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명-쓰나미의 아이들
저자-모리겐
출판사-바다(2010.8.3.) 291쪽
독정-2020. 2. 14
·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븐. 규모 9.0 쓰나미 지진이 동북지방 산라쿠 앞바다에서 일어 사망자와 행방불명자 19540명. 대피소 2444개소 설치, 피난민 38만명. 재해 3일 후 후쿠시마현 제 1 원자력 발전소에서 격납 용기의 수소폭발이 일어났다. 각종 공업 생산이 멈추자 아이들과 보호자. 가족이 지나온 이야기를 작문과 취재로 모아 낸 것이 이 책이다. 작문에서 어느 한 사람도 그들 고향을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 따스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주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지탱해 주고, 그러다 보면 또 살아진다. 재해 지역에서 살아가는 가족은 인간의 가장 자연스럽고 본질적인 부분을 극히 자연스럽게 실현해 갔다. 혈연과 지연이 씨줄, 날줄로 엮여 강하게 서로를 지탱하고,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그 주축이 가족이며, 그 모습은 마치 쓰나미가 빈번하게 일어나는 지역에서 살아가기 위해 몸에 밴 습관처럼 보였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쓰나미를 피해 도망치고, 아이들과 함께 다시금 생활 기반을 닦고, 아이들과 함께 다시금 생활 기반을 닦고 아이들에게 구원받는다. 지역민들도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한다. 형제를 생각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생각하고 지역을 생각하고 재해 지원에 감사하는 마음을 품으며 재난을 받아들였다.
· 지진이 오면 쓰나미가 오고 계속해서 오고 또 온다. 전에는 한밤중이었다니까. 땅이 울리면 오는 걸.
· 대피소에는 밥이 있어 기뻤다. 하지만 쓰나미 색깔은 시커멓다, 냄새도 났다.
· 처음으로 소리 내어 울었다. “참았던 게야”할아버지가 말했다.“ 내내 참았던 게야. 돌아올 거라 믿고. 그 이후론 안 울어 아빠 얘기도 안 하고 그걸 모르겠어. 그래도 운 다음부턴 기운을 차리더라고, 제 스스로 아빠에 대한 마음을 한풀 접은 건지도 몰라.”
· 피난 초기에는 아이들만 어울렸는데, 점차 나이가 많은 아이가 적은 아이를 돌보게 되었다. 어른들도 아이들을 배려했다. 본단 옆 넓은 탁자가 있는 사무실을 아이들 공부방으로 주었다. 텔레비전이 있는 부엌도 아이들이 드나들 수 있게 해주었다. ‘신발을 가지런히 하면 마음도 가지런하다.“고 써붙여 놓자 자기 신을 스스로 정리했다.
· 죽음에 익숙해지는 게 괴로운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 일을 매일 반복하는 것은 거꾸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실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생각하게 된다. 혼자 웅크리고 있으면 분명 그렇지 못할 것이다 혼자 감당하려 하면 괴롭지.
“아빠한테 받은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게 뭐니?”
“ 제 보물은 바로 아바예요.”
여덟살 소년이 함차게 한 마디 했다.
이틀 만에 만난 엄마는 울면서 “고맙다, 둘 다 괜찮았니? 배고프지.”하며 비스킷 4개를 건네 주었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가 따듯해졌다. 평소 입 밖에 내지 않았던 속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었다. 인생에서 이렇게 전속력으로 달린 적이 없을 만큼 정신없이 뛰고 아버지와 형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덜렁대고, 까탈스러운 나이대의남자아이가 가진 내면이 숨김없이 녹아 있었다. 글을 읽고 울었다고 엄마는 얼굴이 발그레지며 털어놓았다.
“고모할머니도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세상이 그 녀석이 하고요. 제 자식이지만 그렇게까지 가족을 위하는 줄 몰랐어요.”
· 텔레비전 안 보는 생활에 익숙해지고부터는 텔레비전 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우리는 집도 외삼촌도 잃었지만 가족ㅇ리 서로 아끼게 된 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었다. 전보다 사이가 좋아졌고, 형제간에도 서로 돕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쓰나미에 감사해요, 두 번은 사양하지만
·도시히코는 글이 아니라 그림을 내밀었다. 5장 연작 일러스트였다. 문장보다 효과적으로 쓰나미의 무서움을 전달해주었다. 고지대에서 본 중심부 풍경이었는데 집 위에 다른 지에 올라가 앉아 있고 유리창은 다 깨어지고 사람을 쓰나미가 덮치는 어설픈 표현이 공포를 더 잘 전하고 있었다.
·태어난 지 5ㄱ0개월 만에 처음 본 마사토는 꼭 강아지 같은 순진한 눈으로 나를 봤다. 마치 ‘당신 누구야?’하고 묻는 것 같았다. 그 옆에서 도시히코는 아장아장 걸었다. 얼마나 귀엽던지, 부모가 못 하는 일은 내가 해주어야지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아이들의 생명력이 얼만 엄청난지 알게 되고부터는 조카들에게 더더욱 애정이 깊어졌다.
·‘아, 깜짝이야!’하고 내가 올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던지 소리쳤다.
“고모 이거 해도 돼요?”할 때 그때마다 안 물어보고 그냥 해도 된다고 했다.
“2주 지나고 집에 가봤는데요, 우리 집은 3층인데도 옥상에 다른 집이 올라타 있었어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싶더라고요. 건물은 남아 있었지만 안은 난장판이고 물건은 다 떠내려갔어요. 슬프게도.”
“뭐가 떠내려가서 제일 슬펐니?”
“옷이랑 야구용품, 그리고 야구 대회에서 상받은 개인 프로피요.”
쓰나미 순간은 보지 못했다 아이들은 학교 운동장 가운데에 모영 교사으 지식에 .따랐는데 선생님들이 일어서지 마라 지 마라하고 엄하게 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 교실에 들어가 재해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어땠냐면 집이고 뭐고 다 떠내려가고 있었어요.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어요, 영화같기도 하고 현실인지 헷갈렸어요. 역시 시즈가와가 좋아요 쓰나미는 무섭지만 빨리 복구하면 되지 않을까요?“ 시즈가와를 떠나느 건 아니 생각한 적도 없어요. 여기서 태어나 자랐고 여기가 좋아요. 바다도 있고 사 ㄴ도 있고 여름에는 해수욕하고 바비큐도 하고 헤엄 치러도 가고 내가 사는 곳을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이런 데 없어요.
·운이 좋았다고 느낀 부분은 많았다. 집을 나서다가 큰아들이 잊은 물건이 있다며 되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그건 나중에 찾아도 돼.”하고 소리쳐서 못 가게 막은 일. 대피하는 길이 그때까지 크게 혼잡하지 않았던 일. 가오라는 자잘한 운영이 겹쳐서 목숨을 건졌다고 느꼈다. 다들 운이나 연으로 살았다. 그때 만약 집으로 되돌아갔더라면 끝이었다.
“고치며 고쳐져요. 우리 힘으로 고치면 되지 하는 마음이 들어요. 언제까지 가슴 아파하고만 있을 순 없어요. 어쨌든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니까요.”
한 사람은 야구팀에서 알게 된 학부형. 다른 한 사람은 재해 전부터 이 가게를 다니던 단골손님이었다. “요시부 아버지가 학생 때 제 친구였어요. 그러니 애들이랑 아버지가 2대에 걸친 친구 사이예요.”
“이런 좋은 동네 없어요. 응 나쁜 점이라며 간혹 욱하고 싸우는 건데, 하지만 그 자리에서 싸우고 그 자리에서 끝나요. 그러니까 다들 사이가 좋아요.”
“문제는 집터인데 아무래도 높은 지대를 확보해야 하잖아요. 그 점만 해결되면 괜찮은데.”
“그 다음은 물고기, 월래대로라면 지금 가을 연어 철이라 떼 지어 보일 때죠. 고기잡이만 제대로 되면 좋겠어요. 안 그러면 어부들이 못 살지.”
물론 나도 소중한 물건이 많이 떠내려가고 추억이 깃든 집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면 슬퍼서 못 견딘다. 하지만 나까지 침울하면 걱정할까봐 밝게 행동하기로 했다. 식구가 겨우 앉을 만큼 자리를 잡았다. 저녁나절이지만 일단 잠을 청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무척 피곤했지만 깨어 있으면 나쁜 생각이 나서 두려웠다. 비닐 시트만 깐 바닥은 너무 딱딱하고 차가웠다. 3월은 봄이지만 얼어붙은 듯한 추위가 계속 되었다. 이불 대신 코트를 덮고 잤다. 2층은 무사했다. 사다리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 남은 물건을 꺼내고 1층 가게에서는 쓸려 들어온 것을 빼내기 시작했다. 나는 가벼운 짐을 드는 정도밖에 할 수 없지만 열심히 도왔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는 것 같았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무엇이든 배웠다. 가족을 잃은 분들께는 미안하지만 고생은커녕 사랑하는 가족과 밥을 수 있고, 잠 잘 수 있어 너무 행복하다.
“먼 곳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지저분하지만 들어오세요. 다른 곳에서도 취재를 하시다 오셨으니 점심 못하셨죠? 있는 찬으로 차려서 죄송하지만 좀 드세요.”
<갓난 아기가 잠들어서 쓰나미를 피한 사례>
·가족이 바닷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려고 갔는데 쇼타로가 잠 들어 버렸다. 그때 깨우면 잠투정을 할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지금 깨우면 안 좋지. 그럼 그냥 갈까.“하며 다시 온 길을 되돌아갔다. 집에 돌아와서 대충 차려 먹으려고 부엌에 들어가는데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가려던 레스토랑은 바다를 정면으로 보고 있어 전망이 좋아 가족이 그곳에서 천천히 식사를 했다면, 운 좋게 빨리 나왔더다도 돌아가는 길이 막혔더라면 아마도 모두 차 안에서 쓰나미를만났을 것이다. 쇼타로가 자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연날리기 축제를 열려고 소시지, 커피, 주스 등을 준비해 무료로 주었다. 수익ㅇ르 남길 생각은 없다 이런 일만 열심히 한다. 축제를 좋아하니까.
“2층에 지요 방이 있어요. 그런데 갑자기 2층에서 ‘아빠!’하고 불러요 ‘어, 왜?’하면 ‘사랑해.’하더라고요. 밥하고 있을 때도 다가와서 ‘있잖아요. 오늘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해서 “응, 뭔데?‘했더니 ’사랑해요.‘하면서 빙긋 웃어요. 소파에 앉아 있으면 무릎 위에 올라앉거나 무릎을 베개 삼아 눕기도 해요. 갑작스런 변화지만 기뻐요.”
하며 이날 처음으로 웃었다. 따가운 햇살 속ㅇ데 집 입구에서 티셔츠에 짧은 작업 바지 차림으로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넌 대체 무슨 생각 하는 거냐? 하고 싶은 말은 확실하게 해.”
아빠 말에 지요는 울면서 말했다.
“아빠, 나 엄마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
처음으로 감추었던 마음을 털어놓았다. 꾹꾹 눌러 두었던 마음을 이제 더 이상, 그 작은 가슴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빠는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끌어안았다. 아빠의 뱜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요에게는 엄마이자 자기에게는 아내인 가즈미의 사진을 벽에 붙였다. 지오는 지금까지는 볼 수 없었던 환한 얼굴이 되었고 말할 때의 표정도 풍부해졌다. 목소리도 한층 밝아졌고 전보다 활기 있어 보였다. 나도 하루하루를 ‘오늘도 또 살아 있었나.’하면서 보내고 엊베 기억을 열흘 전으로 착각한 적도 있다.
‘어제는 허전했어요.’라는 소리를 하고 외로웠다. 아버지는 딸을 평범한 어른으로 키우고 싶다. 딸을 먹이는 일도 꾸짖는 일도 자기밖에 할 수 없다. 지금 그에게 의지는 그것 하나다.
“근데 그걸 뒤집어 생각하면, 지금 나는 지요 덕분에 사는 거예요. 지요가 없었다면 내 인생도 끝났겠죠. 그래서 아이를 키우는 건 나를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뒷길은 좁지, 고지대는 멀지, 훨체어로는 양쪽 다 어림없어요. 노인회관 서비스 날이 목요일인데 금요일 변경되는 바람에 모두 금요일에 거기에 모여 있어서 변을 피했다.
“할머니는 물에 휩쓸려 갔을지도 모르겠구나.”
동생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와 엄마는 숨죽여 울었다. 그 이후로 학교가 없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일 시간이 남아 돌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즐거움이었다. 피신할 때 가지고 온 노트와 필통을 쓰는 것이었다. “그림 그리기”로 힘을 얻는다. 잘 부탁해 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마을아. 무사히 돌아와 준 친구들도 고마워. 모두 사랑해요.
“제일 잘 썼어.”
“그래요?”
한마디 뿐이었다. 쑥스러워 했다. 그러자 아버지가
“나오키는 책을 좋아해요.”하고 덧붙였다. “책은 닥치는 대로 읽어요. 그림도 그리고, 피난 때에도 노트랑 필통은 챙겼죠. 그렇지?”
아버지 말에 나오카는 점점 더 부끄러워했다. 지키는 중학교에 들어가서 베드민턴을 시작했는데요. 이번에 처음 경기에도 나가요. 마나토는 미니축구를 하고요. 아무래도 친구들이랑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니 좋겠지요. 가능하면 아내의 미용실 가게를 다시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아내에게 민들레는 보물이나 마찬가지고요. 나중에라도 어떻게 해서든 다시 하게 해주고 싶어요.”
가는 길에 옛 집터를 둘러보는데 민들레 미용실 자리에 진짜 민들레가 피어 있었다. 작지만 깊이 뿌리 내리고
· 재해 전에는 학교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큰일을 겪고 나니까 학교가 이렇게 재미있는 곳이구나 처음 알게 됐어요. 등교 첫날은 인사만 나누는데도 좋더라고요. 소중한 거 같아요.“
“여기 이사해서 집안일을 꽤 거들어요. 어른스러워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