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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나루가 있던 곳에 세워진 젓갈 전시관 사층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강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선장복으로 갈아입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조타실, 선실 옥상의 파라솔 의자에 앉아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는다. 멀리 임천의 성흥산성의 희미한 산 그림자와 함께 산 중턱의 부채살 모양의 느티나무가 보였다. 새로 생긴 수상레저타운과 물 위에 떠 있는 보트와 오리들, 그 옆으로 넓고 푸른 잔디밭과 코스모스의 고수부지가 펼쳐져 있었다. 지천으로 펴 있는 코스모스길을 따라 가볍게 뛰거나 빠르게 걸으며 운동하는 트레이닝복의 여인과 지붕이 있는 흔들의자에 앉아 한껏 가을의 느긋한 따사로움을 맛보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걸었다.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하는 어린 아이들 뚝방을 따라 코스모스가 가을 바람에 흔들렸다. 코스모스 한들 한들 피어 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노랫가사가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읊조리듯 불러본다. 기다리는 마음같이 초조하여라 단풍같은 마음으로 노래합니다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찬바람 미워서 꽃 속에 숨었나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있는 길 향기로운 가을 길을 걸어갑니다.
옥녀봉을 향해 걸어갔다. 산을 감싸고 있던 농수로가 보였다. 전라도로 물을 끌어가던 물길은 마치 로마의 농수로처럼이나 거대했다. 자신이 열 아홉살 때 쌓았다고 말하는 자전거를 탄 사십 후반의 사내가 선창이 있던 곳을 향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갔다. 몇 척의 배가 떠 있고 예전 포구의 모습 재현을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었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 일때 세웠다던 농수로는 검게 변해가고 있었다. 삼사년전부터 물이 흐르지 않았다면서 한 노인이 옥녀봉으로 오르는 계단을 지키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강경 고도 옛날 되살리기 개발정비사업. 예전엔 염천동 쪽으로 배가 다녔지. 배들이 들어가면 수문을 닫아 물이 빠지지 않도록 했어. 수문 밖으론 정미소가 여러개 있었고, 군산으로 쌀을 실어가곤 했지. 새우젓전이 많던 곳이 염천동이지. 물길을 따라 운하 안으로 들어간 돗배들이 백척은 되었을 거야. 그러다 전쟁을 치르고 나서부턴가 이쪽 서편 나루로 점점 더 넓어졌지. 특히 장배들이 많이 다녔는데 한 때 흥청대다가 금강 하구뚝이 생긴 이후로는 뱃길이 뚝 끊기고 말았지. 예전엔 대단했지. 여덟 아홉 명 되는 뱃사람들이 탄 뱃사람들이 몰려올 때면 정말 시끄러웠어. 이곳 옥녀봉 아래에 술집만 해도 서른 아홉집 마흔집은 되었을 거야. 지금이야 그때 집들이 다 사라지고 없지만 예전엔 배사람들과 장꾼들이 북적댔으니까. 술 마시고 사움질 하는 사람도 많았지.수협공판장이 있던 자리는 허름한 창고로 남아 있었다. 예전엔 고기를 어상자에 안 담고 망태기 같은 것에 담았어. 백마리고 이백마리고. 몸이 말랐지만 아직 정정한 노인은 연신 담배를 피우면서 말했다. 그래 망태기에 담은 고기를 지게에 져서 나르곤 했지. 소금배도 같이 들어왔어. 주로 염천동 쪽 새우젓전에 많이 내렸지. 가물 땐 바닷물이 들어오곤 했어. 요 앞에서도 고기들이 많이 잡혔지. 미리, 잉어, 우어, 복쟁이... 복쟁이도요? 그럼 봄철 한 때 노랑복이. 예전엔 강이 더 넓었어. 그래서 강에 소나무 말뚝을 박아 그물을 쳐 고기를 잡기도 했지. 웅어라고도 불렀는데 우어를 한동안 많이 잡았지. 극장이 있던 곳에 왜놈들이 많이 살았고 포목점을 하던 중국사람들도 조금씩 있었어.
노인은 나바위가 있던 곳 너머의 전라도 땅을 가리키면서 자신도 육이오 시절에 피난을 간다고 겨우 삼십리 밖으로 피난을 가 밤이면 집으로 찾아와 먹을 걸 가지고 가곤 했다고 말했다. 자신 또래의 사람들이 거의 다 죽어 이제 자신만 남았다고 했다. 육이오 때 보면 금강으로 죽은 사람들 시신이 떠내려오고 곳곳에 죽은 사람들 때문에 악취가 나곤 했지. 지금이야 다리가 놓여 여기저기 쉽게 갈 수 있지만 이전엔 모든 게 뱃길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이곳으로 장보러와 술 마시고 행패부리는 사람들과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곤 했는데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이 맞고 가는 일도 있었다고 했다. 옥녀봉 선창이 있던 산비탈에 사는 노인은 요즘 소일을 어떻게 하느냐고 묻자, 돈이 있어야 노인당도 다닌다면서 그저 앉았다 일어났다 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계단을 올라 좁은 길을 따라 산언덕을 조금 오르자 혼자 사는 할머니가 언덕의 허름한 집 안에서 지나가는 사람을 낯선 눈길로 쳐다봤다. 탱자나무가 둥글게 길을 만든 호젓한 오솔길 위로 옥녀봉 그 특이한 바위들의 형상이 나타났다. 해발 오십미터 강경산.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여 마치 선녀가 단정히 앉아 있는 모양이라 하였다. 옥녀의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었다. 산 아래로 금강이 흐르고, 강경 포구가 있었으며 산 위에는 봉수대가 있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으로 옥황상제의 딸이 놀러 왔다가 그 절경에 심취해 올라갈 때가 지나게 되었고 하늘 나라에 올라오라는 나팔소리에 서둘러 옷을 제대로 입지도 못하고 한쪽 가슴을 드러낸 채 올라가게 되었는데 그 모습을 옥황상제가 보고 노발대발하였다. 옥황상제의 엄명으로 땅 위로 내려온 선녀는 이름을 옥녀라고 했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해 기도를 하던 그녀 앞에 어느 날 하늘나라의 모습이 비취는 거울이 떨어져 하늘나라에 대한 그리움이 더 해 갔으나 끝내 한 번의 실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었는데 그녀가 죽었다는 봉우이를 후세의 사람들이 옥녀봉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들여다 보던 거울은 바위로 변하여 용영대가 되었다고 한다.
정 때문에 촬영장소로 1997년 3월부터 98년 3월까지 탤런트 강부자씨가 옥봉이역으로 정혜선(어머니역)과 고향인 강경을 방문해 옥녀봉에 올라 금강과 어울어진 아름다운 경관을 바라보며 옛 추억을 회상하던 장면을 촬영하던 곳이라고 했다. 정자에선 허리에 장식 허리띠를 둘러맨 검은 정장의 여자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올라오는 사람을 쏘아보는 취한 사내와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고 왔을 작은 아이스박스와 후라이팬, 그리고 그녀가 어색한 듯이 그 사내를 향해 쓰는 존칭이 들려왔다. 부여에서 흘러와 굽어지는 강물의 흐름이 한 눈에 들어오는 옥녀봉 정상엔 그림 같은 느티나무 아래로 벤치 하나가 놓여 있었는데 그곳엔 이미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남학생이 여학생의 다리를 배고 누워 밀어를 속삭였다. 옥녀보살의 깃발에 걸린 태극기와 빨간기, 松齊亭, 항일삼일운동 기념비가 서 있는 옥녀봉 정상은 가슴이 탁 트이게 하는 지평을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오성산, 웅포의 덕양정, 그리고 부여의 백화정에서 보았던 풍경과 강맥이 닿아 있는 풍경이었다.
이곳에서 보면 강물이 어찌니 맑은지, 고기가 노니는 것이 보일 정도라고 했다. 조약돌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숲으로 우거진 산과 넓은 들판으로 경치가 더 없이 아름답다고 했다. 그래서 하늘 나라의 선녀들이 무리를 지어 달 밝은 보름달이면 이곳에 내려와 놀다 올라가곤 했다고 한다. 옥녀봉 송재정에서 검은 후라이팬에 삼겹살을 굽는 여인과 남학생을 무릎에 앉히고 코먹은 소리를 하는 여학생의 모습이 있던 곳 정상 바로 아래엔 곰바위가 자리해 있었다. 구두를 나란히 정자 마룻바닥에 올려놓은 여자의 아름다운 자태 또한 옥녀를 닮았다. 그 어린 옥녀 또한 전망 좋은 곳에서 일찌감치부터 사랑에 빠져 있었다. 굽이쳐 흐르는 인생의 강물 또한 바라다 보일 것 같은 곳이었다.
봉우회 사람들이 세워둔 옥녀봉 형상바위 명명기가 독특하게 다가왔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바위를 신성시해 기이한 바위에 이름을 짓거나 숭배해 왔다. 금강 바로 아래로 보이는 곳에 熊影臺란 이름이 음각되어 있고 그 왼편 아래엔 곰형상의 곰바위를 비롯해 수많은 형상의 바위들이 자리해 있다. 옥녀봉의 영물스러운 형상바위들이었다. 예로부터 곰형상의 바위라 하여 곰바위라고 불리웠던 곰바위는 웅진시대 곰나루의 곰신앙처럼 이곳 또한 한 때는 공주에 편입된 적이 있는 곳이어서 더욱 더 그 관련성에 주목하게 된다고 했다. 삼존불 뒷편의 두꺼비를 닮은 두꺼비 바위, 말바위(훼손), 멧돼지 바위, 물범바위, 부엉이 바위, 범바위... 단군신화 속 곰과 호랑이 등 상서로운 동물을 담은 바위들이 옥녀봉 바위들의 이름이었다. 논산팔경의 홍복이라고 표현한 소개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천지인 삼재의 장이 되도록 힘쓸 수 있도록 하겠다는 봉우회 사람들의 바위사랑 정신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옥녀봉을 타고 남쪽 길로 내려오면 산 비탈 아래로 독특한 교회가 하나 보이는데 문화재청에 등록이 된 교회였다. 기독교 대한 감리교회인 강경북옥교회였는데, 한옥의 건물에 적벽돌로 지은 교회였다. 한옥 위에 세워진 십자가의 모습이 독특했다. 복음교단 최태용 목사의 민족교회란 말이 새삼 떠오르게 하는 교회였다. 강경에 많이 왔지만 강경의 모습은 올 때마다 여러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옥녀봉에서 강경 주위의 풍광을 바라보지 않은 채 어찌 강경을 보았다고 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 밑 봉선사의 한글 간판은 종래의 한자위주의 절 이름 소개 방식과 달라 보였다. 건물에 새겨놓은 일제 시대의 신식건물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는 강경 골목골목의 모습이 젓갈시장으로 거의 이전의 영화를 추억하고 있는 소읍의 풍경으로 다가왔다. 오래된 창문 안으로 세월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서창집엔 자전거를 바쳐 둔 사람들의 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두렛집 아주머니는 딸을 위해 담아 놓은 김치통을 쌓아 둔 채 돼지고기를 빨갛게 볶았다. 강경 천주교회의 높은 첨탑과 독특한 건물양식을 바라보면서 어둠이 내린 소읍의 골목을 걸었다. 염천교를 지나면서 옥녀봉을 바라보면서 이전 물길을 따라 새우젓 전으로 들어왔을 돗배를 그려보았다. 뜨거웠던 여름날을 보내고, 어둠의 불빛들 속에서 서늘한 가을 바람을 맞았다. 꿈 같은 세월 너머로 흐르는 강물처럼, 또 다시 낯선 물길을 열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염천교 다리 난간에 기대어 어둠 속 소읍의 불빛을 보았다. 미광라사의 양복 양장수선과 라사란 말이 주는 어감을 음미하다, 이조방 앞에서 어둠 저편으로 보이는 돌이끼가 내려앉은 균형감 있는 돌탑과 동불상 그리고 큰 수레바퀴를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문인석과 절구, 그리고 버섯 모양처럼 생긴 석등과 돌이면서도 사람에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그 세월 너머의 친근한 돌형상들이었다. 옷자락이 섬세한 불상은 다소 살이 찐 것처럼 둥글고 우아한 얼굴에 명상에 잠긴 듯한 눈빛이었다. 유난히 귀가 크고 머리를 단정이 위로 붙들어 맨 불상의 표정, 선이 부드럽고 또 균형잡힌 돌탑이 주는 안온함이 오랜 세월을 견뎌낸 사람의 인고의 세월처럼 다가왔다. 옥녀봉 여인숙 옆 세상만사에서 만난 지업사 사장은 자신이 다니던 그 한옥의 교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신사참배 기념교회라고 소개했다.탬버린을 흔들며 몸을 이동시키는 솜씨가 뛰어난 약장수는 어둠 속 불빛 가운데 손가락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며 연예인 이상으로 잘 노는 프로 약장수들이 많다는 말을 했다. 그가 둥둥 떠다니는 홀엔 밴드 반주자의 부드러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노랫소리엔 세월의 강물을 돌아, 관념의 유리벽을 지나, 잡부가 되고, 또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변해가는 세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논산역에서 보았던 군인, 그 부자상봉.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반갑게 웃으면서 말했다. 많이 말랐네. 갈 때보다. 아직 이등병여. 달리는 기차의 창 너머로 옥녀봉 느티나무 아래로 흐르던 강물을 떠올렸다. 아득한 세월 저편에서부터 흘러와 굽이치며 돌아서고 있을 그 포구의 인생이란 강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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