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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왈드 샌더스 목사님이 쓰신 “제자, 거룩한 열정으로 부르심”이라는 책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원래 “그리스도인”과 “제자”는 바꿔 쓸 수 있는 말이었으나 오늘날은 그렇게 쓸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엄격한 제자의 조건에는 따르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시종 변함없이 따르기를 원하셨다. 양보다는 질을 더 바라셨기 때문에 더 많은 회원들을 끌어들이려고 자격요건을 낮추지 않으셨다. 콜럼바는 A.D. 563년 스코틀랜드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 고향 아일랜드를 떠난 복음주의자였다. 그는 큰 어려움에 부닥치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느낄 것을 알았다. 그래서 타고 온 배를 바닷가 둑에 묻었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겠다는 무언의 간증이었다. 그는 어떠한 단서도 달지 않은 제자가 되기로 헌신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과 동시에 “제자”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교회에 다니는 사람’과 ‘신앙인’은 다르고 ‘신앙인’과 ‘헌신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과 ‘목회자’는 다르고 ‘그리스도인’과 ‘선교사’는 다르고 ‘일반 신앙인’과 ‘헌신된 사역자’는 다르다는 생각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구분하고 있지 않습니다. 믿음과 동시에 우리는 사역자요, 헌신자요,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배경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을 믿어 천국가는 하나님 백성이 된 우리들, 우리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이 된 우리들이라면 이 말씀을 통해 정말 내가 천국백성의 영원한 생명,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인지 우리를 돌아보며 참 생명을 가진 자로 확신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 백성되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첫째, 검을 가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4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 화평, 즉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검”은 “무기”를 뜻할 것입니다. “칼” “창” “총” “미사일” 등등 전쟁에 쓰이는 무기를 나타내는 모든 것이 이 “검”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들으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칼이 아니라 평화를 주시러 오셔야 했고, 불화중인 가족들 간의 멀어진 사이를 화해와 사랑으로 가까워지도록 하시기 위해 왔다”라고 하셔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사실 이런 표현은 무슨 반어법처럼 들릴 수도 있고 충격요법을 지닌 가르침일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본뜻은 무조건 전쟁하거나 싸우라는 의미는 아닐 것입니다.
이 구절과 병행구절인 누가복음 12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2장 51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알듯이 예수님은 화평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되고 연합되고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며 서로 원수되었던 담과 벽이 사라지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인해 인종과 지역, 빈부와 성별 전혀 상관없이 이제는 온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3,14절입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여기서 말씀하시는 ‘화평’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 ‘그리스도안에서 화평’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차별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든 벽이 있었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여러 가지 장애가 있었지만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이런 벽이 다 사라지며 믿는 자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화평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서로 하나되고 연합하며 참 화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화평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왜 오늘 말씀에는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실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 즉 화평은 모든 사람들이 사이좋게 지내고 어떤 갈등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성경에서는 절대 그런 평화는 이 땅에서는 있을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어떤 말다툼도 일으키지 않고 세상 어떤 정치세력과도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평안한 상태는 이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신앙인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세상속에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세상이 말하는 화평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또한 세상에서는 검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오히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세상과는 구별되어 세상 사람으로부터 각종 박해와 고난을 경험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 또한 세상의 영적 악행, 육적 악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적으로 외적으로 항상 싸울 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신앙생활’ 혹은 ‘종교생활’을 하면서 “좋은게 좋은거다”라고 생각하며 두리뭉실하게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습니까? 어떤 경우에도 정말 나쁜 일이고 혹은 그 악한 일로 인해 큰 사고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인데 싫은 소리 하기 싫어 눈감고 넘어간 적은 없습니까? ‘잘못에 대해 눈감아주고 비판해야 할 일을 그냥 모른 척 넘긴 적은 없는가?’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좋은 사람 이미지, 무난한 사람이미지를 심어주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 생각은 확연히 달랐습니다. 세상의 방향성이나 세상이 지키려는 질서 체계에 대해서는 분명히 반기를 들어야 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구별은 나와는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가치충돌입니다. 그러기에 결국 가치관 차이에 의한 다툼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신앙가치관과 세상가치관은 극과 극으로 너무 달라 신앙으로 세상을 볼 때 가치관의 충돌은 불가피합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천국백성의 가치관을 가진 거룩한 성도는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과는 싸울 수밖에 없고 세상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열왕기상 8장 53절입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우리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주의 종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심 같이 주께서 세상 만민 가운데에서 그들을 구별하여 주의 기업으로 삼으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세상가운데 구별해 내셨고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가치관으로 살아가면서 그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신앙가치관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어쩔 수 없이 삶 속에 영적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참 신앙관으로 살아가려면 가치관이 다른 우리 주변의 이웃과 우리들의 친구들, 심지어 우리 가족들과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분쟁이나 다툼, 갈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내가 세상 사람과 똑같이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진다면 우리 자신이 부끄러워져야 합니다. 반대로 주님을 제대로 믿고 살아가기에 세상 사람들이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것이 자랑스러워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 반드시 잘라내야 할 것은 잘라내며 세상속에서 거룩한 싸움을 싸우는 참 생명을 가진 천국 백성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 백성되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둘째, 십자가를 가진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39절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예수님께 합당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사람, 십자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는 예수님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뒷부분을 보면 자기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결국 멸망이고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십자가를 진다’라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포기하고 고난의 그 길을 걸어간다는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을 보면 십자가의 고난이 가족간의 관계속에서 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 35~37절입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려다보니 가족들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속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로 살아가며 서로 위로가 되고 서로 협력이 되어야 하는 관계가 가족관계인데 신앙문제에 들어가면 가족이 오히려 큰 방해물, 큰 어려움을 주는 존재가 될 때를 많이 보게 됩니다. 우리가 세상속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일어날 때 가족이 아니면 ‘그냥 계속 볼 사람도 아닌데 이제 안보고 말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가족은 어떻습니까? 가족이기에 안 볼 수도 없고 가족이기 때문에 가치관 차이, 가치관 충돌은 서로에게 정말 큰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직 우리 교회는 식구가 적어서 장례를 직접 집례한 적이 없지만 제가 고주리 시골개척교회를 시작하기 전 부산 초량교회에서 교구담당 부목사로 있었던 30대 중반의 나이에 약 5년간 정말 많은 장례식을 주관하고 집례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을 집례하면서 가족들이 모두 모여 첫 장례 예배인 임종예배를 드릴 때 정말 힘든 일이 많았습니다. 왜냐면 임종예배를 드리면서 모든 장례절차를 의논하는데 온 가족이 전부 교회에 나오시는 교인분들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래서 고인이나 상중, 그리고 여러 다른 가족들의 신앙적 견해 차이로 장례절차를 합의하기가 정말 어려웠습니다. 장례절차를 다 결정해 놓고도 일가친척중 영향력이 큰 어느 문중어른이 갑자기 나타나 장례절차 결정을 뒤집어 놓는 경우는 정말 난감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을 많이 경험하면서 정말 신앙적 견해 차이로 인해 가족 경조사마저 갈등과 다툼과 상처가 되는 것을 볼 때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이런 일에 대해 우리가 황당할 필요 없는 것이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족들에게 핍박받고 고난을 받으신 기록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입니다.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예수님의 가족, 친척들이 예수님을 미쳤다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반듯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는데 가족들이 나에 대해 미쳤다고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완전 타인이 아니라 가족이 그렇게 말할 때 정말 살고 싶지 않은 느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이 찢기고 애통한 지 상상치도 못할 아픔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가족들로부터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정말 우리가 참 신앙을 가진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 가족들의 오해와 미움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정말 좋은 중직자 집안에서도 간혹 아들이 “목사가 되겠다며 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진학하겠다”고 할 때 반대하는 부모, 형제를 자주 봅니다. 하물며 가족들 모두 신앙이 없는 집에서 나 홀로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게 될 때 얼마나 큰 반대를 만나게 될까요?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가족들이 신앙으로 인해 불화하고 원수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가족들이 신앙을 반대할 때 신앙을 위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해서 교인들끼리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사는 것이 신앙생활에 좋다라고 가르칩니다. 과연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그게 성경적일까요? 여러분, 성경은 이런 경우 어떻게 하라고 가르칠까요?
마가복음 13장 12, 13절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 데에 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 /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믿는 신앙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때에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하며 그 박해, 그 핍박을 끝까지 견뎌서 이겨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삶을 주님께 드리며 신앙적인 헌신을 하려고 하는데 가족이 반대하는 경우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아무리 신앙이 좋은 가족들이라도 가족중 어느 누가 목회자의 길, 선교사의 길, 사모의 길을 가겠다고 할 때 반대하는 일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가족을 위해서 비전과 사명을 포기하기보다 정말 주님 사랑으로 가족을 대하며 주님 은혜를 가족들에게 보여주며 우리의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가족들의 방해와 반대, 핍박을 경험할 때 그들과 육체적인 싸움, 언쟁을 통한 싸움을 하기보다 참된 사랑을 보여주며 그리스도의 희생을 생각하시며 참된 희생으로 다가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되는 본질을 지키며 믿음으로 이 전쟁을 싸워나갈 때 결국은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진짜 적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긴 이런 고난은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삶을 드릴 때 우리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10장 38,39절에서 말씀하시는 우리의 십자가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39절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정말 가족들에게 신앙을 보여주는 것,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핍박과 어떤 갈등이 우리에게 쏟아붓는다 할지라도 가족을 위해 죽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잘못,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것처럼 가족의 구원을 위해 우리를 죽이고 그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짊어진 십자가입니다. 나의 이익, 나의 욕구를 내려놓고 내가 대접받고 싶은 것, 인정받고 싶은 것을 내려놓고 가족 구원을 위해 갈등, 핍박, 괴롭힘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족이 나를 잘 대접해 주지 않고 가족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고 가족이 내게 행복을 주지 못한다고 해도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고난을 이겨내며 주님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천국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기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 백성되어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 셋째, 복음사역자를 대접하는 사람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태복음 10장 40절에서 42절에는 마태복음 10장의 제자 파송의 권면 중 마지막 권면입니다. 마태복음 10장 5절부터 시작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파송설교의 결론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제자들이 받는 상을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대접한 사람들이 받는 상을 말씀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을 믿고 천국가는 사람, 예수님의 참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은 복음 사역자를 잘 대접하고 복음 사역자를 영접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접하는’이라고 번역된 것의 원 헬라어는 다른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앞에 나오는 ‘너희를 영접하는’이라고 할 때 영접하는 헬라어 δεχόμενος(데코메노스)가 쓰여지고 있고 ‘나를 영접하는’이라고 할 때와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이라고 할 때는 헬라어 δέχεται (데케타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제자들을 손님으로 친절하게 받아들이는 그 사람들은 예수그리스도를 마음에 영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 ‘영접하는’이라는 단어의 헬라어 δεχόμενος(데코메노스)의 원형 헬라어 δέχομαι(데코마이)는 ‘집안으로 받아들이다’는 뜻으로 원래는 ‘환영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뒤에 나오는 ‘영접하는’이라는 말의 헬라어 δέχεται(데케타이)는 마음으로 영접한다는 뜻으로 ‘믿는다’ 혹은 ‘인정한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제자들이 전도사역을 하러 마을에 들어갈 때 어떤 사람들은 홀대하기도 할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환영하며 극진히 대접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알지 못하겠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의 상벌을 하나님께서 행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마태복음 10장 4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태복음 10장 41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여기 41절에서도 ‘영접하는’이라는 뜻으로 δεχόμενος(데코메노스)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영접하는’이라는 단어의 대응구로 ‘상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 사람을 ‘데코메노스’ 영접했다면 영접했던 그 행위로 ‘μισθὸν(미스돈)’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영접했다면 그 또한 선지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제자를 영접하면 제자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선교사로 직접 나갈 수 없지만 ‘보내는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우리 개인이,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선교사 후원과 선교를 위한 기도를 합니다. 우리는 선교사는 아니지만 선교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는 아니지만 목회자의 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선지자를 영접하는 것, 의인을 영접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마태복음 10장 42절 마지막 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준다면 그 작은 헌신과 그 작은 후원, 그 작은 섬김을 우리 주님께서 절대 잊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에겐 작은 것이지만 성심껏 섬겼다면 천국에서 받을 상을 잃어버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보낸 자들이 어떤 대접을 받으며 어떤 취급을 받는 지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위해 어떤 삶을 드렸는 지 주님은 다 기억하시고 그에 합당한 상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제자처럼 적극적인 사역을 한 사람이나 제자를 도우며 여러 필요를 채운 사람이나 똑같이 상을 허락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실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마태복음 10장 40절 말씀을 근거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40절입니다.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전파를 명하시면서 주시는 귀한 복된 말씀은 그들이 절대 혼자 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러 갈 때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면서 가는 그 곳에서 성령님께서 예비한 사람들이 있어 그들을 돕고 협력하는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고주리교회는 지금까지 15년동안 정말 암담한 이 시골 고주리에서 살아가며 복음이 이 땅에 퍼지기를 소망하며 살아갈 때 그 때 그 때마다 협력하고 돕는 손길을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최근 코로나19로 인해 ‘이제 그간 쌓았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되고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더욱 힘든 기간을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작년 말부터 다시 우리를 찾아와 여러 협력을 하기 위한 손길을 보여주시더니 올해 여름에는 안산에 있는 엄청 큰 교회에서 우리 마을에 찾아와 마을회관에서 큰 여름 행사하려고 준비중에 있습니다. 구체적인 것은 좀 더 지나 봐야 하겠지만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상황은 좀 더 있어야 하겠지만 정말 큰 일이 올해 여름에 있을 것을 기대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준비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이뤄냈느냐? 절대 아닙니다. 결국 시작하고 결단하고 우리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행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느 사람들에게 고주리 사역에 대해 알리고 싶어도 그닥 관심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리고 그 사역에 협력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해도 그들이 받아줄 지 미지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어려운 일을 하나님께서 행하십니다. 하나님에겐 그 일이 절대 어려운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 예비하신대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은 천국백성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을 보니 제자들을 대접하고 사역자를 섬기는 것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천국 백성의 표식이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정말 잘 섬기고 대접하며 목회자, 선교사, 기타 여러 복음사역자들과 함께 하고 있으십니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직접 그 일을 하지 못할 때 그 일을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표식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가며 죽어서 저 천국에서도 이 땅에서의 그 수고가 주님이 주시는 상으로 보답되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마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를 파송하시면서 제자들이 가질 가치관, 제자들의 자격, 제자들이 누릴 복과 제자로써 당할 고난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주신 이 말씀이 열 두 제자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백성에게 주신 말씀인 것을 깨닫고 우리에게 적용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속에서는 더 적극적으로 복음사역을 함께 할 수 없는 일반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와 같은 복을 누리며 제자의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런 제자역할을 하는 성도들의 자격으로 가정사역과 인간관계사역, 그리고 사역자 대접을 통해 진정한 성도인지를 보여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족들로부터 복음으로 인해 핍박받고 신앙생활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세상의 상식이 아닌 주님이 기뻐하시는 생각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로써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핍박과 갈등도 주님을 생각하며 이겨내는 것이 바로 제자로써의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교회와 복음사역자를 섬기며 함께 동역하는 것이 바로 참 제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교회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속에서 참 거룩한 싸움, 아름다운 영적 전쟁을 하시고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 고통속에서도 승리의 역사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 십자가를 그 어디서나 그리스도인으로 제 역할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