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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식탁(출16장11-20)
성경본문:출애굽기 16:11-20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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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우리 교회의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또한 로고의 뜻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나 교회”를 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맛나” 혹은 “사람을 만나”는 교회로 생각합니다. 본래의 의미는 광야 같은 세상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양식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의 로고가 원형인 것은 “빵”을 상징하며, 또한 네 개로 나누어진 것은 “생명과 말씀을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서 베풀어 준 “광야의 식탁”
오늘 우리가 나누려는 말씀이 바로 그런 상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도저히 상황파악을 못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자손 대대로 간직하며 내려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이야기,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사건은 도저히 상황파악을 못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은 많은 난관을 극복하고 드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입니다. 14장은 위기 가운데서 홍해를 건너게 하신 기적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장은 그 유명한 ‘미리암의 승리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 노래는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유명한 송가(頌歌)입니다. 이어 광야로 행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마라에 이르렀고 사흘 동안 물이 없어서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백성이 물이 없어 목이 말라 죽게 되었음을 모세에게 말하며 원망합니다.
홍해의 기적과 승리의 노래의 여운이 채 가시지도 않은 사흘의 고통에 이들은 원망하는 백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드러납니다. 출애굽기 15장 25-26절의 말씀입니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은 엘림에 이르게 되는데 거기는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 곳이었습니다(출15:27). 여러분은 아마 ‘엘림’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곳은 풍성한 물과 은혜가 있는 곳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그 좋은 엘림에 대한 기록은 딱 한 절에 그친다는 것입니다.
마라의 사건은 아주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와 교훈은, 그리고 기적은 늘 고난의 시간 가운데서 만들어짐을 다시 한 번 엿보게 되는 부분입니다.
이제 출애굽기 16장으로 넘어가면, 이스라엘이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내산 사이 신 광야에 이르게 됩니다(출16:1).
그런데 바로 거기에서 원망이 시작됩니다.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체험하고, 마라의 기적을 체험하고, 엘림의 은혜를 체험한 이들이 어떻게 곧바로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었을까요?
본문 12절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러나 이러한 원망하는 백성,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백성을 위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이 바로 “광야의 식탁”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광야의 식탁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못된 자식을 둔 어진 부모와 같이 이스라엘의 불평을 들으시고 슬퍼하셨으나 계속해서 그들을 돌아보시고 사랑으로 신속히 그리고 넉넉하게 은혜의 식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받은 은혜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바람직한 은혜는 아닙니다.
광야의 식탁은 우리가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만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인데 아람어로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백성이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은 것에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입니다.
1) 경멸의 어조로 “이것은 시시한 것이구나!”
2) 놀라서 하는 말로 “이것은 참 신기한 것이구나!”
3) 단순히 몰라서 묻는 말
출애굽기 16장 31절에서는 만나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이스라엘 백성이 보지 못했던 것, 어쩌면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베풀어진 것이 광야의 식탁입니다.
또한, 정황을 보건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식탁은 결코 우리의 공로와 자격으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결코 맛볼 수 없는 식탁이 바로 “광야의 식탁”입니다.
이 광야의 식탁은 오래전 출애굽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식탁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신 시점은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주제를 파악하지 못할대 때, 은혜를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참 여러 가지 면에서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 그렇습니다.
이쯤에서는 호되게 징계를 받아야 하지만 아직은 기회를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관용을 보게 됩니다.
이 광야의 식탁을 통하여 하나님은 다시 한 번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2002년 월드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습니다. 월드컵을 유치하므로 우리나라 스포츠는 당당히 선진국 대열에 들어설 수 있었지요.
월드컵이 끝나고 난 다음에 외신은 “이번 월드컵의 진정한 승자는 한국이다.”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가능하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답니다.
많은 사람이 대한 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숨은 공로자가 있답니다.
그 사람이 바로 ‘호랑나비’라는 노래를 부른 가수 김흥국 씨입니다.
김흥국 씨는 민간대사로 비행기를 타고 유럽엘 건너가서 유치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FIFA의 미셀 장 루피넨 사무총장, 요한손 유럽회장, 그리고 제프 블라터 회장 등 거물급들을 모시고 미니 콘서트를 열었답니다.
그때 그가 부른 노래가 18번인 ‘호랑나비’‘였습니다.
“아싸! 호랑나비. . .”
춤을 추며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데 듣던 사람들이 견디다 못해 이렇게 말했답니다.
“야 유치해, 정말 유치해.”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2002년 우리나라에 주어진 월드컵이라는 기회는 굉장히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일본에 다 가기로 되어 있는 월드컵을 우리나라가 공동 주최한 것은 사실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월드컵의 가장 큰 수혜자요, 성과를 거둔 것은 우리 민족이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얼마나 유치하고 어린 백성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백성에게 그런 은혜를 주시다니.
자격이 없는 그들에게 주어진 그 은혜가 어떤 큰 의미가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은혜를 오늘 우리에게도 베풀어주기를 원하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만나는 광야에서 먹는 은혜의 식량입니다.
광야는 떡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먹을 수 있는 만나를 주십니다. 이 만나는 우리의 힘으로는 만들 수도 준비할 수도 없는 양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만나를 광야에 있는 모든 백성에게 동일하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불평하고 원망하는 자이든, 잘 섬기는 자이든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만나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진리를 말씀하는데,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 45절에서,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은 선인과 악인에게 동일하게 비를 주시고 해를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본문 13절에서처럼,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매일같이 동일하게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더구나 16절에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기를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매일 모두에게 동일하게 은혜가 내리고 있으나 그 은혜는 취하는 자들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많은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이 광야인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마라의 쓴 물을 만날 것이고, 광야에서 먹을 음식이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당의 소산을 먹는 그 다음 날 만나는 그쳤습니다.
우리가 광야와 같은 세상을 지나는 동안 은혜의 만나는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취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관대한 사랑과 인간의 의무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입니다.
조엘 오스틴이 쓴 [긍정의 힘]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년 전에 아프리카 오지의 작은 마을에서 끔찍한 병이 돌았다. 어린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신음하고 구토하기 시작했다.
몇 주가 지나자 병은 널리 퍼져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병의 소문이 전해지자 그 지역의 큰 도시에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전문가들을 파견했고, 곧 물이 오염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마을은 산 위의 수원(水源)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식수로 삼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상류를 거슬러 올라가 오염의 원인을 찾기로 했다. 물줄기의 입구에 도달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래서 잠수부들을 보내 수원 근처의 수중을 탐색하기로 했다.
잠수부들의 보고에 전문가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커다란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수원 입구에 끼어 썩고 있었다.
그 바람에 원래는 수정처럼 맑고 깨끗했던 샘물이 돼지들의 썩은 시체를 통과하면서 오염되고 있었다. 잠수부들이 죽은 돼지들을 치우자마자 물은 다시 전처럼 말고 깨끗해 졌다.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의 식탁을 어떻게 맛볼 수 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것을 제거하면 됩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에서는,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가로막는 쓴 뿌리가 무엇인가요?
은혜의 통로를 가로막고 있는 썩어 냄새나는 그것이 무엇인가요?
오늘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 그 근원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단절이 은혜의 만나를 가로막습니다.
계속되는 만나는 계속되는 관계를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단절된 관계의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만나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해 맛보는 것입니다.
본문 16절 이하에는 만나를 거두는 방법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꼭 필요한 분량만큼, 그날에 거두게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여기에 아주 중요한 신앙적인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매일 이스라엘 백성과 필요한 관계, 친밀한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을 느끼고 고백하며 사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매일매일 기억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우리가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신앙적 훈련이기도 합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은 아주 철저하고도 명확하게 우리를 훈련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진을 치고 잠을 잘 때에 가진 것도, 먹을 것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로 하여금 편안하게 잠드는 법을 가르쳐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내일이 되면 분명히 하나님께서 먹이실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도록 반복하여 가르치신 것입니다.
인간들의 염려처럼 되지 아니하고 내일 또 신실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관계를 맺도록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시기를 원하시는 성품 중의 하나가 바로 “신실함”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우리가 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와 사랑을 잊어버리고 살아가면서, 그 하나님도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과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비유하여 말씀하실 때가 많이 있었습니다.
사실 부부 사이의 문제는 상대방의 변화보다는 내가 변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식당에서 음식을 시킬 때, 알아서 주문하는 것이 박력이 있어 보였는데 결혼하고 나니까 무척 이기적으로 보입니다.
연애할 때는 부드럽고 온화한 것이 무척 좋아 보였는데, 결혼하고 나니 무척 우유부단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연애할 때는 무척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는데, 결혼하고 나서 매일 회사에서 늦게 들어오는 남편에 대한 불만이 쌓여갑니다.
“신실함”에 대한 문제는 사실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하나님께 있습니까? 아니면 변해버린 나의 신앙에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신실하심을 유지하고 싶어 하시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깨어지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훈련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신실함에 대한 훈련은, 우리 자신이 늘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존재임을 깨달아 알아야 하고, 우리의 인생이 열심히는 살아야 하지만 우리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지만, 그 은혜는 또 하나님께서 주실 때 은혜이지, 자신들이 쌓은 노력은 무가치할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염려로 쌓은 것이 결코 보존되지 아니한다는 것, 썩어 냄새가 나고 벌레가 나서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탐욕은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요, 탐욕과 불신으로 거둔 저축은 결코 자신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본문 20절 말씀을 보세요.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만나를 거두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토미 테니는 그의 책 [하나님의 관점]에서 “영점(零點)의 가치”에 대하여 말합니다.
“사람 가운데 가장 작은 자가 하나님의 팀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얻으며, 가난하고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자리를 주신다. 이것이 영점의 가치다.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관점을 배우는 비결이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사람이 될 때, 영점의 가치가 시작됩니다.
영점의 가치는 하나님께서 가장 선호하시는 방법입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런 심정을 가지고 있습니까?
“하나님, 점점 어려움에 빠져가고 있어요.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어요. 상상이 점점 악화되고 있어요.”
저는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딱 좋은 지점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가장 좋은 시점이 되었습니다.”
광야에 있었기 때문에 만나를 경험할 수 있었고, 오늘이 지나면 하나도 남은 것이 없는 만나이기에, 내일 또 만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누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여러분이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우리 주님은 더욱 위대해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광야, 영점 인생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신실하심을 증명하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무력함이란 결코 물질을 잃거나, 건강을 잃는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자신이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아져 있느냐를 물으십니다.
요한복음 11장에는 우리가 잘 아는 너무나 유명한 사건이 나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오라비인 나사로가 죽어서 사흘이나 지났지만, 예수님이 살려주신 사건 말입니다.
아직 죽기 전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빨리 그곳에 가셔서 고쳐 주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상황이 철저하게 광야가 되고 영점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인간의 소망이 끊어진 무덤 속에서 하나님의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많은 사람이 기적을 경험했지만, 마리아와 마르다처럼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경험했던 위기와 절망만큼이나 주님을 강하게 신뢰하는 방법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모두가 떠날 때, 마리아와 마르다로 하여금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하였고, 부활의 증인이 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걸음마를 배울 때를 기억하십니까?
막 위태위태하게 걷는 아이를 부모는 늘 붙잡아 주지 않습니다.
분명히 넘어질 것을 압니다. 그러나 또한 다시 일어날 것을 압니다.
“넘어지는 것은 걷는 것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넘어졌다가 일어서면 더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너무 늦게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도착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 사건을 통해 무척 친밀하고 신실한 관계를 맺어 가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극적인 간증들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광야의 지점을 통과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때로 우리는 새 힘을 얻고 싶어 하지만 기다리는 것은 싫어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사 40:31)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광야에서의 만나는, 오늘도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주 친밀하게 만들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나는 택하신 백성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광야에 서 있습니까? 하나님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사방에서 어떤 도움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까? 이제 택하신 백성의 특권을 누릴 자격이 충분합니다.
여러분의 삶의 양식이 떨어졌습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당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수 있는 가장 좋은 때임을 믿으십시오.
혹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만나를 게으름이나 불신앙으로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그 만나를 취하도록 움직이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통하여 오늘 당신에게 만나를 주십니까? 아니면 미래에 대한 비전을 향하여 여러분의 삶이 전적으로 헌신되기를 원하십니까?
혹시 여러분에게 주어진 만나가 너무나 많아서 자만하므로 또 허락하신 만나를 받지 못하지는 않습니까? 교만 때문에 은혜를 떠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오늘도 여러분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또 풍성하게 베풀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맛보는 만나는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임을 믿으십시오. 만나 교회에 속한 모든 사람에게 이 놀라운 특권이 경험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