제가 어떻게 과식을 안 하게 해줄 수 있어요? 그런 것처럼 어떤 것도 제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요. 자신이 실천해봐서 삶이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면 자가 발전이 생겨요. 그러면 스스로 자꾸 더 하게 돼요. 그러면 직상 생활도 편해지고, 가정 생활도 편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면 건강도 좋아져요. 요즘 현대인들의 병은 대부분이 스트레스에서 옵니다. 정신적으로 가벼워지면 건강도 좀 좋아집니다.
‘영국에 와서 힘들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돼요. 세월이 많이 좋아졌으니까 영국까지 와서 한번 살아보는 것 아니에요? ‘외국인이랑 같이 사는 게 너무 힘들다’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요. 요즘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외국인이랑 한번 살아보지 조선 시대에 태어났으면 외국인이랑 살아볼 수 있었겠어요? 애를 낳은 김에 한번 키워도 보는 것이고, 애가 없으면 애가 없는 것이 좋은 줄을 알면 되고요. 항상 주어진 조건에서 행복해지는 공부를 해나가야지 자꾸 요구를 하면 인생의 괴로움은 끝이 없어요. 오늘처럼 스님도 이런 질문을 하면 이런 대답을 하고, 저런 질문을 하면 저런 대답을 하는 것처럼 이 일 주어지면 이 일을 하고, 저 일 주어지면 저 일을 하면 됩니다. ‘나는 이 일을 하고 싶은데 왜 저 일을 하라고 해?’ 이렇게 생각하면 안돼요. 스님도 ‘나는 이런 질문을 받고 싶은데 왜 저런 질문을 하지?’ 이렇게 안 하듯이요.” (청중들 웃음)
마무리 말씀까지 웃음이 빵빵 터졌습니다. 긴 시간 법문이 계속 되었지만 자신들의 고민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기에 조금도 지루함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마이크도 없이 긴 시간 열정적으로 법문을 해준 스님에게 모두들 뜨거운 박수갈채를 다시 한번 보내주었습니다.
이어서 청중들 모두 무대 위로 올라와 스님과 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모두들 “지금은 비록 조촐한 열린법회로 시작하지만 앞으로 런던에도 곧 정토법당이 생길 것 같다”고 하면서 설레여 하는 표정이였습니다.
▲ 런던 열린법회 회원들과 함께
▲ 런던 열린법회는 매월 2주, 4주차 일요일 3시에 열린다고 합니다.
몇 분이 정성껏 샐러드와 과일을 준비해 오셔서 30분 정도 다과 시간을 가지면서 문답이 더 오갔습니다. 특히 한반도 통일의 희망과 국민들이 주인의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대한 스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런던 열린법회 회원들은 강연장에 남아서 마음 나누기를 하였고, 스님은 바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마음나누기를 마친 런던 열린법회들이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싶다며 다시 숙소로 찾아와서 숙소에서는 또 한번 대화의 장이 열렸습니다.
모두들 작년에 왜 스님이 세계 115회 강연을 했는지에 대해 많이 궁금해 했는데, 스님의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큰 감동을 받는 모습이었습니다. 스님에게 삼배로 인사를 올리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갔고, 몇몇 분들은 내일부터 시작되는 세계한민족포럼에도 참석하겠다고 합니다.
스님은 내일부터 ‘세계한민족포럼’에 참석해 ‘한반도 통일의 과제와 전망’을 주제로 기조 발제를 한 후 세계 각국에서 한반도 통일을 연구하는 전문가들과의 토론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