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사상을 재해석하다 : 순자-한비자 (荀子-韓非子)
영원한 인간사랑 ・ 2024. 2. 10.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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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사상을 재해석하다 : 순자-한비자 (荀子-韓非子)
중국 제왕학 한비자. 동양의 마키아벨리
원래는 한나라의 공자로 순자(荀子)에게 배운 중국 고대의 이름난 사상가이자 법가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法.術.勢를 함께 구사하라."
"개인적원한을 공적인 일에 개입하지마라"
한비자 (韓非子) 전국말기 BC 약 280∼BC 약233
人之性惡 其善者僞也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인지성악 기선자위야 금인 지성 생이유호이언
順是 故爭奪生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중략)…순시 고쟁탈생 이사양망언 생이유 질오온
故必將有師法之化 禮義之道
고필장유사법지화 예의지도
然後出於辭讓 合於文理而歸於治
연후출어사양 합어문리이귀어치
사람의 본성은 악하다.
선하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바로잡은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그 이익을 따르기 때문에 다투고 빼앗는 마음이 생겨나고 사양하는 마음은 사라진다. (중략)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거나
예(禮 : 예의)와 의(義 : 의로움)의 도리를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사양하는 마음이 나오고,
문리(文理)와 합치되어 다스려지는 것이다.
『순자(荀子)』 「성악(性惡)」편
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석학(碩學)
순자(荀子)는 전국시대의 유가(儒家) 중 맹자(孟子)와 더불어 가장 높은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그러나 주희(朱熹)를 중심으로 한 남송(南宋) 시대의 성리학자(性理學子)들이 맹자(孟子)를 공자에 버금가는 아성(亞聖)으로 숭상한 반면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순자(荀子)를 비난하고 이단시하면서부터, 순자는 유학사(儒學史)의 주류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순자(荀子)가 전국시대 말기에 유가(儒家)는 물론 그 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 털어 최고의 석학(碩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고 있다.
순자는 기원전 335년경에 태어나 기원전 238년경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순자가 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던 시기는 진시황의 천하 통일을 눈앞에 둔 전국시대 말기였음을 알 수 있다.
순자는 본래 조(趙)나라에서 태어났으나, 15세 때부터 천하의 인재와 선비들의 집합소였던 직하학궁(稷下學宮)이 있는 제(齊)나라에 유학(遊學)해 공부했다.
당시 직하학궁(稷下學宮)이 있던 제(齊)나라의 직하(稷下) 지역은 학사촌(學士村)이라고 불릴 정도로 학문이 융성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또 인정받는다는 것은 학자(學者)로서 이름을 드날릴 수 있는 보증수표였다.
순자(荀子)가 직하(稷下)에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기록이 『사기(史記)』 「맹자·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에 실려 있다.
……
제(齊)나라 왕(王)은 직하(稷下) 선생들이 주창한 학설에 매우 만족하여 순우곤(淳于髡) 등 여러 학자들에게 열대부(列大夫)라는 작위(爵位)를 하사했다.
또한 도성(都城) 중심가에 높은 문이 달린 커다란 집을 주어 살게 했다.
제(齊)나라 왕(王)은 그들을 높여 존경하고, 극진하게 대접하며 총애했다.
그는 천하의 제후와 빈객들에게 제(齊)나라에는 천하의 모든 현사(賢士)와 인재들이 모여 있다고 자랑했다.
순자(荀子)는 조(趙)나라 사람인데, 제(齊)나라에 건너와 학문을 닦았다.
양왕(襄王 : 재위 기원전 283년~264년)이 제(齊)나라를 다스릴 때 추연(鄒衍)·전병(田騈)의 무리는 이미 모두 세상을 떠나,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순자(荀子)가 가장 나이 많은 스승이었다.
제(齊)나라에서는 열대부(列大夫)의 자리가 모자라면 그때그때 보충했는데, 순자(荀子)는 세 차례나 좨주(祭酒)가 되었다.
- 『사기(史記)』 「맹자·순경 열전(孟子荀卿列傳)」편
직하(稷下)에는 당대의 지식계를 대표하는 석학(碩學)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곳은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천여 명에 이르는 학자와 인재들이 저마다 자신의 주장과 사상을 내놓고 겨루는 '학문의 경연장(競演場)'이기도 했다.
따라서 직하학궁(稷下學宮)의 학자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로 추대되려면, 그들이 형성하고 있는 지식 사회 내부로부터 그 학문적 깊이와 역량을 인정받아야 했을 것이다.
한 마디로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으로 불릴만한 사람만이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다.
사마천이 순자(荀子)가 세 차례나 맡았다고 기록하고 있는 좨주(祭酒)는 직하학궁(稷下學宮)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즉, 순자(荀子)가 세 차례나 직하학궁(稷下學宮)의 모든 학자들을 대표하는 우두머리를 지냈다는 뜻이다.
순자(荀子)는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학문적 깊이와 역량을 갖추고 있던, 전국시대 말기 최고의 석학(碩學)이었다.
순자의 사상을 법가(法家)의 사상으로 재해석한 한비자
순자(荀子)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역사상 크게 이름을 알린 두 명의 인물이 있다.
그들은 바로 한비자(韓非子)와 이사(李斯)이다.
사마천은 『사기(史記)』 「노자·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에서 "한비(韓非 : 한비자)는 이사(李斯)와 함께 순경(荀卿 : 순자)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사(李斯)는 자신의 재주와 능력이 한비(韓非)에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비자(韓非子)는 전국시대 7웅(七雄 : 한·위·조·진·초·제·연) 중 한(韓)나라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한비자(韓非子)가 '한(韓)나라의 공자(公子 : 임금의 아들) 중 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아마도 서얼 출신의 공족(公族)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비자(韓非子)는 당시 제(齊)나라 직하(稷下)에서 학자로 큰 명성을 떨치고 있던 순자(荀子)에게로 가 학문을 배웠다.
한비자는 스승인 순자(荀子)에게서 유가(儒家)의 학설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모든 학문을 배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스승인 순자(荀子)의 사상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유가(儒家)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후, 한비자(韓非子)는 자신이 추구해야 할 학문과 사상의 방향을 결정한 듯하다.
그것은 바로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의 학문, 즉 법가(法家) 사상이었다.
사마천은, 한비자는 "형명(刑名)과 법술(法術)의 학설을 좋아하였고, 그의 학문은 황로(黃老 : 노자)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고 『사기(史記)』 「노자·한비 열전(老子韓非列傳)」에 기록하고 있다.
한비자는 스승인 순자(荀子)의 학문적 기반 및 사상의 방향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비자가 사회·정치 개혁(改革) 더 나아가 인간 개조(改造)를 위해 주장한 법(法)을 통한 통치는 순자가 주장한 예(禮)를 통한 통치에 사상의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비자는 순자의 사회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예(禮)'를 '법(法)'으로 재해석하여 "법(法)은 곧 예(禮)이다."라고 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하고, 선(善)은 인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순자가 주장한 이 '성악설(性惡說)' 때문에 그는 후대에 와서 유학(儒學)으로부터 '이단아(異端兒)' 취급을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순자는 선(善)이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인위적인 교육과 교화로서만 가질 수 있음을 강조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이 악(惡)하기 때문에, 당시 전국시대를 휩쓸고 있는 침략과 정복 전쟁, 사회적 쟁탈과 혼란은 피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전쟁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교육이라는 인위적 훈련과 예(禮)라는 사회 제도에 따라 인간의 악(惡)한 본성을 교정·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순자의 예론(禮論)은 인간 사회의 혼란과 쟁탈을 올바르게 다스리기 위한 사회 이론이었다.
한비자(韓非子)는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性惡說)을 철학적 토대로 삼았지만, 인간의 악(惡)한 본성을 다스리는 사회 제도는 순자가 주장한 예(禮)가 아니라 법(法)이라고 주장했다.
순자가 사람의 악(惡)한 본성을 유가(儒家)의 방법, 즉 예(禮)로 교정·교화할 수 있다고 본 반면 한비자는 사람의 악(惡)한 본성을 법률과 상벌(賞罰)의 원칙에 따라 다스려야 한다고 보았다.
법률과 상벌(賞罰)의 원칙을 세워 나라를 다스려야, 사람들이 사악(邪惡)한 행동을 하지 못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한비자는 스승인 순자의 성악설(性惡說)과 예론(禮論)을 학문적 토대로 삼는 한편 스스로 춘추전국시대의 법가(法家 : 관중·자산·이극·상앙·신도·신불해)들을 연구하여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법가(法家) 사상가가 될 수 있었다.
[출처] 28. 스승을 사상을 재해석하다 : 순자-한비자 (荀子-韓非子)|작성자 조아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