渤海의 歷史가 우리나라의 歷史인 까닭 알아보기
高句麗 文化와 渤海 文化가 어떤 관계인지 알아봅시다.
高句麗의 치미(平壤 朝鮮 中央 歷史 博物館), 渤海의 치미(복제품, 國立 中央 博物館), 高句麗수막새의 연꽃무늬(國立 中央 博物館), 渤海 수막새의 연꽃무늬(국립 중앙 박물관)
치미: 傳統 건물의 지붕 끝머리에 얹는 粧飾.
수막새: 기왓등의 끝에 사용하는 기와.
高句麗와 渤海 文化遺産의 생김새를 보고 그 差異點과 共通點을 찾아봅시다.
差異點:
共通點
渤海의 치미와 수막새가 고구려의 것과 닮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20쪽
渤海는 高句麗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기록을 살펴봅시다.
구당서(복제품, 전쟁 기념관) 당의 歷史를 담은 구당서에는 渤海의 始祖인 大祚榮이 ‘高麗 별종’으로 기록되어 있다.
견고려사 木簡(복제품, 국립 중앙 박물관) 이 木簡 기록에 따르면 日本은 渤海에 보낸 日本 使臣을 ‘견고려사’라고 부른다. 목간: 종이를 發明하기 이전에 記錄을 남기려고 사용했던 판자 모양으로 자른 나무.
속일본기(일본 국립 공문서관) 속일본기에 따르면 渤海의 文王이 日本에 國書를 전할 때 자신을 ‘高麗 國王’이라고 칭한 사실이 나온다. 國書: 한 國家의 王이 國家의 이름으로 다른 나라에 보내는 外交 文書.
渤海의 王에게 보냅니다. 高句麗 때부터 兄弟와 같이 친하게 지내 온 나라의 소식이 끊어졌었는데 다시 연락이 오니 기쁩니다. -속본일기
唐은 大祚榮을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요?
渤海의 文王은 왜 자신을 ‘高麗(高句麗) 國王’이라고 말했을까요?
주변 나라들은 渤海가 어느 나라를 繼承하려고 한다고 생각했을까요?
渤海의 歷史가 우리 歷史인 까닭은 무엇일까요?
21쪽
高句麗와 百濟의 文化遺產을 알아봅시다.
古墳은 옛사람들이 남긴 무덤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 무덤의 주인이 살아 있을 때 사용하던 물건과 生活 道具를 함께 묻고, 무덤 벽과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이 시대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生前에 누리던 삶이 이어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高句麗는 다른 나라들에 비해 壁畫를 많이 남겼다. 高句麗의 무덤은 돌로 만든 넓은 방이 있어 그 벽에 그림이 그려졌다. 古墳에 그려진 그림에서 그 당시 사람들의 衣食住, 宗敎 등과 관련된 生活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안악 3호분의 부엌과 고기 창고 그림(황해남도 안악군)
-그림에서 高句麗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집과 먹었던 음식, 키우던 動物을 보고 生活 모습을 想像해 볼 수 있어요.
舞踊塚 접객도(중국 지린성 지안현) 접객도: 손님을 맞아서 시중드는 모습을 그린 壁畫.
-사람들의 크기를 다르게 그린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의 身分에 따라 크기를 달리하여 그렸다고 해요. 이뿐만 아니라 입은 옷도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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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 時代 사람들은 佛敎를 받아들여 절, 塔, 佛相 등 佛敎와 관련 있는 文化遺產을 많이 남겼다. 高句麗 땅이 아닌 곳에서 發見된 高句麗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은 현재 남아 있는 佛相 가운데 三國 時代를 代表하는 金銅佛이다.
百濟는 佛敎와 關聯 있는 文化遺產뿐만 아니라 古墳과 工藝品 등도 남겼다. 百濟 武寧王의 무덤인 武寧王陵에서는 百濟의 文化遺產 외에도 中國의 文化遺產과 日本 소나무로 만든 물건이 함께 발견되었다. 金銅佛: 구리에 얇은 입힌 佛相.
高句麗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國立 中央 博物館) 佛相 뒷면에는 佛相을 만든 까닭과 時期가 記錄되어 있다.
-이 佛相의 실제 크기는 16.2cm로 작지만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佛相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어요.
武寧王陵(충청남도 공주시)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日本 소나무로 만든 관의 일부
武寧王 金製 관식
武寧王陵에서 출토된 中國의 화폐
-왜 武寧王陵에서는 다른 나라의 物件들이 發見되었을까요?
武寧王陵에서 出土된 中國 陶瓷器
-百濟가 다른 나라들과 交流를 많이 했던 것이 아닐까요?
또한 百濟 金銅 대향로와 같은 작품을 보면 백제 사람들이 뛰어난 예술 감각과 능력을 가졌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百濟 金銅大香爐(國立 夫餘 博物館) 연꽃 모양의 몸체, 香爐를 떠받치고 있는 龍
鳳凰, 피리 부는 사람, 말을 타고 사냥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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彌勒寺는 百濟 武王 때 지은 절로 百濟에서 규모가 가장 컸다고 전해진다. 현재 益山彌勒寺址에는 益山彌勒寺址石塔과 건물의 터만이 남아 있다. 益山彌勒寺址石塔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石塔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石塔이다. 이 塔은 木塔의 모습을 본떠 잘 다듬은 돌을 쌓아 만들었다. 彌勒寺址: 彌勒寺가 있던 자리라는 뜻으로, ‘地’라는 말은 원래 있던 建物은 없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는 의미임.
高句麗와 選定의 文化遺產 中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고, 그 까닭은 무엇인가요?
-선생님, 三國 時代의 塔은 왜 모두 돌로 만들어졌나요?
-三國 時代에는 木塔도 만들어졌었지만 火災와 다른 나라의 侵入 등으로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있어요.
復元된 益山彌勒寺址石塔( 全羅北道 益山巿), 彌勒寺 復元圖(想像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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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 歷史 遺跡 地區가 世界 遺產에 選定된 까닭은 무엇일까
百濟는 高句麗, 新羅와 힘을 겨루는 過程에서 여러 번 都邑地를 옮겨야 했다. 이 都邑地들을 中心으로 百濟의 文化遺產들이 많이 남아 있다.
百濟의 都邑地들과 관련 있는 公州巿, 夫餘郡, 益山巿의 遺跡地들을 묶어 ‘百濟 歷史 遺跡地區’라고 한다. 유네스코는 이곳의 文化遺產이 宗敎, 建築, 技術, 藝術的인 아름다움 등 百濟의 文化的 특징뿐만 아니라 三國 時代 우리나라가 日本, 中國과 서로 交流한 모습을 잘 보여 준다는 점을 인정해 百濟 歷史 遺跡 地區를 世界 遺產으로 選定했다.
百濟 역사 유적 지구
公州-公山城 宋山里 古墳君 夫餘-扶餘官北里 遺蹟 . 扶蘇山城 陵山里 古墳君 定林寺地 羅城, 益山-王宮里 遺跡 彌勒寺址
百濟 歷史 遺跡 地區의 代表 遺跡地
公州 公山城, 公州 宋山里 古墳君 夫餘-扶餘官北里 遺蹟과 扶蘇山城, 扶蘇 陵山里 古墳君, 夫餘 定林寺地, 夫餘 羅城, 益山-王宮里 遺跡 彌勒寺址
25쪽
新羅와 伽倻의 文化遺產을 알아봅시다.
三國과 伽倻는 競爭하면서 葛藤을 겪기도 했지만, 交流하면서 文化를 주고받기도 했다. 또한 中國과 日本, 西域 등과도 交流하며 文物을 交換했다.
慶州에는 金으로 만든 裝身具, 陶器, 유리병 등 新羅의 文化와 對外 關係를 보여 주는 文化遺產이 많이 남아 있다.
봉수형 유리병(國立 中央 博物館) 봉수형: 鳳凰의 머리 모양
-慶州 皇南大冢에서 나온 봉수형 유리병은 西域에서 만들어져 新羅에 들어온 것입니다.
金冠冢 金冠(國立 慶州 博物館), 慶州 大陵苑 일원(慶尙北道 慶州巿), 陶器 騎馬 人物形 明器(國立 中央 博物館) 明器: 죽은 사람이 죽음 이후에 이어질 삶을 위해 무덤에 함께 묻던 그릇이나 樂器, 武器 등의 物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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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는 佛敎를 받아들인 이후에 백성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고 王의 權威를 세우려고 佛敎를 政治에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新羅에는 절과 塔이 많이 세워졌는데, 특히 善德女王은 芬皇寺와 皇龍寺 9층 木塔 등을 만들어 佛敎의 힘으로 이웃 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 내고 나라의 힘을 모으려고 했다.
우리 歷史에서 여성이 王位에 올랐던 나라는 新羅뿐이다. 善德女王은 우리 歷史에 등장하는 최초의 女王이었다. 그녀는 김춘추, 김유신과 함께 高句麗와 百濟의 공격에 맞서 新羅를 지켜 냈으며 여러 文化遺產을 남겼다.
皇龍寺 9층 木塔 復元圖(想像畫), 慶州 瞻星臺(慶尙北道 慶州巿)
또한 하늘의 별, 해와 달의 모습 등을 觀察하는 시설로 알려져 있는 瞻星臺를 만들었다. 이 밖에도 慶州에는 新羅의 文化와 그 수준을 보여주는 많은 文化遺產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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伽倻 지역에서는 질 좋은 철이 많이 생산되었다. 이 때문에 伽倻는 철을 이용해 다른 나라와 활발히 交易했다. 가야 사람들은 철을 이용해 다른 나라보다 우수한 칼과 창, 갑옷 등을 만들어 냈다.
伽倻 文化와 관련된 歷史 記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아 伽倻의 古墳에서 出土된 物件들은 伽倻 文化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당시 伽倻의 樂器였던 伽倻琴은 현재까지 전해진다.
철제 갑옷과 투구(國立 金海 博物館), 高靈 池山洞 古墳群(慶尙北道 高靈郡), 伽倻琴
伽倻를 理解하기 위한 文化遺產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伽倻는 어느 나라와 交易했을까
철을 이용해 만들어진 物件들은 사람들의 生活 모습을 바꾸고 社會를 發展시키는 중요한 道具였다. 伽倻 遺跡에서 발견된 덩이쇠는 철의 소재로 쓰이거나 돈으로 사용되어 物件을 사고파는 등 여러 용도로 쓰였다. 伽倻는 바닷길을 이용해 철과 철로 만들어진 物件들을 日本으로 輸出하기도 했다.
덩이쇠(國立 金海 博物館), 배 모양 토기(國立 金海 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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