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8. 04;00
온몸이 선뜻하다.
새벽기온이 제법 내려갔나 보다.
나도 모르게 홑이불을 덮고 잤으니 말이다.
창문틀에 앉은 귀뚜라미가 처연하게 운다.
한동안 주인행세를 하며 자지러지게 울던 매미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잠결에 들리던 소리는 분명 소쩍새 소리였다.
앞산에서 밤새도록 오음절(五音節)로 울어대던
솔부엉이 소리가 그치자 갑자기 고요가 찾아왔다.
지금 기온 섭씨 21.7도,
어제 낮엔 무학봉~매봉~남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에서
땀깨나 흘렸는데, 제법 시원한 바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온다.
무더위로 사람을 무한대로 괴롭혔던 여름,
엄청 지루하기만 했던 여름,
열대야 신기록을 경신하며 도저히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여름도 이젠 지쳐가는가 보다.
05;00
숲 속으로 들어서자 노란색 '삼잎국화'가 어둠 속에서
나를 반긴다.
삼잎국화가 잠을 자지 않고 밤새 나를 기다렸고,
여명빛도 올라오지 않은 새벽 캄캄한 숲 속에서
뜻밖에 삼잎국화꽃을 만나니 기분이 좋아진다.
< 삼잎국화 >
이럴 때 생물학자들은 꽃을 보는 나의 뇌 속 후두엽은
색을 인식하는 긍정적인 감정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세로토닌과 도파민 같은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돼 기분이 좋아지는 거라고 어렵게 설명을 하겠지.
누구나 꽃을 보면 희망과 기대감을 느끼고, 꽃을 보는
마음 자체가 사랑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쉽게 아는데
말이다.
꽃은 색깔에 따라 다른 느낌을 준다.
빨간색 꽃은 사랑과 회복력,
파란색은 심리적 안정감,
주황색은 활발한 사교성을 불러일으키고,
삼잎국화처럼 노란색은 행복감을 준다고 한다.
처서가 지났고 백로(白露)가 지나면서 이슬을 맞는
곤충의 시간도 바뀌었다.
여름 매미의 시간이 가고 가을 귀뚜라미의 시간으로
왔으니 불교 용어인 시절인연(時節因緣)이란 말이
떠오른다.
오늘따라,
"우주에 있는 모든 만물이 항상 생사와 인과가 끊임
없이 윤회하며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라는
뜻의 제행무상(諸行無常)보다,
"모든 현상은 어떤 시기가 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라는 뜻을 가진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계요등(鷄尿藤)과 서양등골나물도 피기 시작했다.
이번 가을엔 어떤 국화를 만날 수 있을까,
아마도 산국, 감국, 쑥부쟁이, 개쑥부쟁이, 개미취,
벌개미취, 구절초를 만날 수 있겠지.
이 생각 저 생각을 하는 사유(思惟)의 숲길에서
여치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낭창낭창하게 울어댄다.
여름의 시간이 다돼가고 가을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시간과 계절이 바뀌는 건 인간이 어찌할 수가 없다.
바뀐 계절의 시간을 묵묵히 감내하며 그냥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epilogue)
오늘 느림의 미학 833편을 썼다.
833이라는 숫자는 50년 이상 내 머릿속에 늘 남아있다.
강원도 양구 동면 대암산 자락 임당리와 팔랑리에
8인치포를 보유한 833 군단포병과 105mm 견인포와
155mm포를 보유한 922 포병이 있었다.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가 저격당하던 날,
그날 대포에 포탄을 장전했던 그 부대들이 지금도
북녘땅을 겨냥한 채 그곳 그 자리에 있으려나.
2024. 9. 8.
석천 흥만 졸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