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장강명 / 문학동네
신선한 생각이다. 책 묶음을 풀어헤친다. 그 책은 페이지가 적히지 않았고,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문단도 거의 없다. 풀어헤친 책이 바닥으로 쏟아진다. 무질서하게. 어떻게 다시 정상으로 다시 묶을 수 있지?
서사를 이해하는데 순서가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것은 아닌 듯하다. 이야기가 재미있으려면 흥미를 유발해야 하는데, 이 책의 구성은 요즘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와 비슷하다. 앞 뒤 전 후 좌 우가 섞여 있다. 내면의 고민이나 싸움, 이런 것은 독자에게 넘겨버린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가 그런 식이다. 이전에는 시청을 마치고 나눌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는 재미의 여부를 따지는 것에서 벗어나, 시청자가 작품을 재구성하지 않으면 작품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놓치는 내용이 허다하게 발생한다.
학교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을 들추고 있다. 최근에 시청한 "더 글로리"와는 결을 달리하는 이야기다. 첫판이 2015년 8월이니 오래된 소설에 속한다고 본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 순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순서가 뒤죽박죽으로 섞일 가능성은 없을까? 그 질서의 어디쯤 서 있느냐에 따라 나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을까? 서 있는 곳은 현재이지만 이미 모든 것을 본 자의 선택을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태어나면 나는 지금과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진 분이 있다. "나"는 다시 태어나도 "나"이기 때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다는 말, 나는 그 말을 기억한다. 그리고 동의한다. 벌써 25년도 넘었는데.
올바른 결정을 하기 위해서 고려해야 할 것들은 참으로 많이 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사람 중에서도 "남은 자"이다. 남아 있는 자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가 떠날 사람이라면 떠날 사람은 자신을 온전히 버려도 좋은 것인가? 그런 질문이 남는다. 이 소설이 그런 물음을 준다. 떠날 사람이건 그냥 남아 있을 사람인지 상관없이 그런 사람을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소설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간단한 질문에는 부합하지 않지만, 나는 소설 속 남자의 결정을 지지한다. 남자는 혼자이기에 가능하다. 그리고 여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를 성인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과정이 어떠하든 그는 사람을 죽였다.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죽은 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죽인 자를 죽이고 편안할 수 있을까?
여자는 이제 자유롭게 날 수 있을까? 남자에게 그 여자는 어떤 존재였을까? 많은 것이 감추어 있는데, 나는 알 수 없다. 다시 읽어보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