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 4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형제들아~ 》
살후 1:3~4
<감동 잃고 슬픔조차 못 느끼는 요즘 설날>
여섯 밤 자면 설날입니다. 가슴이 설렙니까?
여러분들 얼굴을 보니 별로 설레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설날을 기다리면서 가슴 셀렌 때가 언제였습니까?
설날이면 응당 가슴이 설레야 하는데, 감동이 없네요!
설날이 와도 설레지 않는 가슴, 이 또한 슬퍼해야 하는데 슬프지도 않아요.
감동도 없어요, 슬픔도 없어요! 그렇다면 민족의 대 명절 설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제 개인적으로 생각해보면 설날 감동이 반감된 계기가 있습니다.
저희는 7남매입니다. 부모님 살아계실 때는 7남매가 모두 부모님 집으로 모였습니다.
그러다가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결속력이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설날의 감흥을 돋구려고 모이기에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카들이 하나둘 결혼했습니다. 집집마다 며느리 사위를 맞아들였습니다.
이때부터 명절분위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모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이제는 며느리 사위를 맞이해야 합니다.
설 전날에는 아들 며느리가 와서 준비하고 설날 아침 세배하고 아들 내외가 떠납니다.
며느리의 친정으로 갑니다. 오후가 되면 딸과 사위가 옵니다.
딸이 시댁으로 가서 세배하고 사위와 함께 오후에 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 형제들은 아들 부부 딸 부부를 기다려야 하니 집을 떠날 수 없습니다.
형제들이 핵분열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일인데 감동이 줄었습니다.
형제들이 못 모이면 아들 며느리, 딸 사위라도 많아야하는데, 달랑 하나씩입니다.
명절이 되어도 복닥거림이 없습니다. 조용합니다. 조용하다는 것은 감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명절이면 형제들이 모이다가 며느리 사위를 맞이해야 하니 못 모이는 것은 당연합니다.
형제들이 못 모이면 며느리 사위 손주들이 명절의 감동을 느끼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나 둘 낳아서 키웠으니 썰렁합니다. 이것이 요즘 한국의 명절 풍속도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이 “형제들아~”입니다.
☞ “형제들아~ 설날이 오고 있다!” 형제들아~
<바울이 부른 호칭 “형제들아~”>
설 명절이 돌아와서 “형제들아~”하고 불러봅니다.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각자 자기 집에서 아들 며느리, 딸 사위를 영접해야 합니다.
이제는 “형제들아~” 하고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여섯밤 자고 나면 설날이라서 형제들이 더 그립습니다. 나지막히 불러봅니다. “형제들아~”
☞ 이 “형제들아~”를 가장 많이 외쳐 부른 분이 계십니다. 누구일까요? 알아맞혀보세요!
바로,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 세상에서 “형제들아~”를 가장 많이 부른 사람입니다. 몰랐지요?
오늘 본문이 있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까지 있는 짧은 서신서입니다.
이 안에 “형제들아~”가 7번이나 나옵니다. 한번 볼까요?
1장에 한번(3절) 2장 세번(1절, 13절, 15절) 3장에 세번(1절, 6절, 13절)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무려 15번이나 나옵니다. “형제들아, 형제들아, 형제들아…”
신약성경에는 바울서신이 모두 13편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성도들을 “형제들아~”라고 호칭합니다.
“여러분~”이라고 할 법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터키와 유럽 여러 곳에 교회를 개척하고, 그 교회 성도들을 꼭 형제라고 부릅니다.
바울이 “형제들아~” 하면, 이 호칭에는 꼭 남자들만 해당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교회의 여자 성도, 노인, 젊은이, 아이들까지 다 포함이 됩니다.
데살로니가서에서 바울이 “형제들아~”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전 성도를 부른 겁니다.
속으로 ‘나는 여자인데…’ 하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습니다.
바울의 “형제들아~” 이 호칭에는 “자매들이여~”가 당연히 포함됩니다.
‘나는 바울의 할아버지뻘인데…’ 하면서 서운해 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감히 어떻게 바울 사도와 형제가 될 수 있나?’ 하면서 손사래 칠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 서신을 읽으면, “형제들아~”가 매우 빈번하게 나옵니다.
그때마다, ‘아,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구나!’ 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 바울 사도는 왜 교회의 성도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불렀을까요?
<예수님의 형제자매 그리고 어머니>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납니다.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타났습니다. 정면으로 바라보다가 눈이 멀었습니다.
사흘을 못 봤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그때부터 결혼보다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우선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바울처럼 교회 개척을 많이 한 인물은 없습니다.
자신이 개척한 교회의 성도에게 13통의 편지를 씁니다.
그 편지에서 성도를 지칭할 때 “형제들아~”라는 호칭을 씁니다.
☞ 이 호칭은 사도 바울이 창안할 것일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형제들아~”라고 부른 근거가 있습니다.
☞ 예수님이 군중들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문밖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전합니다. “당신의 모친과 아우들이 문밖에 와 있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대답하신 말씀이 복음서에 나옵니다.
마 12:48~50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자칫 이 대목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낳아주신 어머니가 있습니다. 아래로 동생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생모와 친동생들을 부인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생모와 친동생들은 그들대로 귀하고 소중합니다.
예수님은 가족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50절에서 잘 드러납니다.
① 이 말씀은 육신의 형제자매도 귀하지만, 영적 형제자매가 있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② 사람에게는 육신의 형제자매, 부모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선포의 말씀입니다.
③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형제자매 아버지 어머니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부모, 육신의 형제자매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외롭고 고독합니다.
부모님은 자식보다 앞서 돌아가시고, 형제들은 나이가 들면 뿔뿔이 흩어집니다.
명절에도 모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할렐루야~
<육신의 형제자매, 주안에서 형제자매>
아무리 의좋은 집안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생활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형제간이 저절로 멀어집니다.
설날 추석날 잘 모이다가도 자녀들을 결혼시키면서 핵분열이 됩니다.
형제간의 우의는 그때까지입니다.
☞ 그래서 사람들은 외롭습니다. 고독합니다.
하나님이 이러한 삶의 실상을 제일 잘 아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라!(마 4:4)
☞ 예수 안 믿는 이들에게는 오직 육신의 형제자매가 있을 뿐입니다.
☞ 그러나, 예수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주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마 12:50)
주 안에서, 믿음 안에서,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는 한 분 하나님을 다 같이 ‘아버지, 아빠’라고 부릅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나는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어라!”하십니다.
새로운 가족 관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개척한 교회의 성도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호칭이 있습니다. 목사님! 사모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그러나 이 모든 호칭은 “형제들아~” 이 속에 다 들어가는 호칭입니다.
교회에서 “형제” “자매”는 최고의 호칭입니다.
목사, 사모, 장로, 권사, 집사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호칭입니다.
하나님은 육신의 부모와 형제자매, 부부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매우 귀하게 다룹니다. 십계명 제5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육신의 관계가 오래가지 못함을 너무나 잘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몸소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어주십니다.
새롭게 형제 자매로 우리 관계를 만들어주십니다. 이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가정, 교회 공동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 하와를 짝지어 주심으로써, 육신의 가족관계를 이루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후에, 가족을 이루어 살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부모, 형제, 자매, 일가, 친척이라는 가족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갑니다.
가족을 이루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공동체는 불완전한 공동체입니다.
영원히 지속 될 수 없는 한시적 공동체입니다.
_ 부모님은 자식에 앞서 돌아가십니다.
_ 형제가 장성하여 각기 가정을 이루면 흩어져야 합니다.
_ 흩어졌다가 명절에 모이는 것도 각자의 자녀들을 챙기느라 어렵게 됩니다.
가정은 그 어떤 것보다 귀중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한시적입니다. 영원할 수 없습니다.
솔로몬의 부귀영화가 풀의 꽃과 같고, 풀잎에 맺힌 이슬방울이듯이,
☞ 무엇보다도 가정에는 ‘영생’이 없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은 한 번 태어나면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가장 안타깝게 여긴 분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피조물 인간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탄식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가장 절실하게, 가장 간절하게 바라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또 하나의 공동체 ‘교회’를 주십니다.
‘교회’는 예수님 이후,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공동체로 탄생합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역할을 했습니다.
그때는 제사 공동체였습니다. 믿고 구원받은 지체들의 모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써 하나님의 나라, 천국시민들의 교회가 탄생되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형제자매의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함께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은 형제요, 자매입니다.
형제 자매이니 만큼 가능하면 친밀한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친밀해질 수 있습니까?
교회들마다 주일 오전에 예배를 한 후에 점심 식사를 같이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가 형제요 자매라는 끈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어린시절 형제간에는 모든 것을 공유했습니다. 속속들이 알고 지냈습니다.
☞ 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성도는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마무리>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가 된 우리는 기도제목을 공유합니다.
기도 제목을 공유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간절함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저 형제를 어떻게 들어쓰시고자 하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교회가 됩니다.
세상 모든 이들은 하나님이 창설하신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삶을 시작합니다.
부모님과 형제자매가 있는 곳, 가정입니다. 여기서 태어나 자라서 세상으로 나아갑니다.
가정 공동체는 한시적인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우리에게 영원한 공동체 교회를 주셨습니다.
교회에 속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죽음이 우리를 가로막지만, 하나님은 무덤을 뛰어넘은 ‘영생’으로 교회를 창설하셨습니다.
☞ 여섯 밤 자고 나면 설날입니다.
☞ 명절을 맞이하면서 우리가 부르는 이름은 “형제들아~”입니다.
☞ “형제들아~” 참으로 간절한 이름입니다.
☞ 사도 바울이 새롭게 교회의 지체들을 향하여 부르는 “형제들아~”를 들어보십시오!
예수믿고 구원받은 우리가 듣는 바울 사도의 “형제들아~”
어린시절 동네 아이들과 논밭을 놀이터로 뛰어노는데, 어머님이 부릅니다.
“의찬아 와서 밥 먹어라!” 이 부름은 못 들은 꽤 오래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우리를 정겹게 부릅니다.
“형제들아~” 와서 밥 먹어라!
“형제들아~” 어여 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라!
즐겁고 기쁜 설날로 우리를 불러줍니다.
즐겁고 기쁜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우리를 손짓하여 불러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라고, 은혜로 감사하고 감격하라고 우리를 불러줍니다.
☞ 이번 설날, 떡도 배불리 먹고, 하나님의 말씀도 넉넉하게 받아먹기를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