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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
입춘의 의미
입춘은 24절기 중의 첫 번째 절기로 음력 1월에 해당하고, 양력으로는 2월 4일경이 된다. 2011년의 경우에도 2월 4일에 들었다. 태양의 황경이 315°에 있을 때이며,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들어있는 절기다. 봄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까지는 많은 추위가 남아있다. 꽃샘추위는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때문이다. 오죽하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즉 봄이 왔으나 봄 같지 않다는 말이 생겨났을까.
드물기는 하지만 음력 윤달이 들어있어 1년에 입춘이 두 번 들어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재봉춘(再逢春) 또는 쌍춘(雙春)이라 한다. 또 입춘 전날을 절분(節分)이라 하는데 이것은 작년과 올해의 계절을 나누어 마지막 날이라는 뜻이다. 그러기에 이 날 밤을 해넘이라고도 부르고, 지난해에 설쳐댔던 귀신들이 모두 따라오지 못하도록 방이나 문에 콩을 뿌리고 새해를 맞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입춘은 마치 연초(年初)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입춘의 환경
농도(農道) 전라북도의 전주에서 입춘으로 기준한 2월 4일의 기후를 보면, 1971년부터 2000년까지의 평균기온의 평균은 -0.5℃였으며, 최고기온의 평균은 4.5℃로 추운 날씨를 보였고, 최저기온의 평균은 -4.6℃였다. 또 강수량은 0.5mm로 눈이 많이 오지 않았으며 바람의 평균속도는 1.0m/s였다. 소한과 대한이 들어있는 1월에 비해 0.5℃정도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입춘 15일간을 5일씩 나누어 초후(初候)에는 동풍이 불어서 언 땅을 녹이고, 중후(中候)에는 동면하던 벌레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말후(末候)에는 물고기가 얼음 밑을 돌아다닌다고 하였다. 간혹 음력으로 섣달에 들기도 하지만 정월에 들기도 한다.
언 땅이 녹으면 냉이가 먼저 아는 체를 한다. 겨우내 죽을 맛이던 풀들이 기지개를 켜고 눈을 두리번거리는 때이다. 하지만 입춘은 2월 초로 아직도 눈이 있고 빙판길도 남아있는 때이다. 이제 봄이 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 낙엽이 쌓인 곳이나 그늘진 곳에서 방심하는 사이 발생할 낙상에 주의하여야 한다. 특히 뼈가 약한 어르신들은 고관절 골절을 예방하여야 한다.
입춘의 풍속
입춘의 입(立)자는 대인(大人)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며, 춘(春)자는 풀(艸)이 양기를 받아 기지개를 켜며 대지를 뚫고 뾰족하게 나오는 형상이다. 봄이 되자 행복이 오는 좋은 계절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입춘(立春)을 말할 때면 두말 할 것도 없이 입춘대길(立春大吉)이나, 건양다경(建陽多慶)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입춘이 오면 농경문화 시대로 보아서는 새로운 한 해를 여는 시작을 알리는 것이니,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나 달력으로 말하면 2월 4일이나 5일쯤에 해당되어 계절상으로 아직도 한창 겨울인 것은 사실이다.
아직 추위가 다 가시기도 전에 벌써 봄을 노래하는 것은 물러서는 동장군의 마지막 시샘을 살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선조들은 집집마다 입춘대길이라고 크게 써 붙여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지혜도 가졌다. 이른바 복을 비는 기복(祈福)이다. 지금은 계절에 따른 직업의 변화는 없어졌지만, 그래도 아직 잠자고 있는 우리 몸을 깨우기 위하여 매운 맛을 보여주는 것도 필요한 때이다. 오늘이 바로 입춘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입춘점
한 해가 시작되는 날을 입춘으로 본다면 입춘이 가지는 의미는 대단히 크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이날의 일진을 보고 미리 점을 쳐보는 풍습이 있었다. 입춘날의 일진(日辰)에 따라 갑(甲)이나 을(乙)이 들어있으면 그 해에 풍년이 들고, 병(丙)이나 정(丁)이면 큰 가뭄이 들고, 무(戊)나 기(己)이면 밭농사가 흉년이 되고, 경(庚)이나 신(申)이면 사람들의 생활이 안정되지 못하고, 임(壬)이나 계(癸)이면 큰 물로 난리가 난다고 여겼다.
입춘첩
입춘은 새로운 해를 상징하는 절기로서, 이날 여러 가지 민속행사가 행해진다. 그 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춘축(春祝), 입춘축(立春祝), 춘방(春榜)이라고도 하며, 각 가정에서 대문기둥이나 대들보, 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것을 말한다.
속담에 ‘흥부집 기둥에 입춘방(立春榜)’이란 말이 있는데, 이는 흥부네 집처럼 기둥도 없고 대문도 없어 입춘방을 붙이기에 어울리지 않는 경우에 써 붙인 것을 비유한 말이다.
이때도 상중(喪中)인 집은 붙이지 않았는데, 이것은 아픈 사람이 설날 세배를 받지 않으려 하는 것과 같은 풍습이라 할 것이다. 입춘문(立春文)은 대개 다음과 같이 정해져있었다.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국태민안(國泰民安), 민국다경(民國多慶), 소지황금출(掃地黃金出), 가급인족(家給人足), 우순풍조(雨順風調) 시화세풍(時和歲豊), 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부모천년수(父母千年壽), 자손만대영(子孫萬代榮), 문영춘하추동복(門迎春夏秋冬福), 시화연풍(時和年豊) 등이 전한다.
한번 붙인 입춘첩은 떼어내지 않고 계속하여 복이 쌓이라는 의미로 그대로 두었다가, 다음해 입춘에 덧붙이기도 하였다.
농사점
오곡의 씨앗을 솥에 넣고 볶아서 맨 먼저 솥 밖으로 튀어나오는 곡식이 그해 풍작이 된다고 믿었다. 또 보리 뿌리가 세 가닥이면 풍년이 들고, 두 가닥이면 평년작을 하며, 한 가닥이면 흉년이 든다고 하였다. 뿌리가 튼튼하여 잘 자랐으면 나중에도 많은 수확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당연히 것이겠지만, 한 해의 농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생긴 풍습이라 할 것이다.
또 입춘날의 날씨를 보고 그해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입춘에 비가 내리면 오곡에 손해를 끼치고, 입춘에 청명하고 구름이 적으면 그 해에는 곡식이 잘 익는다고 하였다. 그런가하면 입춘이 흐리고 음습하면 그해는 벌레들이 극성하여 벼와 콩 등을 해친다고 하였다.
춘첩자
대궐에서는 문신들이 신년을 축하하기 위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으로 골라 설날에 내전(內殿) 기둥과 난간에다 써 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春帖子)라고 불렀다. 이때 사대부집에서는 입춘첩을 새로 지어 붙이거나 옛날 사람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붙이기도 하였다.
입춘굿
제주도에서는 입춘에 큰 굿을 하는데 이를 ‘입춘굿’이라 불렀다. 입춘굿은 무당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수신방(首神房)이 맡아서 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였다. 이때에 농악대를 앞세우고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공동기금을 마련하는 걸립(乞粒)을 하고, 상주(上主), 옥황상제, 토신(土神), 오방신(五方神)을 제사하는 의식이 있었다.
아홉 차례
지방에 따라 입춘(立春)날이나 대보름 전날에 행하는 ‘아홉 차례’가 있다. 이는 가난하지만 근면하며 끈기 있게 살라는 교훈을 전하는 풍속이다. 이날은 각자 소임에 따라 아홉 번씩 부지런하게 일을 되풀이하면 한 해 동안 복(福)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禍)를 받을 줄로 알았다. 글방에 다니는 아이들은 천자문(天字文)을 아홉 번 읽고, 나무꾼은 아홉 짐의 나무를 하며, 노인들은 아홉 발의 새끼를 꼬아야 한다. 또 여자아이들은 아홉 바구니의 나물을 캐야하고, 아낙들이 빨래를 하려면 아홉 가지를 하고, 길쌈을 하려면 아홉 바디를 삼아야 하고, 실꾸리를 감으려면 아홉 꾸리를 감아야 한다. 심지어는 밥을 먹어도 아홉 번, 매를 맞더라도 아홉 번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여기서 말하는 아홉은 꽉 찬 완벽한 숫자이기에 열심히 많이 하라는 의미이며, 조상들이 보았던 최고의 양수(陽數)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아홉 차리’라고도 부른다.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
입춘날이나 대보름날 전야에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착한 일을 꼭 해야 연중 액(厄)을 면한다는 적선공덕(積善功德)의 아름다운 풍속도 있다. 예를 들면 남몰래 냇물에 징검다리를 놓는다든지, 가파른 고갯길을 깎아 낸다든지, 동냥움막에 밥 한 솥을 갖다 놓는다든지, 행려병자에게 약탕을 끓여 몰래 두고 가는 것들이 해당되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얼굴없는 천사에 해당하는데, 예전 우리 선조들은 이것을 생활화하였던 지혜에 놀랄 뿐이다.
목우놀이(木牛놀이)
함경도 지방에서는 나무로 소를 만들어 관아(官衙)로부터 민가(民家)까지 끌고 나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는 옛날 중국에서 흙으로 소를 만들어 내보내던 풍속을 모방한 것이라고 하는데, 농사를 장려하고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뜻에서 소(牛)를 등장시킨 것이다.
입춘수
입춘(立春) 전후에 받아 둔 빗물을 입춘수(立春水)라 한다. 이 물로 술을 빚어 마시면 아들을 낳고, 서방님의 기운을 왕성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반대로 가을 풀섶에 맺힌 이슬을 털어 모은 물은 추로수(秋露水)로 이물로 엿을 고아 먹으면 백병(百病)을 예방한다고 믿었다.
선농제(先農祭)
서울 동대문 밖의 제기동(祭基洞)이나 전농동(典農洞)이라는 지명도 이곳에서 베풀어졌던 선농제(先農祭)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농사를 다스리는 농신(農神)에게 풍년을 비는 제사로 신라 때부터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입춘 후 첫 해일(亥日)에 선농제, 입하 후 첫 해일(亥日)에 중농제(中農祭), 입추 후 첫 해일(亥日)에 후농제(後農祭)를 드려 모두 세 차례의 제사를 지내던 것인데, 조선시대에 와서는 동대문 밖에 선농단을 짓고 선농제 하나만을 지내왔다.
선농단은 1909년 순종 때 융희3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폐지되었다. 일제는 위패를 사직단으로 옮기면서 그 자리에 청량대(淸凉臺)라는 공원을 만들었고, 숭인보통학교를 세움으로써 그 흔적을 없애버린 것이다. 이로써 1414년 태종 14년에 선농제를 위한 제단의 단과 유의를 설치하기 시작하여, 1476년 성종 7년에 왕이 농사를 지을 친경대를 신축하였으며, 1767년 영조 43년에 친경의궤를 편찬하고 권농과 옛 의례를 회복하고자 한 노력들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입춘 농사
입춘은 아직 겨울에 해당하여 이렇다 할 농사일은 행하는 것이 없다. 다만, 이때부터 농사를 지을 준비를 하는 시기로 알려져 온다. 올해에도 심을 씨앗을 준비하는 경우, 같은 땅에서 반복하여 수확된 종자를 사용하면 갈수록 품질이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생명력이 강한 품종, 수확량이 풍성한 품종으로 교체할 필요도 있다.
입춘이 되면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생기는 물이 잘 빠지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한편 월동채소도 아직까지 안심할 단계가 아니니 보온에 만전을 기한다. 서릿발에 들뜬 농작물은 뿌리가 잘 활착할 수 있도록 손을 보는데, 거름을 뿌리면서 보리밟기나 밀밟기를 통하여 메마른 봄바람에 말라 죽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익산시 농업기술센터가 전하는 우리지역의 보리밟기는 얼음이 녹으면 실시하는데 대략 2월 상순이 적당하다고 한다. 한편 봄보리는 땅이 녹는 2월 중순부터 하순사이에 파종하여야 제대로 자라서 알찬 수확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축사의 보온을 강조하다보면 환기가 미흡하여 각종 호흡기 질병이나 면역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어 주의한다. 최근에는 조류독감이 해마다 연초에 발생함으로 미리 신경을 쓸 필요가 있다.
입춘의 먹을거리
입춘에는 제철에 나는 과일이나 채소가 많지 않다. 아직 추운 기운이 남아있는 들판에 생명력이 강하여 맛도 강한 푸성귀가 돋아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이때 즐겨먹는 음식으로는 주로 나물무침이 되어 오신채, 탕평채, 승검초산적, 죽순나물, 쑥국, 죽순찜, 달래나물, 달래장, 냉이, 산갓김치 등이 있다.
오신채
봄이 오면 추운 겨울동안 웅크려있던 몸은 기지개를 켜고 신진대사가 활발해진다. 겨울잠을 자던 동식물들도 다시금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보다 몇 배나 많은 영양소가 필요하고, 겨울동안 부족했던 신선한 야채에 대한 결핍현상을 보충해주어야 한다. 이것은 제철에 나는 봄나물로 가능하지만 입춘이 오는 길목에서는 아직 이렇다 할 새 나물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때에 우리 선조들은 눈밑에서 나오는 오신채(五辛菜)를 구하여 입맛을 돋우고 떨어진 기력을 보충하였다고 한다.
오신채는 다섯 가지의 매운 맛을 내는 채소로 파, 마늘, 자총이, 달래, 평지, 부추, 그리고 미나리로 말하는데, 대표적인 재료로는 하얀 파, 노란부추, 푸른 미나리, 승검초, 겨자를 꼽는다. 궁궐에서도 청색, 백색, 적색, 흑색의 음식을 동그랗게 둘러놓고 중앙에 노란색의 음식을 놓아 집중과 결속의 의미를 두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정치적인 단합을 염두에 둔 음식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상하관계나 통치이념이 없는 민간에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의미를 두었으니 이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였던 것이다. 그런가하면 간, 폐, 심장, 신장, 비장의 모든 장기들이 튼튼하여 건강해지기를 바라며, 이들에게 상응하는 음식을 먹음으로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선원청규(禪苑淸規)’에는 절간의 수도승은 오훈을 금한다 했는데, 이때의 오훈(五葷)은 신체를 자극하는 음식 바로 오신채였던 것이다.
어떤 연유로 오신채를 준비하지 못한 가정에서는, 새로 돋는 파의 노란 순을 잘라 초고추장에 찍어 대신하기도 하였다. 동면(冬眠)에서 깨어 활동을 하다보면 예전보다 월등히 많은 양의 비타민이 필요하게 된다. 이때 먹는 오신채는 비타민C를 비롯하여 각종 영양소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나른한 춘곤증을 이겨내는데 아주 좋은 음식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오신채는 신맛과 쓴맛, 단맛, 매운맛, 짠맛을 동시에 먹는 것이니 올 해에 닥칠 인생의 즐거움과 슬픔을 미리 맛보고 참아 내라는 것과도 같다. 오신채로 반찬을 만들면 오신반(五辛盤)이 된다. 이제 곧 봄이 되니 늘어진 몸을 추스르고, 힘든 농사일을 위하여 미리미리 힘을 비축하라는 의미다. 그러고 보니 오신채는 그 이름만큼이나 신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탕평채(蕩平菜)
탕평채는 궁중요리로서 채를 썬 청포묵과 쇠고기, 녹두새싹, 미나리, 물쑥 등을 큰 그릇에 담고, 간장, 참기름, 식초를 넣어 고루 버무린 후에, 황백지단과 김, 고추를 가늘게 채 썰어 고명으로 얹어놓으면 된다. 탕평채는 대개 늦봄에서 여름 사이의 나물이 많이 나는 시기에 먹는 음식이다.
1849년에 편찬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탕평채는 그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음식이었다. 조선 제 21대 왕인 영조(英祖)가 즉위하여 각 붕당(朋黨) 사이의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각 붕당의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탕평책(蕩平策)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런 탕평책의 경륜(經綸)을 펼치는 자리에 등장시킨 음식이 바로 탕평채였다. 여기에 들어가는 재료의 색(色)은 각 붕당(朋黨)을 상징했는데, 청포묵의 흰색은 서인(西人)을, 쇠고기의 붉은색은 남인(南人)을, 미나리의 푸른색은 동인(東人)을, 김의 검은색은 북인(北人)을 상징한 것이다. 각각 다른 색깔과 고유의 향을 가진 재료들이 섞여 조화로운 맛을 이뤄내는 탕평채는 영조가 주창(主唱)한 탕평책의 상징이기도 하다.
입춘의 별자리
입춘은 봄에 해당하여 봄에 나타나는 별자리를 보면 입춘의 별자리가 된다. 그러나 봄은 입춘과 우수, 경칩, 춘분, 청명, 곡우에까지 해당함으로 이때 나타나는 봄철의 별자리에 속한다고 보면 된다. 절기가 바뀌면서 조금씩 별자리도 이동을 함으로, 입춘에 동쪽에서 보였던 별은 곡우에 서쪽하늘에서 보이는 등의 변화는 감안하여야 한다.
입춘날 밤 자정이 되면 북두칠성과 삼태성이 하늘의 중앙에 떠오른다. 북두칠성은 큰곰자리의 꼬리부분이며 삼태성은 큰곰자리의 심장부에 속한다. 따라서 입춘하늘은 큰곰자리가 주인이 되는 셈이다. 북두칠성은 탐랑성, 거문성, 녹존성, 문곡성, 염정성, 무곡성, 파군성으로 이루어졌고, 이 별은 사람의 생사와 화복 그리고 길흉을 좌우하다고 믿었으며 도교에서는 나라를 다스리는 권능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북두칠성이 있는 큰곰자리의 일부에서 국자부분을 연결하여 북극성을 찾으면 작은곰자리에 닿는다. 작은곰자리는 7개의 별로 되어있는데, 작은 북두칠성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별을 북두칠성이라고 부르지는 않으며, 북극성은 이 작은곰자리의 꼬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근처에는 임금의 친척들이나 신하들이 있는데, 이들은 큰콤자리를 비롯하여 작은곰자리, 용자리, 백조자리, 거문고자리 등에 속한다.
북두칠성은 고구려 약수리 고분벽화와 고려 서곡리 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데, 봄 하늘 초저녁에 북동쪽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별이다. 이 별자리의 손잡이 3개에 해당하는 별에서 남동쪽으로 내려가면 1등성 2개가 보이고, 이중에 첫 번째는 목동자리의 아르크투르스(Arcturus)이며 또 하나는 처녀자리의 스피카이다.
아르크투루스는 오렌지색을 띠는 α별로 실시(實視) -0.0등성이며, 태양에서의 거리가 30광년이나 되는 아주 큰 별(巨星)이다. 또 처녀자리의 스피카는 투명한 푸른빛으로 실시 1.0등성이다. 스피카 동쪽에는 3등성인 다섯 개의 별들이 직각을 이루고 있다. 처녀자리와 그 서쪽에 있는 천칭자리는 모두 황도상에 있다.
큰곰자리
큰곰자리는 모두 21개의 별로 이루어졌고, 그 중에서 7개의 별이 곧 북두칠성이다. α와 β의 간격은 약 5°4′, α와 북극의 간격은 28°1′, 따라서 눈어림으로 α와 β의 간격 약 5배를 곱하면 북극이 된다. 일곱 개의 별 끝에서 두 번째에 있는 별은 미자르(Mizar)라고도 불리는 2등성으로 쌍성이다. 바로 옆에 알골이라 불리는 5등성이 붙어 있다. 이것은 겉보기 이중성(二重星)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보면 미자르 옆에 녹색 4등성이 나란히 있으며 더 나아가 스펙트럼을 조사하면 미자르 자체가 분광(分光) 연성(連星)임을 알 수 있다.
이중에서 국자의 물을 담는 그릇 부분이 큰 곰 몸체의 등뼈 뒷부분이 되며, 손잡이가 긴 꼬리에 해당하나 끝은 무거워서 쳐진 모습이다. 국을 푸는 곳인 입구쪽과 그 밑의 두 별을 연장하면 작은곰자리의 북두칠성모양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7개의 별을 볼 수 있다. 이 작은곰자리의 손잡이도 꼬리에 해당하지만, 이번에는 가벼운 꼬리를 치켜세운 끝이 바로 북극성(北極星)이 된다. 큰곰자리의 북두칠성에서 국을 푸는 곳의 두 별은 북극성의 위치를 가리키는 별이라 하여 지극성(指地極)이라 한다.
북두칠성 즉 큰곰자리는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지만 지평선 밑으로 가라앉지는 않아 1년 내내 볼 수 있다. 이렇게 일주운동을 하면서도 지평선 밑으로 사라지지 않는 별을 주극성(周極星)이라고 하며, 이의 기준이 바로 작은곰자리이다. 점성가들은 10만년 후에는 큰곰자리에 있는 북두칠성의 국자깊이가 이보다 훨씬 더 낮게 될 것이라고 한다.
아름다움의 상징이던 칼리스토가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사냥을 즐겼고, 이를 안 제우스가 칼리스를 통해 아이를 낳게 되었다. 제우스의 아내 헤라는 칼리스를 큰 곰으로 만들어 숲속을 헤매게 하였고, 제우스가 칼리스를 항상 볼 수 있도록 별자리로 만들었다. 따라서 이 별자리가 바로 큰곰자리인 것이다.
이밖에도 북극별자리로는 용자리, 카시오페이아자리, 케페우스자리, 기린자리 등이 있다. 이중에서 작은곰자리는 큰곰자리의 국자모양에서 좀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또 다른 국자모양을 하고 다른 별은 동반하지 않은 7개의 별로 이루어졌다. 이 작은 곰의 꼬리 끝이 바로 북극성이다. 용자리는 작은곰자리의 북두칠성 국자 밑부분에 있는데, 5,000년 전 이집트에서는 용자리의 꼬리끝 별을 북극성으로 지표삼았던 별이다. 현재도 지극성과 북두칠성의 중간에 이 용의 꼬리별이 위치하고 있다. 케페우스는 카시오페이아의 W자 위에 뾰족한 오각형 혹은 짧은 몽당연필로 비유된다. 또 연필심에 해당하는 끝인 감마(γ)별은 지극성과 용의 꼬리, 그리고 북극성의 일직선을 더 연장하면 발견할 수 있다.
처녀자리
황도 12궁의 여섯 번째 별자리로, 모두 15개의 별로 이루어졌고 하늘에서 두 번째로 큰 별자리이다. 처녀자리에는 맨눈으로도 관측할 수 있는 아리크(Arich) 쌍성이 있다. 처녀자리 부근에는 희미한 은하가 많이 있으며, 태양은 9월 중순에서 11월 초까지 이 별자리를 지난다. 신화에서는 밀 이삭을 들고 있는 처녀로 묘사하는데, 이는 수확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 별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 스피카가 밀 이삭에 해당한다.
목동자리
북두칠성의 손잡이 바로 뒤에 길게 늘어져 나타나는 별자리가 목동자리다. 마치 큰곰자리를 바라보며 곰을 잡으려는 듯한 인상을 주며, 손잡이를 길게 연장시키면 밝은 별과 만나는데 아르그투루스로 알파별이며 밤하늘에서 네 번째로 밝다. 지구에서 36광년 떨어져 있고, 5km/sec로 지구를 향해 움직인다. 적색거성에 속하며, 지름은 태양의 28배, -0.06등성으로 태양보다 약 100배 정도 더 밝다. 그러나 태양에 비해 약 2/3정도인 약 4000℃로 온도가 낮기 때문에 붉은빛을 띤 오렌지색으로 보인다.
사자자리와 사냥개자리
봄철의 새벽 밤하늘에서 처녀자리의 서쪽 중천에 사자자리가 가로놓여 있다. 이 별자리는 사자를 연상시키며, 모두 17개의 별로 이루어졌는데 α별 레굴루스가 앞다리의 무릎부분이다. 실시 1.3등성으로 푸른빛을 낸다.
또 사자자리의 서쪽 황도상에 사냥개자리가 있다. 모두 2개의 별로 이루어졌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별자리이지만, 그 안에 있는 산개 성단(星團) 프리세페는 육안으로도 희미하게 보인다. 사자자리 북쪽에 있는 작은사자자리도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별자리이다. 목동자리는 서쪽에, 머리털자리가 남쪽, 사냥개자리가 북쪽에 있다. 모두 다 밝은 별이 없지만 주위 일대는 은하의 집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은하가 밀집해 있다.
바다뱀자리
사자자리 남쪽에는 동서로 100°이상이나 뻗쳐 있는 바다뱀자리가 있다. 모두 17개의 별로 되어있고, 하늘에서 가장 긴 별자리에 해당하며 주성(主星)은 2등성 알파르드다. 바다뱀자리외에도 살쾡이자리, 왕관자리, 목동자리, 머리털자리, 작은 사자자리 그리고 처녀자리 사이에는 컵자리와 까마귀자리, 육분의 자리와 같은 작은 별자리가 있다.
입춘회고
입춘은 나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었고, 내가 직접 무슨 일을 했다거나 어떤 일을 거들었던 기억도 없다.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길을 가다가 대문간에서 ‘立春大吉’이나 ‘建陽多慶’이라고 쓰인 것을 본 정도다. 그때는 대체로 대문간에 지붕을 하여 비를 피할 수 있는 구조에다가 대문은 두꺼운 나무판자로 멋있게 만든 경우였다. 그래서 거기에 쓰인 글씨보다는 그 집 대문이 부러웠고, 그 집의 규모를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 얼마나 지났을까. 이제는 다른 사람들이 대문에 그런 글씨를 써 붙이지 않는 시절이 되었을 때쯤, 나도 한 번은 글씨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나도 그게 바로 입춘첩이라는 것과, 집안에 복이 오라는 말인 줄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배워본 적도 없는 붓글씨로 ‘立春大吉’을 크게 써서 아파트 현관문 안쪽에 붙여놓았었다. 그 일도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이제는 그런 글귀를 써 붙이는 것은 물론 그런 말의 뜻을 아는 사람도 드물게 되었다. 물론 한자를 공부한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요즘은 한자 읽기를 그림책 보듯 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입춘첩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그러면 이제는 집안에 복을 비는 풍속이 없어진다는 말인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이렇게 좋은 풍속(風俗)을 없앨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좋은 풍속을 이어가고 싶어도 한자를 모른다면, 그거야 한글로 쓰면 되지 않겠는가. 한글로 쓰면 ‘입춘대길’이라기보다는 ‘새봄에 복받으세요’라든지, ‘새봄에 새복이’라든지, ‘온 세상에 온 복이’라는 글귀들도 좋을 것이다.
내년 입춘이 되면 다시 입춘첩을 붙여야겠다. 그때는 내가 쓰는 것보다, 서예를 배워본 적이 있는 아내에게 멋있게 써 붙이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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