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철학이야기 염불의 창시자-혜원
수많은 불교 신자들은 손에 염주를 세며, ‘나무아미타불’을 왼다. 이 말은 ‘아미타불에 돌아가 구원을 바랍니다.’라는 뜻인데, 이 염불의 방법을 처음 만든 사람이 혜원(慧遠, 333년~416년, 중국 동진 때의 승려)이다.
혜원은 열세 살 나던 해, 전란(戰亂, 전쟁통의 난리)에 시달리다 못해 동생과 함께 외삼촌을 따라 낙양으로 갔다. 어렸을 적부터 유교의 육경(六經)에 통달하고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해 있었던 혜원은 도안(道安, 반야학의 대표적인 승려)의 명성을 듣고 다시 태행산으로 달려갔다. 이 만남을 통하여 혜원은 도안에게 완전히 감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반란이 지속되는 동안 혜원 형제는 도안을 따라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형제는 오직 한 개의 짚 멍석과 얇은 이불로써 잠자리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들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이 장면을 보고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혜원은 이렇게 말했다.
“석가 세존께서는 동굴 속에서 정좌(靜坐)하여 매일 보리 한 톨, 마(麻, 삼) 한 뿌리만을 드시면서 6년을 견디셨소. 오늘날 우리의 생활이 고생스러운 것은 모두 전란 때문이거늘, 그러므로 불법(佛法)으로써 그 전란의 원인을 없애야만 하오.”
이처럼 뼈를 깎는 노력 덕분에 혜원은 마침내 불학에 있어서 놀라운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진(前秦, 5호 16국 시대 때 티베트들에 의해 건국된 나라)의 3대 왕 부견이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도안을 인질로 잡아가고 말았다.
이에 혜원은 풍경이 아름다운 여산(廬山, 중국 장시성에 있는 높이 약 1,600m의 풍광이 좋은 산. 유·불·선 3교 및 중국의 유명 시인들과 관계가 깊음)을 택하여 그 유명한 동림사를 건축하였다. 그리고는 절 안에 방을 마련하여 염불(念佛)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또한 이름난 학자 123인을 소집하여 백련사를 조직하고 염불에만 종사하게 하니, 이로써 불교 역사상 최초로 염불 운동이 창시된 것이다.
혜원은 속세(俗世)를 끊기 위해 37년 동안 한 걸음도 여산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손님을 배웅할 때에도 계곡의 언덕배기까지가 고작이었다. 혜원을 만나고 돌아온 도연명(陶淵明, 중국의 대표적 시인)이 ‘다섯 말의 녹봉 때문에 윗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자신의 처지를 통감하고 즉시 현장의 감투를 벗어던진 다음 역사에 길이 남을『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썼던 사실은 너무나 유명한 일화이다.
83세가 되던 8월초, 혜원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제자들과 수많은 인사들이 그의 옆에 둘러 앉았다. 의사가 고주(鼓酒, 술주자)로 만든 탕약을 그에게 마시도록 했는데, 냄새를 맡아본 그는 입을 떼고 말았다. “주기(酒氣)가 있는 걸 보니, 술이로군. 술은 오계(五戒, 불교 신자들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금지사항) 가운데 하나인데, 내가 어찌 계율을 거스를 수 있겠나?”
이에 그의 제자들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권했다. “선생님, 이것은 술이 아니라 약입니다. 한 사발만 드시지요.” “좋아. 정히 그러면 자네들이 계율을 찾아보고, 마실 수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게나.”
그러나 제자들이 계율을 채 절반도 찾아보기 전에 혜원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혜원은 당시 불교와 중국적 전통이 서로 부딪치는 여러 가지 주제들과도 대결해 나갔다. 가령, 승려가 왕에게 예절을 갖춰 경배해야 하느냐의 여부라든지, 영혼이 불멸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라든지 하는 것들이 바로 그것이다.
말하자면, 혜원은 중국 불교 역사상 대전환기에 활약했던 인물인 셈이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