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라.
성경본문 : 잠언 3: 25-26
25. 너는 창졸간의 두려움이나 악인의 멸망이 임할 때나 두려워하지 말라
26. 대저 여호와는 너의 의지할 자이시라 네 발을 지켜 걸리지 않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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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기태 목사
두려움은 지구상에서 가장 고가의 상품입니다. 대부분의 TV광고는 상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팔고 있습니다. 저들은 사람들의 두려움만 건드리면 뭐든 팔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을 자극하여 건강보조식품은 날개 돋힌듯이 팔리고 있습니다. 보험회사는 사고와 질병을 이용하여 두려움을 건드려서 온갖 종류의 보험상품을 팔고 있습니다. 온갖 다이어트 산업은 비만이 만병의 근원이라며 살을 빼지 않으면 곧 병에 걸린다고 두려움을 자극하고 있습니다. 일찍부터 학원에 보내고 남들처럼 조기 유학을 보내지 않으면 국제화 시대에 자녀들이 뒤쳐지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을 팔아 영어 교육시장이 얼마나 빠르게 성장했는지 모릅니다. 화장품은 비쌀수록 잘 팔립니다. 성형외과는 요즘같은 방학에는 인산인해를 이룹니다. 아름답지 않으면 취직도 안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입니다. 명품 하나라도 없으면 무시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때문에 짝퉁이라도 걸치려고 기를 쓰는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늙는 게 두렵고, 외로울까봐 두렵고, 가난해 질깨봐 두렵고, 무시당할까봐 두렵고, 실패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감정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하여 상인들은 우리의 지갑을 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두려움을 건드리는 것은 상인들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두려운 감정을 자극하여 우리를 조종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주머니뿐 아니라 우리의 영혼까지 노리는 세력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을 이용하여 우리를 조종하고 파멸에 이르도록 하는 세력은 사단입니다. 사단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에 끌려 다니다보면 우리의 믿음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감동에 반응하지 못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결국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두려움의 실체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1. 두려움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질 때 찾아옵니다.
두려움은 인간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난 후 찾아온 매우 달갑지 않은 손님입니다. 최초의 인간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직후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9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두려움때문입니다.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오는 것입니다.
딤후 1:7에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하나님은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시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사단이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심습니다. 그래서 사이비 종교의 특징중에 하나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저들은 건강한 그리스도인을 향해서도 그렇게 믿어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행위와 열심과 율법 등을 들먹이며 두려움을 건드립니다.
"예수믿으면 구원받는 것 아니냐?"고 대답하면 그렇게 구원이 쉬우면 누가 구원받지 못하겠느냐?고 비웃습니다. 그러면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정말 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아닌가 당황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2:21)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으리라.(요3:16)
성경은 '누구든지'와 '믿는 자마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와서 두려움을 심고 불안감을 조성하면 쫓아버리기 바랍니다. 그것은 절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저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이해가 잘 되지 않았던 부분이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을 언급하면서 영원한 형벌에 놓일 사람들 가운데 두려워하는 자들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살인자들, 음행하는 자들, 점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이 심판받는 것은 수긍이 갑니다. 믿지 않는 자들 거짓말하는 자들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이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 수긍이 안되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 자가 심판을 받아야 합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사람의 제일 큰 특징이 두려움입니다. 아담이 범죄후에 두려워 숨었고, 요나가 그랬으며, 다윗이 범죄 후에 숨었습니다.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불안과 초조, 걱정과 염려, 도피와 집착 등이 모두 두려움과 연관이 있습니다.
(딤전 6: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두려움은 현대인들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사람은 추락에 대한 두려움, 거센 비평에 대한 두려움,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 거절에 대한 두려움, 대립에 대한 두려움, 능력부족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등 갖가지 두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런데 그 배후에 사단이 숨어서 조종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움에 굴복하여 스스로 도피처를 만들면 점점 하나님과 멀어지고 추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11살부터 배를 탔던 요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요한을 궁중해군의 선장으로 키우기 위해 훈련을 시켰습니다. 하지만 그는 훌륭한 과정을 이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요직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잘못된 행동과 반항적인 태도 때문에 계속 강등되었고 심지어 처벌까지 받았습니다. 20대 초반, 요한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나르는 그레이하운드라는 배의 선원으로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항해 중에도 사람들을 비꼬았고, 특히 신앙인들을 조소했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혹평하던 그 날 요한이 탄 배가 광풍 속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배가 빙빙 돌아 파도의 꼭대기까지 올라가더니 갑자기 바닷물 속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곧 이어서 배의 가장자리가 부서져나갔고 선실은 물로 가득 차 오르면서 침몰하기 일보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요한과 다른 선원들은 배를 구하려고 9시간 동안이나 사기를 잃지 않고 발버둥치면서 안간힘을 썼습니다. 어쩌면 그 날 밤이 그들에게 최후의 순간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때 반항적이었던 요한은 갑판 위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하나님께 매달려 간구했습니다. "하나님 인간들의 노력이 소용없어질 때 모든 선원들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폭풍우 속을 헤치고 생존한 그가 바로 요한 뉴턴입니다. 한 때 그렇게도 반항적이던 인간이 변하여 '"나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와 같은 은혜로운 찬송가를 작곡하고 당대의 위대한 설교자가 되어 그 후 50년 가까이 하나님의 은혜를 전파하다가 일생을 마쳤습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26)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분입니다. 온갖 위험과 위기에서 건져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을 이기려면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안전해보이는 동산 나무 사이로 숨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낯을 피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낯을 볼 수 있는 곳이 가장 안전한 지역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시편에 보면 하나님의 얼굴을 간절히 찾고 있습니다.
(시 27:8)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다윗은 죄때문에 괴로와하고 있을 때도 하나님의 얼굴만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용서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서 회복될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뵈올 때 두려움이 떠나가고 평안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두려움을 없애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 아빠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나님과의 친밀함의 다리가 되어 주셨습니다.
(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스런 자녀가 되었습니다.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더이상 사단의 위협아래 두려워하며 초라한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스스로 안전한 도피처를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든 도피처는 거짓 안전입니다. 사단의 속임수입니다.
카이스트에서 28살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덕연구단지의 연구소에 일해던 최하진박사의 간증입니다. 그럴듯한 학벌과 안전한 직장을 양손에 쥐고 출세를 향해 달려가는 그에게도 선배들의 음주와 유흥문화를 따르지 않으면 신변에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 같아 두려움에 굴복하다보니 나중에는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부서의 상사가 조용히 불렀습니다. "오늘 외국에서 손님이 오는데 자리를 함께 할 수 있겠나? 중요한 손님이니 저녁식사 후 2차까지 예약을 해 놓게" 한참을 갈등하다가 더 이상 세상과 타협하지 않으리라는 결심으로 다시 상사를 찾아갔습니다. "식당 예약까지는 제가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2차는 못가겠습니다." 그일 이후 상사에게 찍혔습니다. 생색나는 프로젝트는 아부하는 사람에게 주고 최하진박사에게는 결과도 잘 안나오며 자칫 능력없는 사람으로 찍히는 모두 맡기 싫어하는 것만 주는 것이었스니다. 그런데 1년여의 연구 기간과 여섯번의 실패끝에 기적과 같이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대박이 난 것입니다. 그룹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인터뷰도 하게되고 크게 인정받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두려움 때문에 줄행랑치듯 안전해보이는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숨은 그곳은 절대 안전하지 않습니다. 더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사단에게 속아 스스로를 패배자로 몰고 가는 비참한 자리입니다.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해도 알맹이 없는 빈껍데기 일뿐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는 그곳으로 나아올 때 두려움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안전이 거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여 두려움에서 벗어나 참 자유를 누리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