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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서대원수가 급히 격문을 띄우니, 우리 관서 지방의 원로들과 공사노비 천민들은 모두 이 격문을 들이시라. 무릇 평안도는 기자의 옛터요, 단군 시조의 옛 땅으로서 예의가 바르고 문물이 뛰어난 곳이다.( 중략)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왕위에 있으니,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여 김조순, 박종경의 무리가 국권을 멋대로 하고 있다.(중략) 그러나 다행히도 세상을 구하는 성인이 청천강 이북 선천 검산 일월봉 아래 군왕 포위 가야동 홍의도에 탄생하였다.(중략)이제 격문을 띄어 먼저 여러 지역 군수들에게 알리노니 절대로 요동치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창의문중의 내용)"
서북 최대의 난이라고 하는 홍경래의 난, 흔히 홍경래의 난을 근대 민중 항쟁의 선구로 뽑고 있다. 그 이유는 19세기 전반기의 소요는 대부분 이를 모형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홍경래를 비롯한 저항 지식인과 장사등이 봉기를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들은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처지에 있어서 농민과 별다를 바 없어기에 그들은 의식과 행동 면에서 강한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광산을 경영하여 큰 부자가 된 이희저나 송상에서도 홍경래에게 돈을 대주어 자본주의의 맹아기적 현상도 내포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자출신이었던 홍총각이나 뛰어난 학식을 가지고 있음에도 평안도 출신이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소외된 김창시등의 합류는 조선왕조 타도의 기치에서 4개월동안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이 반란을 주도한 홍경래는 본관은 남양이며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나 그의 조상들의 가계는 알 수 없으며, 4형제중 셋째로 알려져있다. 1811년(순조 11)에 일으킨 난이 실패로 돌아갔을때 그의 나이가 42,3세라고 했으므로, 1770년(영조 46)년생으로 추정하고 있다. 홍경래를 흔히 몰락 양반으로 알려져있으나, 상민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상민이든 양반이든 전답이 없는 빈곤한 처지이긴 마찬가지였다.
홍경래는 4척 5촌의 단구이지만, 얼굴이 희며, 윤택하고 턱이 짧고 뾰족하며 수염이 길었다. 그의 바른쪽 눈 위에는 사마귀가 있었다. 홍경래는 젊었을때 과거에 뜻을 두어 외숙 유학권에게 유교 경전을 배웠고, 1798년 28세때 소과인 사마시에 응시했으나 떨어지자, 이 실패를 평안도민에 대한 차별 때문으로 생각했다.
과거에 떨어진 그는 집을 나와 지관이 되어 각지를 돌아다녔다. 홍경래는 과거 공부를 할만큼, 유교 경서에 대한 교양을 쌓았고, 병서나 풍수지리서, 여러 가지 술서를 익혔다. 특히 당시에 유행하던 <정감록>을 통달하였다. 그러한 교양을 바탕으로 홍경래는 상당한 경륜을 지난 지도자로써의 풍모를 갖추었다.
그는 가산에서 역시 풍수로 부호의 집에 드나들던 우군칙을 만났다. 우군칙을 처음 만난 것을 1800년이라고 한다. 우군칙은 봉기 당시 나이가 36세로써 태천 출생 양반이라고 알려져있으나 실제로는 아주 미천한 신분이었따고 한다.
그 두 사람은 시국을 논하여 깊은 토론을 나누었다. 다음해에 이미 병란을 논의하였을 정도로 의기투합하였고, 이때부터 그들은 시국에 불평불만이 많은 자들을 규합하여 동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10년동안 동지들을 규합하면서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를 중심으로 중간 지휘층을 널리 포섭했다. 봉기군의 중심 인물로 홍경래가 정주 목사로 임명하였던 최이륜도 봉기 7,8년 전에 이미 포섭했고, 지식층의 포섭을 위해 한때 홍삼장사를 한 적도 있었다.
한편 상인층과 관계가 많은 우군칙은 중간층 및 상인층의 포섭에 나서서 활약했다. 가산의 부호로 자금원이 되어준 이희저를 끌어들었는데, 이희저는 봉기하기 수년 전부터 다복동에 큰 기와집을 짓고 우군칙과 어울리면서 준비 작업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그들은 또 벼슬에 막혀 현실에 불만을 품은 진사 김창시, 정주성의 거부 이침, 김속하, 안주의 상인 나대곤, 개성 상인 박광유와 황용서등도 끌어들였다. 또 힘센 장수의 발굴에 주력하여 홍총각, 이제초를 끌어들였고, 지략과 무용이 뛰어난 우군칙의 제자 김사용을 포섭하였다.
난의 주동자들이 봉기를 구체적으로 추진한 것은 1810년 11월 될 무렵이었다. 홍경래는 이때 우군칙을 만나 정진인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이를 들은 우군칙은 이희저와 함께 영변 묘향산 아래의 백령촌에 가서 은신할 곳을 찾았다. 이들은 구체적인꼐획을 세우면서 봉기군의 새로운 기지를 물색했다.
이듬해 정월부터는 우군칙과 김창시가 나서서 청천강 이북 지역의 유력가와 부유층들에 대한 포섭활동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우군칙은 4월에 이르러 다복동에 30칸의 기와집을 마련하였고, 이희저의 사촌 이명운도 새로운 집을 구하여 중수하였다. 이리하여 가산 대정강 가의 요지인 대복동에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다.
그해 7월 홍경래는 평소 포섭해둔 각지의 장사들과 함께 다복동 우군칙의 집에 머물렀다. 홍경래가 모은 인물들은 다복동 외에도 넓은 지역에 끼리끼리 모여서 지내면서 봉기에 대비하였다. 다복동 이외의 비밀기지 중의 하나가 용천의 바닷가에 있는 섬 신도였다.
순조 11년 9월 이미 거사 준비가 구체화되어가고 있었다. 이때 주동자 김창시가 곽산의 김대훈에게 봉기의 준비상황을 선전하고 12월에 거병한다는 사실을 통지하였기 때문이다. 10년전부터 집을 떠나 유랑하던 홍경래가 9월 고향에 돌아와 어머니와 형제 조카 등 친척 14명을 이끌고 박천 진두로 들어갔다. 10월에는 주요 참여자들이 모여 준비가 활발해지고 있었다. 동시에 부원수 김사용도 적극적인 활동을 준비했다.
11월에는 대정강 추도에서 거주하던 강수홍 부자를 중심으로 주전 작업이 비밀리에 추진되고, 이희저는 호피와 연철등의 군수품을 사들였고, 이를 다복동에 수송했다.
김창시는 다음해인 임신년에 거병이 있을 것이라는 요언을 퍼뜨려 민심을 교란시켰다. 용력 있는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찾아와 자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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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중에는 봉기의 주동자들이 거사의 맹약을 하고 서명식을 했다. 그 숫자는 정부측이 압수한 <도록>이라는 문서에는 79명으로 나타났다. 그중에 참여한 혐의가 없거나 정도가 미미하여 처벌을 받지 않은 인물이 12명이었다. <진중일기>에는 59인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를 보면 봉기 과정에서 중요한 활동을 한 사람은 60여명이었다. 이렇듯 봉기는 처음부터 대단히 조직적이었고 치밀하게 이루어졌고, 시장을 출입하는 일반인에게도 병란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