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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지지(生而知之)
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깨우쳐 안다는 성인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生 : 날 생
而 : 말이을 이
知 : 알 지
之 : 갈 지
나면서부터 안다는 것이 생이지지(生而知之)다. 곧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스스로 깨우쳐 안다는 성인의 경지를 일컫는 말이다. 삼지(三知)의 하나로 도(道)를 스스로 깨달음을 이르는 말이다.
중용(中庸) 제 20장(章)에 이런 말이 있다. "혹은 태어나면서부터 이것(道)을 알고(或生而知之), 혹은 배워서 이것을 알고, 혹은 곤궁하여 이것을 아는데, 그 앎이라는 것에 미쳐서는 똑깥다. 혹은 편안히 이것을 행하고, 혹은 이롭게 여겨 이것을 행하고, 혹은 억지로 힘써 이것을 행하지만, 그 성공하는 데 미쳐서는 똑같다."
이 말은 지(知)와 행(行)에 있어서 인물의 차등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에게는 태어나면서부터 세상의 이치를 꿰고 나온 사람이 있기도 하고, 배워서 알게 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어렵게 힘쓴 뒤에야 비로소 아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깨달음이라는 것에 도달하고 나면 그때는 다 똑같은 것이다. 각각 다른 도리, 다른 이치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모두 한가지로 깨달은 것이다.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孔子)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안 자(者)가 아니라,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 공자(孔子)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학문의 완성은 자질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배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에서이다.
또한 논어(論語) 계씨편(季氏篇)에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은 최상이요(生而知之者 上也),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며(學而知之者 次也), 막힘이 있어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라(困而學之 又其次也). 막힘이 있으면서도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등이다(困而不學 民斯爲下也)."
공자는 사람의 자질을 네 가지 등급으로 분류했다. 첫째는 생지(生知) 또는 생이지지(生而知之)이니 성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요, 둘째는 학지(學知) 또는 학이지지(學而知之)이니 역시 우월한 사람이다. 셋째는 곤지(困知) 또는 곤이지지(困而知之)이니 보통의 사람이며, 끝으로 하우(下愚) 또는 곤이불학(困而不學)이니 보통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앎(知)은 배움(學)을 전제로 한다. 성인은 배우지 않고도 안다고 했지만 그런 사람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보통의 사람으로서 배우지 않고 안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배움에도 등급이 있다고 한다.
문자(文子)는 도덕편(道德篇)에 "높은 배움은 정신으로 듣고, 중간의 배움은 마음으로 듣고, 낮은 배움은 귀로 듣는다(上學以神聽 中學以心聽 下學以耳聽)"고 했다. 이를 부연(敷衍)하여 '귀로 듣는 배움은 피부에 있고(以耳聽者學在皮膚), 마음으로 듣는 배움은 살과 근육에 있으며(以心聽者學在肌肉), 정신으로 듣는 학문은 골수에 있다(以神聽者學在骨髓)'고 했다.
최선을 다해 힘써 배우고 부지런히 익힐 뿐 다른 방도가 있겠는가. 공자나 그 제자들의 의도는 매 사람마다 천부적인 자질이 다르다는 점을 전제로 우리 모두에게 부지런히 익히고 배우라는 권학(勸學) 풍조를 강조하려는 뜻이리라
뜻을 풀어보면 태어나면서 곧 바로 아는 자가 가장 총명한 이요, 학습을 통해서 아는 이가 다음이며, 자질은 비록 둔하나 어려운 환경하에서 익히고 배워 아는 이가 그 다음 총명한 자이지만, 천부적으로 아둔하고도 배우려 하지 않는 보통 이하의 사람들이 있으니 이런 자가 가장 뒤처진 자라는 뜻이다
보통 사람들의 다른 해석으로는 엄마 젖을 빨거나 우는 버릇과 같이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 가장 첫째 앎이요, 그 다음 학교를 간다거나 주변 이웃으로부터 배워서 알게 되는 것이 그 다음이요, 어려운 환경하에서 배워 알게 되는 것이 또 그다음이고, 어려운 환경에 닥쳐서도 뭔가를 새롭게 배워 뚫고 나가려하지 않는 인간들이 있으니 이러한 인간들은 곤난하다는 뜻으로도 풀이 된다
또 다른 뜻으로는 사람의 됨됨이를 천부적인 재능과 후천적인 학습태도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하는 방법도 가능하니, 특히 태어나면서 만사를 알고 있는 성인이 으뜸이요, 배워서 아는 현인이 다음이고 어려움 속에서 스스로 노력하여 알게 되는 보통 인간과 아예 배우려 하지도 않는 하류인간으로도 풀이가 될 수 있다.
한편 공자가 '가장 지혜로운 자와 가장 어리석은 자는 서로 옮겨지지 않는다(唯上智與下智不移)'고 한 것을 기초로 인간을 상품 중품 하품으로 나눈 학자도 있는데 마치 인간을 천부적인 귀족 평민 천민으로 나누는 것으로 받아 들여져 마음이 웬지 씁쓸하기만 하다. 이렇게 지식을 기준으로 인간을 분류하는 공자의 방법이 현실적으로 맞는 해석이긴 하나 다소 비인간적인 요소가 내포돼 있어 불쾌한 인간 차별 의지가 엿보이기에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픈 심정이다.
즉, 앎, 지식, 지혜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니 태어나자마자 배우지도 않고 아는 본능적인 앎이 첫 번째 것이요, 그 다음으로 가족이나 이웃과 더불어 따라 배워서 아는 지식이 그 다음 우리가 인생을 배우는 방법이요, 다음으로 생활하다가 해답이 안 나오는 어려운 처지에서 어쩔 수 없이 배워지는 것, 배워야 하는 것이 그 다음 우리가 삶의 지혜를 배우게 되는 방법이나, 일부 사람들은 새롭게 닥친 어려운 환경하에서 조차 좀 더 노력하여 뭔가를 개선하려고 하지 않으니 이렇게 시대 흐름을 역행하면 곤란하다는 것으로 인생의 승부는 역경속에서 마지막 노력 여하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니 이 때 처지면 끝장이라는 훈육적인 뜻이리라.
결론적으로 우리는 처신방법 즉 생활의 지혜를 기존의 한가지에만 국한하지 말고 여러 경로를 통하되, 문제의 핵심은 어려운 환경일수록 더욱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배우고 익히는데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승부수를 결정 짖는 마지막 방법이라는 소위 역경학설을 체득하여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리라.
그저 공짜로 쉽게 알게 되는 지식만으로, 남의 지혜를 빌리는 것만으로, 쉽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결단코 불가능한 것이며 그렇게는 도저히 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다는 것만은 동서고금 골고루 통용되는 진리리라. “예로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를 말하나 이는 그릇된 말이라. 천지의 조화로 풍우(風雨)를 일으키려면 무한한 공력이 드니 모든 일에 공부하지 않고 아는 법은 없느니라. 정북창(鄭北窓) 같은 재주로도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天下事)를 알았다 하느니라”고 이르셨도다.
정북창(鄭北窓)의 설화(說話)
정북창(鄭北窓)은 조선 명종(明宗) 때의 학자, 관리, 도인인 정렴(鄭磏)을 말한다. 정렴의 자는 사결(士潔)이며 호는 북창(北窓)이며, 일명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도 하였다.
정북창은 어릴 적부터 마음을 가다듬어 신과 통할 줄 알았고, 가까이는 동리 집안의 사소한 일에서 멀리는 나라 밖의 다른 나라의 풍토와 기후의 다른 점과 외국인의 말까지도 마치 귀신처럼 잘 알아 맞추었다 한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할 줄 알았고 또 대낮에는 그림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천재요, 그림자가 없는 귀신이었다는 세평을 들을 만하였다.
정북창에 관한 설화는 많이 있지만 그 중에 몇 가지를 소개 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북창이 14세에 부친 정순봉(鄭順朋)을 따라 중국 북경을 갔었는데, 이상한 기운을 바라보고 중국에 왔다는 유구(琉球: 일본 오키나와에 있던 나라) 사람이 정북창을 보고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운명을 점쳤더니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중국에 들어가면 어떤 진인(眞人)을 만나게 될 것이다고 하더니 당신이 참으로 그 사람이신가봅니다” 하고, 그 자리에서 배우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정북창은 유구(琉球)말로써 주역(周易)의 요결을 가르쳐 주었다. 이리하여 외국에서 온 모든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앞을 다투어 찾아와 보았다. 정북창이 각국의 말로 응대하니 사람들은 깜짝 놀라 이상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고 천인(天人)이라고 불렀다.
한 사람이 자기의 운명을 묻는데, 객관에서 품팔이로 땔나무를 나르는 사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눈 익혀 보았더니 무슨 할 말이 있는 것 같아서, “당신도 할 말이 있어서인가?” 하니, “그렇습니다” 하였다. 같이 말을 나누어 보니 음양(陰陽) 운화(運化)의 기이한 술법을 잘 통한 사람이었다. 정북창이, “당신은 어찌하여 품팔이를 하는가?” 하니,“이렇게 살지 아니하면 저는 벌써 죽었을 것입니다” 하고, 스스로 말하기를, “저는 촉(蜀)나라 사람입니다. 아무 해에는 아무 데로 가게 될 것입니다. 선생은 벌써 만물에 신통하여 무궁한 경지에 들어가셨으니, 도덕경에 문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의 일을 다 안다고 한 말이 이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봅니다” 하였다고 전한다.
그는 19세 때 국자시(國子試)에 뽑히고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양주(楊洲) 괘라리(掛蘿里)에 살 곳을 정하고 있었는데, 중종(中宗) 때에 장악원 주부(掌樂院 主簿), 관상감(觀象監)과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가 되었고, 후에는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었다가 갑자기 벼슬을 버리고 떠났다.
정북창은 천성이 술을 즐기어 두어 말[斗]을 마실 수 있었고 취하지도 않았다. 정북창은 스승도 없었으며, 또한 제자도 없었다고 한다. 언제나 스스로 깨닫고 터득하였다. 언젠가 말하기를, “성인은 인륜을 중히 여기는데, 석가(釋迦)와 노자(老子)는 마음을 닦아 성불하는 것만 말하고 인사의 학문은 빠뜨렸다. 아마 석가와 노자는 대개는 같으면서 약간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하였다.
그리고 남과 더불어 말할 적에는 공자의 학(學)으로 인륜을 행하였다고 하니 그는 유불선(儒佛仙)에 두루 통달한 도인이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생전에 지은 시(詩)에는 그 웅장한 포부가 잘 나타나 있다.
一生讀破萬卷書(일생독파만권서),
一日飮盡天鍾酒(일일음진천종주).
高談伏羲以上事(고담복희이상사),
俗說往來不掛口(속설왕래부괘구).
顔子三十稱亞聖(안자삼십칭아성),
先生之壽何其久(선생지수하기구).
일생동안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하루에 천잔 술을 마시었네. 복희씨 이전 일을 고고하게 담론하고 속설은 입에도 담지 않았네. 안자는 삼십을 살아도 아성이라 불리었는데, 선생의 나이는 어찌 그리 길더뇨?
그리고서 앉은 채로 세상을 떠나니 정북창의 나이는 44세였다. 정북창이 44세에 죽은 사연에 관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친구 중 한 사람이 정북창(鄭北窓)을 찾아와서 말했다. “내가 44세가 되는 모월 모일 죽는다는데, 무슨 좋은 수가 없겠는가?” 그러자 정북창(鄭北窓)이 되물었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는가?” 친구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다. 정북창이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모월 모일 어느 마을 어느 곳에 가면 수레를 끄는 노인이 한 분 계실 것이네, 자네는 아무 이유도 말고 그냥 그 노인에게 절을 하게나.”
이 말을 들은 친구가 모월 모일 그 장소에 가니 마침 수레를 끄는 노인이 보이길래 보자마자 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친구는 줄곧 따라다니며 절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노인이 뒤를 돌아보며 그 친구를 가만히 보더니 말했다. “정북창이 보내서 왔군.” 그 후 그 친구는 44세를 넘기고도 건강히 살았지만, 정북창은 44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정북창이 친구와 수명을 바꾸었다고들 말을 한다.
그리고 정북창은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솔리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계수(季嫂)의 아들인 조카는 사랑하지만 정작 자기 자식 둘은 사랑하지 않아서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 정북창이 금강산의 산사에 머무르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는 밤에 겹으로 병풍을 두르고서 관을 쓰고 머리를 빗질하는 것도 폐하고, 밖을 내다보지도 않은 채 하루종일 고요히 앉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언젠가 절의 중이 찾아와 질문을 하였는데, 정북창이 얘기를 나누다가 “오늘 집에서 일하는 머슴이 술을 갖고 올 것이다”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놀라면서 “아깝구나. 오늘은 술을 못 먹게 생겼구나!”하는 것이었다.
잠시 후 집에서 머슴이 도착하여 말하기를, 술 항아리를 지고 오다가 고갯마루 밖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항아리를 깨뜨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머슴은 아들이 지금 죽게 되었으니 빨리 집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정북창은 “그 아들은 내가 혼인하기 전에 죽인 두 이방이 복수하려고 나에게서 태어난 것이다”라고 말하고는 오히려 그 자리를 피하여 모습을 감추었다.
그가 지방 고을 관찰사로 부임한 적이 있었다. 그 고을에 이방 둘이 있었는데 이들은 행정을 하면서 부정한 일로 인하여서 고을에 원성이 자자하였다. 정북창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 경고를 주었지만 방자한 행동이 고치지 않고 오히려 정북창을 모함하려 들었다.
그들의 진상을 조사해본 결과 이미 전임 관찰사도 모함하여 쫓아 보낸 적이 있었다. 그들의 수법은 교묘하여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 정북창의 눈은 속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북창은 마침내 그들을 참형으로 다스려 죽였다. 그런데 두 이방은 정북창을 극도로 원망하고 복수에 찬 두 눈을 부릅뜨고 죽었다.
얼마 후에 정북창이 장가를 가서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그 아버지를 노려보는 두 아들의 눈빛이 얼마 전에 처형시킨 이방들의 눈빛과 똑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쌍둥이 아들을 얻었다고 경사라고 하였지만 정북창은 내심 반갑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미 그 아들들이 복수를 하러온 이방임을 알았기에 조카는 귀여워했어도 자기 자식은 귀여워하지 않았던 것이다.
두 아들이 어느듯 18세가 되어 과거에 급제를 하여 돌아왔지만 정북창은 금강산에 들어가 나와 보지도 않았다. 과거 급제 얼마후 두 아들이 갑자기 깊은 병이 들어 함께 사경을 헤메자 하인이 급히 정북창을 찾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는 자리를 피하고 말았던 것이다.
두 아들이 죽어 장사를 지냈는데 그날 밤 하얀 소복을 입은 두 아들이 무덤에서 나오더니 “앗다! 그놈 참 지독한 놈이다. 우리가 원수를 갚으러 아들로 왔는데도 저렇게 무심하게 대하니 어쩔 수 없다. 그냥 떠나자” 하고 떠나는 것을 하인이 보고 주인에게 일렀다고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고도 말을 하고 어려서부터 신과 통하였다는 정북창이지만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를 통하였다고 한다. 그의 나이 25세에 육통법(六通法)을 시험해 보려고 입산하여 삼일 동안 정관하더니 이로부터 배우지 않고 저절로 통하여 천리 밖의 일도 생각만 일으키면 훤히 알게 되었다고 한다. 아무리 신기한 능력을 지닌 정북창이지만 입산 3일 후에야 천하사를 알았고 하니 실제 공부하지 않고는 아는 법이 없는 것이다.
생이지지(生而知之)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안다는 뜻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쳐 안다는 성인(聖人)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공자가 말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이 최상이요(生而知之),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 다음이며(學而知之), 막힘이 있어서 배우는 것은(困而學之) 그 다음이다. 막힘이 있어도 배우지 않는 것은(困而不學) 최하이다.”
이 이야기는 논어(論語) 계씨편에 나오는 공자의 학문에 관한 이야기다. 나면서부터 아는 것을 생이지지(生而知之)라고 했다. 즉 태어나면서부터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우쳐 안다는 성인(聖人)의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도 가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하여 특종(特種)으로 보기도 한다. 다섯 살에 국악 신동(神童)이 나오기도 하고 일곱 살에 천재 바이올린 스타가 나오는가 하면 중학생의 나이에 독학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수석을 차지했다는 것들을 특종으로 보곤 한다. 이런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알고 태어났을까?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 아이가 선천적으로 재능을 어느 정도 가지고 낳았다고 하더라도, 부모님의 열성과 본인의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보통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을 옆에서 자주 보거나, 언론매체를 통하여 보고 배워 자기가 좋아하므로 열심히 하여 발전한 것이다. 모든 것이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동양에서 인류역사상 최초로 지식을 팔아먹고, 문명에 영향을 가장 많이 미쳤다고 하는 공자(孔子)도 “나는 나면서부터 저절로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오(吳)나라 태재가 공자제자 자공(子貢)에게 물었다. “당신의 스승 공자는 성인이신가? 어찌 그리 모든 일에 다재다능하신가?” 자공이 대답한다. “원래 하늘이 허락한 성인이라 다재다능하십니다.”
나중에 공자께서 이 말을 듣고 자공에게 말하기를 “태재가 나를 알아보는구나, 나는 어렸을 때 미천해서 천한 일을 싫어하지 않고 해냈다. 그래서 이렇게 능할 수 있었다. 군자가 다 능(能)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공자 역시도 어려서 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견뎌 냄으로 동양 최고의 학자가 되었다. 옛것을 좋아하여 이를 재빨리 찾아 배워서 알았다.
이렇게 말한 것을 본다면 공자가 실제로 어려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될 힘든 상황에 처해서 다른 사람보다 훨씬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 속에 우리는 천재(天才)라고 하는 사람들을 보는데, 열다섯 살의 천재는 있어도 열다섯에 대가(大家)는 없다고 한다. 과연 이 세상에 생이지지(生而知之) 하는 사람이 정말로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신(神)이 아니고는 없을 것 같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배우거나,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았거나, 아니면 자기가 일을 하면서 깨우쳐 경험으로 알아진 것도 있을 것이다. 스스로 깨우친 것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아진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흙 수저나 금 수저나 거의 비슷하다. 커가는 과정에서 보고 듣고 살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져 마침내는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된다. 즉 후천적으로 성장하면서 자기 생활과 환경 속에서 적응하고 자라나면서 변화하고, 부모 친구 스승 등등 주변 환경에 따라 인간의 방향이 달라지고, 사고(思考)가 달라져서 차등이 생겨 그 쓰임이 달라진다.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莊王)이 삼년불비(三年不飛) 즉, 삼년동안 아무런 일도하지 않고 후궁들만 끼고 놀다가 어느 날부터 정신을 차려 정사를 돌보면서부터 나라가 안정되어 태평해졌다. 나라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가자 다방면에 밝은 학자들을 모아놓고 후세에 좋은 본보기가 될 만한 말을 모아 책으로 간행하도록 했다.
학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좋은 명언들을 모으고 정말로 후세에 지침서가 될 만한 말들을 엄선해서 책으로 만들었다. 누가 보아도 좋은 책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종이가 없고 모든 기록을 죽간(竹簡)이나 목간(木簡)에 하던 시절이라 분량이 너무 많아 보통사람들이 읽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당시는 문맹자가 너무 많기도 했다.
그래서 장왕은 분량을 줄이라고 명을 내렸다. 학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줄이고 줄여서 한권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시 이제는 줄여서 한 줄로 만들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하라고 명령을 내린다. 또 다시 학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한 결과 한 문장으로 줄였다. 여기서 나온 말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문장이다.
공부도 역시 마찬가지로 내가 노력한 결과라고 본다. 내가 사는 것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나면서부터 부자는 있을 수 있어도 천재는 없다. 천재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후천적으로 만들어 진다는 것이 정설이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누구든지 남보다 훨씬 더 노력하면 천재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천재(天才)가 못되면 수재(秀才)라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날 때부터 아는 자와 배워서 아는 자
어려운 환경과 처지를 오로지 공부 하나만으로 인류의 사표에 이른 인물을 들라면 아마도 공자가 압권이리라. 그런 공자의 말을 일러 “공자왈(孔子曰)” 또는 “자왈(子曰)”이라 한다. 여기서 자(子)는 ‘필부위지천하사(匹夫爲之天下師)라는 필부에서 천하의 스승이 되었다’라는 말이고, 왈(曰)은 ‘일언위지만세법(一言爲之萬世法)’이라 하여 한 마디의 말이 만세의 법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는 날 때부터 별이 된 것은 아닐 터. 하루는 자로가 섭공과의 대화를 들려준 일이 있다. 논어 술이편(述而篇) 문장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에 대해 물으니(葉公問孔子於子路), 자로가 무식한지라 아무런 대답을 못했다(子路不對). 그리고 돌아와 공자께 섭공과의 일을 말했다.
다 듣고난 공자는 매우 서운하신 듯 말씀하신다. “너는 어째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女奚不曰). 그의 사람됨은(其爲人也) 공부를 했다 하면 밥먹는 것도 잊고(發憤忘食), 음악을 공부하면 근심도 잊으며(樂而忘憂), 장차 몸이 늙어가는 것도 알지 못하거늘(不知老之將至), 너는 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느냐(云爾)?”
얼마나 서운하셨으면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논어 공야장편(公冶萇篇) 문장에서는 공자의 공부습관을 이렇게 기록한다. “열 개의 고을(十室之邑)이라도 충신됨이 나만 한 이는 있겠으나(必有忠信如丘者焉), 공부를 나만큼 좋아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不如丘之好學也).” 그야말로 공부에 관한한 하늘을 찌르는 자부심이다.
그런 공자도 스스로에게는 늘 겸손하셨다. 논어 자한편(子罕篇) 문장에서 이렇게 밝힌 바 있다. “내가 아는 게 있는 거 같던가(吾有知乎哉) 나는 아는 게 없다(無知也). 하잘 것 같은 이가 내게 묻기만 해도(有鄙夫問於我) 나는 앞이 하예진다(空空如也). 나는 비틀어 짜서 이쪽저쪽 간신히 설명해줄 정도다(我叩其兩端而竭焉).” 공부를 많이 했던 공자도 교만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이렇게 검속하셨던 것이다.
하루는 제자가 앎에 대해 물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이 논어 계씨편(季氏篇) 문장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최고다(生而知之者上也). 그 다음이 배워서 아는 자이다(學而知之者次也). 또 그다음이 하기 싫은 공부 억지로 해서 아는 자다(困而學之又其次也). 그럼에도 억지로라도 공부하지 않는 백성은 인생의 바닥이다(困而不學民斯爲下矣).”
그러자 제자가 묻는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는 성인이시니까 배우지 않으셔도 날 때부터 아시는 자 이시겠군요”라며 그런 스승을 둔 자신이 매우 뿌듯하다는 듯이 상찬겸 물었던 것이다. 그러자 공자는 화들짝 놀란다. 논어 술이편(述而篇) 문장의 기록은 이렇다. “나는 날 때부터 아는 자가 아니다(我非生而知之者). 옛 성현의 말씀들을 좋아하여(好古) 남보다 빠르게 움직여 찾아가서 공부했던 것이다(敏以求之者也).”
그렇다면 생이지지(生而知之) 자는 누굴까. 공부하지 않았으나 모든 걸 아는 사람. 과연 인류에 몇이나 될까. 인생에 태어나 공부했다는 기록이 없는 이는 단 한 사람이 유일이다. 로마의 사형수로 죽어갔던 유대의 청년 예수가 그다.
그의 직계 제자 사도 요한은 유대인들의 입을 빌어 요한복음 7:15절에서 자신의 스승에 관한 일을 이렇게 기록한다. “유대인들이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그렇다. 기독교 경전 어디에도 예수가 공부했다는 기록은 없다. 물론 경전 밖 여러 매체의 도서나 방송 매거진 등에 따르면 예수가 어디 가서 뭘 배웠다는 둥 여타의 말들이 많다. 그건 그럴 수 있다. 낙양의 지가를 올리기 위하여 충분히 그럴 수는 있는 것이다.
문제는 경전이 뭘 말하느냐에 방점이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성리학에는 ‘경전존언(經典尊言)’이라는 게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사서삼경(四書三經)이며 그 으뜸으로 논어가 압권이다. 왜냐. 공자의 말이 기록되어서다. 경전에 명토박혀 있으면 믿는 거고 없으면 안믿는 거다. 이것이 공자가 가르쳐 주는 경전을 보는 눈이다.
학자는 어떤 물음에도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1567년 선조1년 11월17일 권좌에 오른지 3개월 7일째 되는 16세의 선조 임금은 경연에서 묻는다. "요임금과 순임금을 비교하면 우열이 있습니까(堯舜有優劣乎)?" 하니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말한다. "어찌 우열이 있겠습니까(豈有優劣者乎).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은 다 같이 생지(生知)의 성인이라(同是生知之聖人也) 실로 우열이 없습니다(固無優劣)."
여기에서 생지(生知)라는 단어에 대한 설명이 요구된다. 생지는 날 때부터 알고 태어났다는 뜻의 생이지지(生而知之)의 줄임말로 논어(論語) 계씨(季氏)편 문장 기록은 이렇다. “공자는 말한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아는 자가 최상이고 배워서 아는 자가 그 다음이고 어려움을 겪은 다음에 배우는 자가 또 그 다음이니 어려움을 겪고도 배우지 않으면 백성으로서 바닥이 되는 것이다(孔子曰: 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중용(中庸) 20장 문장에서도 “성인(聖人)은 나면서부터 아는 자요(生而知之), 대현(大賢)은 배워서 아는 자요(學而知之), 일반 사람은 애를 써서 아는 자이다(困而知之). 마침내 알았다는 점에서 보면 하나다(或生而知之 或學而知之 或困而知之 及其知之一也)”고 했다. 이것을 세상은 삼지(三知)라 불렀다.
그렇다면 공자는 성인이 분명한데 공자는 '날 때부터 아는 생이지지(生而知之) 자인가?'라는 물음이 생긴다. 여기에 대한 공자 스스로의 답변이 논어(論語) 술이(述而)편 문장에 기록되어 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아는 자가 아니다(我非生而知之者). 옛것을 좋아해서 힘써 알기를 구한 사람이다(好古敏以求之者)”라고 밝혔다.
훗날 조선 후기의 학자 최종겸(崔宗謙)은 인심흑백도(人心黑白圖)라는 그림책에서 사람을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성인(聖人), 군자(君子), 수사(秀士), 중인(衆人)이다. 그리고 이를 공부하는 양에 따라서 다섯 개의 품계로 분류했는데 생이지지(生而知之), 학이지지(學而知之), 곤이지지(困而知之), 곤이불학(困而不學), 교이불선(敎而不善)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온 책이 곤지기(困知記) 또는 곤학기(困學記)다, 곧 공부의 어려움을 극복한 기록이다.
다시 이야기는 선조의 물음으로 되돌아가서 고봉의 답변을 들은 16세의 선조는 답변이 가슴에 와 닿지를 않아 실록 원문에 선조는 몇 번 반복해 묻는다(上曰). "요임금과 순임금 중에 누가 낫습니까(堯舜孰優)?" 고봉은 정자(程子)의 입을 빌어(大升啓曰) “정자는(程子曰) '요와 순(堯與舜)은 서로 우열이 없다(更無優劣)'고 했으니 이 말이 과연 그렇습니다(斯言信矣)”고 답한다.
여전히 정곡을 찌르는 답변은 아니다. 선조 임금의 물음은 요·순 중에 누가 더 나으냐인데 고봉은 북송 학자 정자(程子) 곧 정이(程颐)가 제자들에게 했다는 말 '요와 순은 서로 우열이 없다'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것이다. 16세 선조에게 불혹의 대학자로 알려진 고봉은 만족할 만한 답변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사마천 사기 오제본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요임금의 인자함이 하늘과 같았고 지혜는 신과 같았다. 공자가어(孔子家語) 오제덕(五帝德)에 그 인자함은 하늘과 같고(其仁如天), 그 지혜가 신과 같으며(其智如神), 태양처럼 마음이 따뜻하여(如日溫心), 구름처럼 땅을 덮으니(如雲蓋地), 임금님의 덕이 밝고 밝아(帝德昭昭), 온 하늘이 함께 경축하네(普天同慶). 유향이 쓴 설원(說苑)에 요는 어질고 덕이 있어 교화가 널리 퍼졌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상을 주지 않아도 서로 권하고 벌을 주지 않아도 서로 다스렸으니 이것의 요임금의 도(道)였다.“
바꾸어 말하면 요임금이 순임금보다 한 수 위라는 말이다. 그러나 고봉 기대승은 그렇게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처(妻) 여후(呂后)의 오빠 여택(呂澤)은 상산사호(商山四皓)를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학자는 어떤 물음에도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독서왕(讀書王) 김득신(金得臣)
조선시대 공부벌레들의 가르침
중용(中庸)에는 ‘앎(知)의 세 단계’가 있다. 첫째 단계는 성인(聖人)처럼 ‘배우지 않고도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만물의 이치를 깨우친 사람’이다. 이 게 ‘생이지지(生而知之)’다. 둘째 단계는 위인(偉人)처럼 ’배워서 앎에 이르는 사람’이며 이를 ‘학이지지(學而知之)라 한다. 셋째 단계는 ‘고생하면서 열심히 공부한 끝에 앎에 이르는 사람’인데 이를 ‘곤이지지(困而知之)’라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이 말했다. “문자가 만들어진 후 수천 년과 30,000리를 다 뒤져도 대단한 독서가는 시인, 김득신(金得臣)이 으뜸이다.” 백곡, 김득신은 충청도 괴산군 측백나무가 많은 백곡(栢谷)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호(號)가 백곡(栢谷)이다. 그의 머리는 보통사람들 보다 나쁜 것으로 알려졌다. 남들이 서너 번을 읽을 때 그는 수백 번을 반복해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가 50세가 되어서야 뒤늦게 과거에 급제했다. 그후 학문에 정진한 김득신은 걸출한 문장가로 거듭났다. 조선 최고의 독서가인 김득신은 남들과 같은 공부방법으론 절대로 남을 따라갈 수 없음을 알았다. 남들이 책을 한번 읽으면 10번을, 남이 10번 읽으면 100번을 읽었다.
그는 백이전(伯夷傳)을 100,013,000번 읽은 것을 기리기 위해 자신의 서재 이름을 ‘억만제(億萬齊)’라 지었다. 당시 일억은 현재의 십만 번이니 백이전(伯夷傳)을 113,000번 읽었다. 어디 그 뿐이랴, 그가 쓴 ‘독수기(讀數記)’에는 평생 10,000번 이상 읽은 글이 36편이라고 적었다. ‘장자, 사기, 대학, 중용’은 10,000번을 채우지 못해 제외했다.
백곡집 김득신의 친척들은 어릴 적에 천연두를 앓은 후에 머리가 둔(鈍)한 그에게 “큰 인물이 되기는 글렀다”며 혀를 끌끌 차곤 했다. 허지만 아버지는 소년, 김득신에게 “조급해 하지 말라.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룰 수 있다”며 격려하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어느 날, 김득신이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어떤 집에서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말을 멈추고 “글이 정말로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이에 말고삐를 끌던 하인이 “나리께서 매일 읽으신 거라 쇤네도 아는데 ‘사마천의 백이전(伯夷傳)’이 아닙니까?”라고 했다. 글 읽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하인도 줄줄 외울 정도였으나 정작 본인은 기억하지를 못한 것이다.
세상을 먼저 떠난 딸 장례 행렬을 따라 가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던 독서왕, 김득신 시인이 자신의 묘비에 남긴 말이다. “재능이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긋지 말라. 나처럼 머리가 나쁜 사람도 없었겠지만 끝내 성취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힘써 노력하는 데 달려 있다“라고.
중국 송나라 학자 주희가 체계화하고 집대성한 성리학은 조선 사대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주희를 신성불가침한 성역으로 받들며 주자학 공부에 힘썼다. 조선시대 선비(士)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을 말하며 사대부(士大夫)라고 불렀다. 그런데 선비는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여성들 중에도 학식이 풍부하고 인품이 훌륭한 인물을 여사(女士)라고 불렀다. 요즘은 아무나 ‘김 여사’, ‘이 여사’라고 부르지만 말이다.
김득신 외에도 조선시대의 공부벌레 선비들이 참으로 많다. 조선의 성리학자인 김종직(金宗直)은 어릴 적에 천자문(千字文)과 동문선습(童蒙先習)을 떼자 공부하는 재미가 생겨났다. 이른바 문리(文理)가 트인 것이다.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게 즐거워서 공부에 힘쓰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는 대학자가 되었다.
퇴계 이황(李滉)은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 이식이 세상을 떴다. 부친 이식은 좌찬성을 지낼 정도로 학문과 경륜을 겸비했으며 청렴하여 재물을 탐하지 않아 가정형편은 어려웠다. 퇴계의 모친 박씨는 자녀 8남매(7남1녀) 중에서 장남만 출가해서 홀로 어린 7남매의 자녀교육을 위해 농사와 양잠 일에 힘썼다. 퇴계 모친이 직접 쓴 묘비에 남긴 기록이다. “사람들은 보통 과부는 자식을 올바로 가르치지 못한다고 흠을 본다. 너희들이 남보다 백배 더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느냐?”라고.
칼을 턱에 고이고 공부한 조선의 성리학자인 조식(曺植)은 스스로를 경계하기 위해 “안에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警)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라 했다. 공부방에서 단정히 앉아 ‘졸음을 쫓으려고 칼(刀)로 턱을 고이고 허리춤에는 방울을 달고 졸음과 싸우면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조선 헌종 때의 여류시인, 금원(錦園)은 서책을 읽고 넓은 세상을 유람하겠다고 꿈꾼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평생 집 안에만 갇혀 지내는 것은 덧없는 일이라고 여겼다. 여러 책 속에 나오는 금강산을 오르고 싶어서 부모에게 금강산 유람을 졸랐다. 그녀의 부모는 어린 소녀가 단식을 하며 버티는 바람에 부모로부터 금강산 유람을 허락받았다.
1830년 춘삼월, 고향 원주를 나선 그녀는 제천·단양·영춘·청풍을 거쳐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돌아보고 한양까지 여행했다. 그 감동과 궤적을 호동서락기(湖東西洛記)란 기행문에 담았다. “내 삶을 생각하니 금수(禽獸)로 태어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게 다행이다”, “야만의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고 문명의 나라에서 태어난 것 또한 행복이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난 것이 불행이요, 부귀한 집안에 태어나지 않고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이 불행이다. 여자로 태어났다고 규방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것이 옳은가? 한미한 집안에 태어났다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 것을 단념하고 분수대로 사는 것이 옳은가?”라고 200년 전의 여류시인, 금원은 갈파(喝破)했다.
끝으로 비록 지능지수(IQ)가 낮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책읽기에 힘썼던 김득신 시인처럼 양서(良書)를 읽고 또 읽자. 문리(文理)가 트인 성리학자인 김종직, 퇴계의 모친 박씨, 학문정진을 위해서 턱 밑에 칼을 꼽고 공부한 성리학자인 조식과 넓은 세상을 둘러 본 여걸(女傑) 금원에게서 학문의 길을 배우고 익히자. “꿈꾸어라, 끝없이 도전하라”, “아는 게 힘이다, 하면 된다”, “빗방울이 돌에 구멍을 낸다”가 조선시대 공부벌레들의 가르침이다.
▶️ 生(날 생)은 ❶상형문자로 풀이나 나무가 싹트는 모양에서 생기다, 태어나다의 뜻으로 만들었다. ❷상형문자로 生자는 ‘나다’나 ‘낳다’, ‘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生자의 갑골문을 보면 땅 위로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生자는 본래 ‘나서 자라다’나 ‘돋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새싹이 돋아나는 것은 새로운 생명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生자는 후에 ‘태어나다’나 ‘살다’, ‘나다’와 같은 뜻을 갖게 되었다. 生자가 다른 글자와 결합할 때는 본래의 의미인 ‘나다’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姓(성 성)자는 태어남은(生)은 여자(女)에 의해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生(생)은 (1)생명(生命) (2)삶 (3)어른에게 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 흔히 편지에 씀 등의 뜻으로 ①나다 ②낳다 ③살다 ④기르다 ⑤서투르다 ⑥싱싱하다 ⑦만들다 ⑧백성(百姓) ⑨선비(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은 사람을 이르던 말) ⑩자기의 겸칭 ⑪사람 ⑫날(익지 않음) ⑬삶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날 출(出), 있을 존(存), 살 활(活), 낳을 산(産)이 있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죽을 사(死), 죽일 살(殺)이 있다. 용례로 살아 움직임을 생동(生動), 목숨을 생명(生命), 살아 있는 동안을 생전(生前), 생명을 유지하고 있음을 생존(生存),말리거나 얼리지 않은 잡은 그대로의 명태를 생태(生太), 자기가 난 집을 생가(生家),생물의 환경과의 관계에 있어서의 생활 상태를 생태(生態), 세상에 태어난 날을 생일(生日), 사로 잡음을 생포(生捕), 태어남과 죽음을 생사(生死), 먹고 살아가기 위한 직업을 생업(生業), 활발하고 생생한 기운을 생기(生氣), 자기를 낳은 어머니를 생모(生母), 끓이거나 소독하지 않은 맑은 물을 생수(生水), 어떤 사건이나 사물 현상이 어느 곳 또는 세상에 생겨나거나 나타나는 것을 발생(發生), 배우는 사람으로 주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하는 사람을 학생(學生),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先生), 사람이 태어남을 탄생(誕生), 이 세상에서의 인간 생활을 인생(人生), 일단 못 쓰게 된 것을 손질하여 다시 쓰게 됨 또는 죄를 뉘우치고 마음이 새로워짐을 갱생(更生), 다시 살아나는 것을 회생(回生), 아우나 손아래 누이를 동생(同生), 사람이 삶을 사는 내내의 동안을 평생(平生), 어렵고 괴로운 가난한 생활을 고생(苦生), 살림을 안정시키거나 넉넉하도록 하는 일을 후생(厚生), 사람을 산채로 땅에 묻음을 생매장(生埋葬), 생명이 있는 물체를 생명체(生命體), 이유도 없이 공연히 부리는 고집을 생고집(生固執), 날것과 찬 것을 생랭지물(生冷之物), 산 사람의 목구멍에 거미줄 치지 않는다는 생구불망(生口不網), 삶은 잠깐 머무르는 것이고, 죽음은 돌아간다는 생기사귀(生寄死歸),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을 통틀어 일컫는 말을 생사고락(生死苦樂), 살리거나 죽이고, 주거나 뺏는다는 생살여탈(生殺與奪), 학문을 닦지 않아도 태어나면서 부터 안다는 생이지지(生而知之)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등에 쓰인다.
▶️ 知(알 지)는 ❶회의문자로 口(구; 말)와 矢(시; 화살)의 합자(合字)이다. 화살이 활에서 나가듯이 입에서 나오는 말을 말한다. 많이 알고 있으면 화살(矢)처럼 말(口)이 빨리 나간다는 뜻을 합(合)하여 알다를 뜻한다. 또 화살이 꿰뚫듯이 마음속에 확실히 결정한 일이나, 말은 마음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알다, 알리다, 지식 등을 말한다. ❷회의문자로 知자는 '알다'나 '나타내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知자는 矢(화살 시)자와 口(입 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知자는 소전에서야 등장한 글자로 금문에서는 智(지혜 지)자가 '알다'나 '지혜'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후에 슬기로운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기 위해 智자는 '지혜'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고 知자는 '알다'라는 뜻으로 분리되었다. 智자는 아는 것이 많아 화살이 날아가는 속도만큼 말을 빠르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니 知자도 그러한 의미로 풀이될 수 있다. 그래서 知(지)는 (1)사물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정신의 작용하는 힘. 깨닫는 힘 (2)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알다 ②알리다, 알게 하다 ③나타내다, 드러내다 ④맡다, 주재하다 ⑤주관하다 ⑥대접하다 ⑦사귀다 ⑧병이 낫다 ⑨사귐 ⑩친한 친구 ⑪나를 알아주는 사람 ⑫짝, 배우자(配偶者) ⑬대접(待接), 대우(待遇) ⑭슬기, 지혜(智慧) ⑮지식(知識), 앎 ⑯지사(知事) ⑰어조사(語助辭)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알 인(認), 살펴 알 량/양(諒), 알 식(識),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알고 있는 내용이나 사물을 지식(知識), 사물의 도리나 선악 따위를 잘 분별하는 마음의 작용을 지혜(知慧), 지적 활동의 능력을 지능(知能), 지혜로운 성품을 지성(知性), 지식이 있는 것 또는 지식에 관한 것을 지적(知的), 알아서 깨달음 또는 그 능력을 지각(知覺), 지식과 도덕을 지덕(知德), 아는 사람 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봄을 지인(知人), 새로운 것을 앎을 지신(知新), 은혜를 앎을 지은(知恩), 지식이 많고 사물의 이치에 밝은 사람을 지자(知者), 제 분수를 알아 마음에 불만함이 없음 곧 무엇이 넉넉하고 족한 줄을 앎을 지족(知足), 자기 분에 지나치지 않도록 그칠 줄을 앎을 지지(知止), 거문고 소리를 듣고 안다는 뜻으로 자기의 속마음까지 알아주는 친구를 지음(知音), 여러 사람이 어떤 사실을 널리 아는 것을 주지(周知), 어떤 일을 느끼어 아는 것을 감지(感知), 비슷한 또래로서 서로 친하게 사귀는 사람을 붕지(朋知), 기별하여 알림을 통지(通知), 인정하여 앎을 인지(認知), 아는 것이 없음을 무지(無知), 고하여 알림을 고지(告知), 더듬어 살펴 알아냄을 탐지(探知), 세상 사람들이 다 알거나 알게 함을 공지(公知), 서로 잘 알고 친근하게 지내는 사람을 친지(親知), 자기를 가장 잘 알아주는 친한 친구를 일컫는 말을 지기지우(知己之友),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적의 형편과 나의 형편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는 말을 지피지기(知彼知己), 참 지식은 반드시 실행이 따라야 한다는 말을 지행합일(知行合一), 누구나 허물이 있는 것이니 허물을 알면 즉시 고쳐야 한다는 말을 지과필개(知過必改) 등에 쓰인다.
▶️ 之(갈 지/어조사 지)는 ❶상형문자로 㞢(지)는 고자(古字)이다. 대지에서 풀이 자라는 모양으로 전(轉)하여 간다는 뜻이 되었다. 음(音)을 빌어 대명사(代名詞)나 어조사(語助辭)로 차용(借用)한다. ❷상형문자로 之자는 ‘가다’나 ‘~의’, ‘~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之자는 사람의 발을 그린 것이다. 之자의 갑골문을 보면 발을 뜻하는 止(발 지)자가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발아래에는 획이 하나 그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발이 움직이는 지점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之자의 본래 의미는 ‘가다’나 ‘도착하다’였다. 다만 지금은 止자나 去(갈 거)자가 ‘가다’라는 뜻으로 쓰이고 之자는 주로 문장을 연결하는 어조사 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래서 之(지)는 ①가다 ②영향을 끼치다 ③쓰다, 사용하다 ④이르다(어떤 장소나 시간에 닿다), 도달하다 ⑤어조사 ⑥가, 이(是) ⑦~의 ⑧에, ~에 있어서 ⑨와, ~과 ⑩이에, 이곳에⑪을 ⑫그리고 ⑬만일, 만약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이 아이라는 지자(之子), 之자 모양으로 꼬불꼬불한 치받잇 길을 지자로(之字路), 다음이나 버금을 지차(之次), 풍수 지리에서 내룡이 입수하려는 데서 꾸불거리는 현상을 지현(之玄), 딸이 시집가는 일을 지자우귀(之子于歸), 남쪽으로도 가고 북쪽으로도 간다 즉, 어떤 일에 주견이 없이 갈팡질팡 함을 이르는 지남지북(之南之北)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