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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난설
인류의 분기와 이동에는 자연환경조건의 변화가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마찬가지로 진화의 압력
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아프리카에서, 침팬지와 인류가 구분된 일차적 이유는 아프리카 중심을 관통하는 조산운동이었다고
많은 진화학자들이 이야기한다.
즉 조산운동으로 발생한 편서풍은 아프리카 서부지역에는 높은 강수량으로 밀림이 유지될 수 있었
지만, 동부지역은 밀림에서 초원인 사바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지역에 내동댕이쳐진 인류의 조상은 사자, 표범 등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두 발로 서서 뛰기
좋도록 직립을 하게 되었고, 벼룩, 이 등의 기생충 방지와 온도 조절을 위하여 털이 빠지게 되었
으며, 별다른 공격수단이 없기에 협동 수렵 생활을 위하여 언어 능력도 발전하게 되었다.
하지만, 지표면에서의 생활은 많은 기생충, 체체파리 등 무서운 전염병 감염에 상시적으로 노출될
수 밖에 없어 이러한 열대 질병의 압력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 인류의 북방으로의 이주가 시작되
었으리라 추정된다.
중동지방은 위도로 보아 아프리카보다 전염병이 드믈고, 당시로서는 매우 풍족한 지역이라고 생각
된다.
아마 에덴동산과 같이 낙원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현생 인류는 사실 10만년전에서 1만년전 사이인 마지막 빙하기에 태어났다.
현생인류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이나 호모엘렉투스 역시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이나 아시아 등지로
이주하여 동시기를 살았으나, 이들은 이 마지막 빙하기를 넘기지 못하고 멸종한 것으로 추정되며,
그 간의 인종학살설은 큰 신빙성이 없다.
약육강식, 자연도태라는 자본주의적인 진화개념의 영향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빙하기가 항상 추운 것은 아니었다.
때로는 따뜻한 시기도 있었는데, 아래 그림처럼 대략 5만년전은 빙하기 가운데서도 매우 따뜻한
시기였다.
필자가 보기에 최초의 인류의 이동과 분기가 동시에 이 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한 인류는 중동지방에 머무르다가 이집트, 지중해를 거쳐 그리스 로마지역으로 이주하고,
또 한 인류는 파미르 고원지방으로 또 한 인류는 과감하게도 바다를 건너 멀리 오세아니아에서
북아메리카의 동부해안으로 이주하는데 파미르의 고원지방으로의 이주와 바다로의 이주는 빙하의
후퇴에 따른 해수면의 상승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즉 해수면 상승에 대한 인류의 두가지 대응방식이라고 생각하며, 대홍수설에 대한 인류의 신화적
기억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인간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발을 들여 놓은 시기가 무려 5만 6000년전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필자
의 해수면 상승설을 뒷받침한다.
이 폴리네시아인들은 호주에 건조한 기후와 사막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인 2만년전까지 호주의 대형
동물을 멸종시켜버렸다.
2만년전은 마지막으로 다시 빙하기의 추위가 엄습한 시기와 맞물리며, 따라서, 파미르 고원에서
인류가 4방향으로 분기한 시기와도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어로, 수렵민인 폴리네시아인들은 건조기후에 따라 농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다로
나간 것이다.
따라서, 여진족이 형성된 시기는 배달국 건국시기보다 훨씬 앞설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한반도에도
거주했는지 그것은 모를 일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선사시대 유적으로 발견되는 조개무지와도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다.
고고학계에서 고아시아족 혹은 고몽골인으로 잘못 분류한 인류로 생각되며, 이들이 내륙지방으로
깊숙이 이주하지 못한 것은 어로생활이 수렵생활보다 상대적으로 더 나았기 때문이다.
한편, 비교적 풍요한 지역에서 채집생활을 하던 북방이주민(이집트,라틴족)의 이동거리가 극히
짧은 것은 해수면의 상승영향이 이지역으로 이주한 인류에게는 당시로서는 크게 미치지 않은 이유도
있었을 것이며,
다시 엄습한 빙하기시절에도 차가운 편동풍은 파미르 고원지방에 막혀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가
계속 유지되었을 가능성이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1-2만년전 빙하기의 급격한 후퇴는 중동지방의 건조화를 가져와 수렵, 채집생활에서 농경
생활로의 전환이 불가피했고 무려 BC 7000년전 부터 농경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지역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열사의 사막지역이 되어 버렸다.
반면 그리스 로마지역은 편동풍이 지중해를 거치면서, 다시 고온 다습한 기후를 남부 유럽에 전달
했기 때문에 풍요한 이 지역의 농경생활이 상대적으로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역, 그리고 인도,
중국 보다도 늦게 이루어진 것이다.
서부 유라시아로 이주한 현재 유럽인의 조상인 게르만,슬라브 족들은 사실 훈족의 압력이 아니었
으면 대 이주를 하지 않았다.
이들의 이동 경로를 보아 이들의 조상은 한때 인류최초로 여겨지는 페르시아 문명을 건설하기도
하였으며, 동시기의 앗시리아나 조금 후대의 스키타이처럼 북방으로 조금 더 이주하여 유목 혹은
동부 유럽지역에서 화전과 같은 농경 생활을 하기도 하였을 뿐 5세기 무렵이전까지는 이동거리가
극히 짧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시베리아대륙 동쪽보다 냉혹한 추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빙하기 시절에 유럽 지역은 사실 개썰매를 이용하여 시베리아 빙원을 종횡무진으로 내달리
던 M242 유전자 인류의 활동 공간이었을 뿐으로 추정한다.
이들 유로피안들이 만일 최초의 농경인류라면 필자가 제시한 수렵 이동 생활경험으로부터 나오는
종교 개념 발생 이론에 혼란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비교적 풍족한 지역의 채집-농경인류라면 신이라는 종교가 발생할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
이다.
따라서, 필자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에 대한 "수밀이국설"을 낭설
이라 내팽겨치지 말고,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메르문명이 발굴되었을 때 유럽인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이유는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구약성서의 이야기가 모두 수메르의 신화에서 유래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컬럼비아의 어원을 추적하다가 이것이 컬럼바라는 라틴어의 "비둘기"가 어원이었고, 영어로는
"Dove"라고 쓰이는 개념임을 알게 되었다.
Dove는 성령으로도 쓰이므로 사실 성모마리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비둘기 여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전쟁의 여신 아테네의 상징이었을 뿐이다.
다신격체로 표현된 아테네, 비너스, 데르메르 신화는 또한 이집트의 이시스 신화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집트의 이시스 신화도 그 기원은 바빌로니아의 여신 아스타로테였다.
이 아스타로테는 구약성서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당시 유태인들의 타락상을 보여준 섹스의 여신
아스다롯과 같다.
그러나 이것 조차 그 기원은 수메르의 이난나이며 당시 필자의 추적은 여기서 끝났다.
수메르인이 전형적 교착어를 사용하고, 머리가 검은 사람들이라고 하며 주변의 사람들과 인종이 달
랐음은 백과사전에도 나온다.
이 근방에서, 백소인과 인종이 다른 인류라면, M242 유전자 인류인 황궁족 밖에 누가 더 있을까?
또한 최초의 신화는 만들었을지언정 수메르인들은 최초의 농경인류가 아니다.
BC 3000년경 수메르인이 이주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은 농경생활을 하고 있었다.
동시기의 정착생활을 시작한 배달족은 혼혈 동이문화를 만들어갔지만, 수메르인은 성벽을 쌓고
다른 유러피안들과 구분되는 정착 농경생활을 하였다.
이들은 멸망후 신화만 전승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수메르인들의 주신은 7명으로 안(하늘신), 엔릴(바람,저승), 엔키(물), 이난나(사랑), 난나(달),
우트(태양), 닌후르쌍(모신,하늘신)이며 각각 북두칠성을 뜻하고, 수메르의 7도시의 배치도 북두
칠성의 모양이다.
큰곰자리의 등과 꼬리부분에 불과한 서양의 별자리 개념에 웬 북두칠성이란 말인가?
또한 이들은 농경과 유목을 병행하였다.
흉노는 동호에게 조공을 바치는 예속관계에 있었다.
사마천은 동호를 예맥조선이라고 기록했다.
후에 동호는 흉노의 공격을 받아 선비와 오환으로 나뉘고, 오환족은 북위이래로 우리민족(고구려)
에게 대부분 흡수되었다고 한다.
최근 선비족이 신라의 김씨의 시조라는 이야기도 월간조선에 나왔다.
독일방송은 최근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촉발한 훈족이 가야족이라는 가설을 내어 놓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국보로 지정된, 편두머리와 솥단지를 옆에 찬 기마인물상의 모습하고 훈족하고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
또한 훈족의 활은 고구려의 벽화에 등장하는 맥궁과 같다.
가야가 번조선에서 내려온 유민이라면 특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다.
도대체 이 복잡한 북방유목민 들과 단군조선의 관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한단고기를 믿는다면 이들은 고조선의 변방국들이었을 뿐이며 유목민 생활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넓은 거주공간이 필요했고, 철기문화의 도래 이후로 고조선(부여)의 지배력 약화에
따라 이들 제 민족들은 제각기 각자의 길을 갔을 뿐이다.
한단고기를 위서로 평가하는 근거 중의 하나는 도무지 이해가 안되는 지백특(티벳)에 대한 군사
파견 항목이 있었다.
그러나, 만일 흉노, 돌궐 등의 기원이 되는 위구르 지역이 고조선에 복속되어 있었다면 이해못할
일이 아니다.
동호는 그 중에서도 매우 가까운 위치에 존재하는 민족이었다.
오환(烏桓)의 환자는 환인(桓因)할 때의 환자와 같으며, 선비(鮮卑)의 한자는 조선의 선자와 노비
할 때의 비를 사용하고 있다.
선비의 한 일족인 탁발부족의 동굴안에서 발견된 명문은 천지와 조상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흉노(匈奴)에서 노자를 중국인들이 비하해서 붙인 것이라고 하는데, 필자는 좀 생각이 다르다.
한단고기에 따르면, 흉노는 일종의 귀양처였다.
3세 단군때 열양의 욕살 색정을 귀양보내고 나중에 용서하고 그 지역에 봉했는데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 흉노가 동족인 동호(조선의 제후국)를 침략해 2000여리의 땅을 뺏은 것은 매우 불쾌한 일일 수
밖에 없다.
우리말에 "개새끼"라는 욕은 매우 심한 욕이다.
그런데, 흉노, 돌궐 등의 신화에 어김없이 개가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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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담 (우리나라 전설)
한 재상이 얇은 껍질로 된 북을 만들어 이 북을 찢지 않고 소리를 내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 했으나, 아무도 북이 찢어질까봐 치지를 못하였다.
하루는 북소리가 들려 가보니 개가 꼬리로 북을 치고 있었다.
재상은 할 수 없이 그 개를 딸과 혼인시켰다.
개는 밤마다 딸을 핥고 물고 할켜서 괴로움을 참다 못한 딸은 개의 네 발목과 입에 각기 주머니를
씌웠다.
그래서 이 개는 ‘오낭(五囊)을 낀 개〔狗〕’가 되고 말았다.
그 개와 딸은 자식을 낳자 북쪽으로 쫓겨나 후손을 퍼뜨렸다.
그 뒤 오랑구가 오랑캐로 변하여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는 설화이다.
돌궐신화
돌궐국은 원래 서해 바닷가에 있었는데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다.
그 때 적군이 남녀노소를 모두 죽였는데 열 살 쯤 되는 어린애를 차마 죽이지 못하고 팔, 다리를
잘라 큰 호숫가에 버렸다.
그러자 한 암늑대가 소년에게 고기를 물어다 주어 소년은 그것을 먹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 후 암늑대는 소년과 교접을 하여 임신을 하고 서해의 동쪽에 있는 산으로 이동하였다.
그 산에는 동굴이 있어서 암늑대가 그 속에 들어갔더니 사방 200리 쯤 되는 넓고 풀이 무성한 벌판이
나타났다.
암늑대는 사내애 열 명을 낳았는데 장성해서 모두들 결혼하여 각자 한 성씨를 이루었다.
흉노신화
흉노의 왕에게 딸이 둘 있었는데 용모가 극히 아름다워 백성들이 모두 신처럼 떠받들었다.
임금은 말하길 “나의 딸들이 어찌 사람의 짝이 될 수 있겠는가?
앞으로 천신과 배필을 지으리라”고 하였다.
그는 광야에 높은 누대를 짓고 두 딸을 그 위에서 살게 한 다음 “천신께서 이들을 맞이해 가시옵
소서”라고 기원하였다.
3년이 지난 후 왕비가 딸들을 도로 데려오려고 하자 왕은 말하길 “안되오, 아직 천신과 통하지
않았소”라고 하였다.
다시 한 해가 지났을 때 늑대 한 마리가 밤낮으로 누대를 떠나지 않으며 울부짖었다.
그리고는 누대 아래에 굴을 파고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다.
작은 딸이 말하길 “아버님이 우리를 이곳에 둔 것은 천신과 배필을 지어주실 생각에서였는데 지금
늑대가 온 것을 보니 혹시 천신이 보낸 신령스러운 동물이 아닌지 모르겠다”라고 하며 누대에서
내려가려 하였다.
언니가 놀라 말하길 “이것은 짐승이야.
부모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돼”라고 하였으나 동생은 듣지 않고 내려가 늑대의 아내가 되었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는데 후에 점점 숫자가 늘어나 마침내 나라를 이루었다.
반호(盤瓠) 신화
(묘족, 요족, 흘료족 -- 중국 남쪽..아마 객가족처럼 남방으로 흘러내려와 살던 북방민족의 갈래 같다.)
고신씨(高辛氏)가 다스리던 시대에 왕비가 귓병이 났다.
의원이 치료를 했더니 귀에서 누에 같은 벌레가 나왔다.
그것을 바가지(반호) 속에 넣고 쟁반으로 덮어 놓았는데 갑자기 오색 무늬의 개로 변하였다.
그래서 이름을 반호라고 짓고 길렀다.
그때 오랑캐가 강성하여 자주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장수를 보내 토벌하였으나 이기지를 못하였다.
이에 왕은 천하에 영을 내려 오랑캐 장군의 목을 가져오는 자에게는 황금 천근을 주고 제후에 봉할
뿐만 아니라 공주를 준다고 하였다.
얼마 후 반호가 사람의 목을 한 개 물고 대궐에 왔다. 왕이 자세히 살펴보니 오랑캐 장군의 목이었다.
신하들은 모두 말하길 “반호는 짐승인지라 벼슬을 줄 수도, 공주를 줄 수도 없으니 공이 있다 한들
베풀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주가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아뢰기를 “임금님께서는 이미 저를 상으로 주기로 천하에 약속하셨
습니다.
반호가 적장의 목을 물고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지 어찌 개의 힘이겠습니까?
임금님은 말과 신의를 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미천한 여자의 몸 때문에 천하와의 약속을 저버리셔서는 안됩니다.
만약 그러하시면 나라에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두려워서 공주를 반호에게 보냈다.
반호는 그녀를 데리고 인적이 없고 숲이 무성한 남산(南山)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녀는 반호와 혼례를 올린 후 반호를 따라 깊은 산골짜기로 가서 동굴에서 살았다.
왕은 공주가 그리워 사신을 시켜 살펴보게 하였으나 문득 비바람이 몰아치고 산이 진동하여 아무도
가볼 수가 없었다.
삼 년이 지나자, 공주는 6남6녀를 낳았는데 반호가 죽은 후 서로 짝을 지어 종족을 이루었다.
그런데, 이 반호신화는 그 발음이 반고와 같다.
중국에서 반고는 인류의 조상으로 나온다.
삼오력기
반고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거인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혼돈 상태에서 잉태되어 무려 1만 8천년이란 계속 잠만 잤으며, 어느 날부터인가
부시시 깨어났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라서 화가났다.
어디선가 도끼를 가지고 와서 혼돈(混沌)을 향하여 휘둘렀다.
그러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계란이 갈라지기 시작하였다.
갈라진 많은 조각들 가운데 가볍고 맑은 것(陽氣)은 천천히 위로 올라가 하늘이 되었다.
그리고 탁하고 무거운 것(陰氣)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땅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끌하나를 찾아 가지고 왼손에 끌을 들고 오른 손에는 도끼를 들고 하늘과 땅이 붙어
있는 곳을 찾아 다니며 도끼고 쪼개고 끌로 뚫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하늘과 땅을 완전히 나누어 놓았다.
하늘과 땅이 나뉘어진 이후, 반고는 다시 하늘과 땅이 합쳐질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머리로는 하늘을
받쳐 이고 발로는 땅을 밟은채 하늘과 땅의 한가운데에서 있었다.
하늘과 땅이 변함에 따라 그의 몸도 변하여갔다.
이렇게 1만 8천년이란 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지극히 높아졌고 땅도 지극히 두꺼워졌다.
반고의 키는 얼마나 커졌을까? 사람들이 추산한 바에 의하면 키가 무려 9만리(1丈=3,3m 1里= 0.5km)
나 되었다고 한다.
원시의 혼돈에서 천지를 떠밀어 멀리 갈라놓고서 세계를 창조한 것을 반고의 늠름한 육체의 결과로
치는 이 설화는 근로를 숭상하고, 인력에 신뢰를 거는 고대 중국인들의 건강한 사상의 소산으로서
매우 흥미있는 얘기다.
반고가 임종에 임했을 때, 숨은 풍운(風雲)이 되고, 목소리는 뇌정(雷霆) 으로 화하고, 두 눈은
태양(좌측눈)과 달(우측눈)로, 그리고 수족과 몸뚱이는 대지의 산악으로 사극(四極)고 이름난 오악
(五岳,태산,형산,화산,항산,숭산), 혈맥은 강하 (江河)가 되고, 근맥(筋脈)은 도로로, 살갗은
전토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성진 (星辰)으로, 피모(皮毛)는 초목(草木)으로, 치골정수 (齒骨精髓)는
금석주옥 (金石珠玉)으로, 그리고 흘러내리는 땀은 비와 이슬이 되었다.
인류의 조상인 반고는 새로히 탄생한 이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 우해 자신의 온뭄을 바쳤
던 것이다.
이것만 보면 반호와 반고가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포랑족 신화(중국내 소수민족)
이 세상이 태초에는 하늘도 땅도 없고 더구나 초목이나 인류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둡고 끝모를 구름과 안개가 길에 뻗어 있을 뿐이었다.
거대한 그메이야라는 신은 12명의 자식 신들과 함께 천지를 열고 인류 이하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
려고 생각하여 재료를 찾아서 여기저기 다녔다.
마침 그 때 리라는 한 마리의 거대한 동물이 구름과 안개를 데리고 끝이 없는 우주를 헤매고 다니다
만났다.
그메이야는 그 거대한 짐승을 발견하자 그의 껍질을 벗겨서 천공(天空)을 만들고 아름다운 구름을
의상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그 동물의 양쪽 눈알을 빼내어 하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별을 만들었다 또 살로 대지를
만들고 뼈는 암석을, 피는 물로 바꾸고 털로 여러 가지 풀과 꽃, 나무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짐승의 뇌수로 인류를 만들고 또한 골수로 여러 새와 짐승, 곤충과 물고기 등을
만들었다.
이 리라는 동물과 반고는 상당히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아마도 이들 신화는 반고의 후손이 북방 유목민들이 흉노, 돌궐, 유연, 위구르 등 제 민족으로
뿔뿔이 흩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또한 하늘을 조선으로 땅을 중국으로 그 둘사이에서 오랑캐짓을 한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닌지…
환단고기
때에 반고라는 자가 있어 괴상한 술법일 즐기며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였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꾸리고 십간 십이지의 신장들을 이끌고 공공 유소 유수와 함께 삼위산의 라림
동굴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일러 제견(諸-)이라하고 그를 반고가한이라 했다.
반고는 환웅과 같은 시기에 감숙성 서부지역으로 이주한 군주이며, 이 지역의 신석기 문명인 제가
문화와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내륙지방은 사막화가 진행된 지역으로 농경정착생활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제견의 견자는 확장한자인데, 밭전(田)자 변에 개견(犬)을 쓰는 것이 흥미롭다.
개는 빙하기 북방계 M242 유전자인류의 생활과 매우 밀접하며, 매우 친근한 동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정서상 매우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은 흉노의 침입과 같은
역사적인 내막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또한 신화에 보이는 천신과 같은 존재는 환인, 환웅 또는 단군일 수 밖에 없지 않을까하며 흉노-
동호의 조공관계처럼 매우 소홀한 대접을 받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십간은 각 종족을, 십이지는 유목민족에게 중요한 가축을 뜻한다.
포랑족 신화의 12명의 자식신 이야기도 무엇인가의 관련성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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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사신도는 원래 청구배달국 때의 4방 오랑캐를 의미하는 그림 문자이다. 즉
서백호는 중국의 제곡고신족(단군신화의 호랑이),
북현무는 여진족(뭍으로 올라온 폴리네시아인을 생각하면 당연하다.),
동청룡은 용왕전설로 미루어 일본을 뜻하고,
남주작은 초나라에서 유래한 봉황토템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중국의 한나라때 부터 사신개념으로 발전하고 우습게도 중앙에 황룡을 넣어 중국인들은
스스로 짐승인 용토템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를 청룡으로 격하시키고 사방 오랑캐의 개념을 대입한 것이다.
중앙은 당연히 사람이어야 한다.
고구려에서도 이 사신개념이 수호신으로 왜곡되었지만, 중앙에 존재하는 것은 무덤의 주인인 사람이
었다.
과하마(유목),반어피(어로),오곡생산(밭+논)은 읍루,동예,옥저가 동이족과 말갈족의 혼혈국임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부여와 고구려에 신속했음은 부여, 고구려가 각기 단군조선(진조선)을 이은
천자국이었기 때문이지 고구려가 약탈해서가 아니다.
철기시대로 과중한 세부담은 있었을 것이다.
민며느리제와 데릿사위제는 풍습이 아니라 "혼혈화"의 과정이다.
삼한지역은 번조선(발해만지역)의 멸망(한사군-역시 원래는 번조선의 제후국) 혹은 동호족의 이주와
진조선인 동부여계의 남하(고구려에 대한 거부)로 마한의 땅을 나누어 살은 것이다.
즉 고조선의 삼한관경체제를 흉내내었을 뿐이며, 목지국, 월지국이 대표가 된 것도 고조선체제를 본
뜬 것일 뿐이다.
이 의미는 삼한이 고구려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뜻도 있다.
고구려는 고주몽이 해모수의 적자라고 부여에 왕권(즉 천자권)을 내놓으라는 일종의 쿠데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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