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행이 신라인이라는 독자들의 오해에 대한 답변
글 전원철
지난 3회에 걸친 제 인터뷰를 보고 많은 분들이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과분하게도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다고 칭찬해 주시는 분이 있었는가 하면,
반면에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냐”,
“우리는 결국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 아니냐”,
혹은 “모든 인류는 결국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의 후손이다” 등등을 포함하여,
심지어 어떤 분은 저보고 “우리 고대어를 제대로 공부해라”
“금시조 대함보가 아니라 김함보이다” 등
비판의 소리를 보낸 분도 적지 않았습니다.
칭찬을 해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더욱 정확하고 자세한 연구가 나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단, 우리가 아니, 전세계가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라는 것과
민족사의 인식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문제를 이곳에서 논의할 대상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일제가 다시 우리를 집어삼키거나, 외적이 우리를 점령해도
우리는 다 같은 아담과 이브의 자식이므로
상관없다는 식의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이야기이죠.
또한 제 고대어 풀이는 인터뷰 전반에 걸쳐 소략하게 나오지만,
제 책에 더욱 자세히 나와 있으므로 그것을 참고해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제가 꼭 하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금행에 관한 것입니다.
저는 저의 책에서 저는 칭기스 칸의 선조가 바로 고구려-발해 왕족이었다는 것을 밝히면서 금 시조의 아버지 금행이 바로 고려 왕건, 금태조 아골타,
그리고 칭기스 칸 세 가문의 직계선조로
이들 사이의 잃어버린 핵심 고리이며,
그는 또 청나라 누르하치의 선조임도 밝혔습니다.
그런데 독자분 중에서 금행을 왕건과 같은 시기의‘신라인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라고 확고하게 믿으며,
저의 연구 전체를 부정하는 듯한 발언을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것이 결코 독자분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2006년 이후 이런 주장을 하는 일부 학자의 주장이
저서나 언론을 통해 우리 사회에 광범위하게 전파되었고,
댓글을 단 독자분도 그런 잘못된 정보 외에 다른 정보를 그 동안 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이 문제를 쉽게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신라인 김행(金幸)’과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 혹은 金幸)’은
동시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면 합니다.
함보의 아버지 금행은 왕건의 외증조부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학자들은 경순왕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함보’라고 주장합니다.
경순왕은 왕건보다 30여 년 더 나이가 적은 항렬인데
그 아들이면 왕건보다도 거의 두 세대 차이로 아래 도표가 보여주듯이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나이입니다.
또한 어느 기록에도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고 기록된 사서나 족보가 없는데도,
일부 학자들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이런 설
(마의태자가 금행의 아들인 함보라던가, 마의태자가 완안 아골타의 8대 선조라는 등)을
퍼뜨려 온 겁니다.
그들은 금 희종 완안 단 시대에 송나라 사람 홍호(洪皓)가 1155년경 지은
《송막기문(松漠記聞)》과 남송 때 1234년경 우문무소(宇文懋昭)가 편찬한 《대금국지(大金國志)》에
‘여진추장은 신라인’이라고 적어둔 것을 문자그대로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함보가 신라인이고
그렇다면 그 아버지가 《고려사》에 금행으로 되어 있으니,
함보는 신라김씨 김행,
곧 안동권씨 시조 권행과 같은 사람이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해주는 것이
바로 《대금국지권수 금초흥본말》과 1777년~1778년에 쓰인 《흠정만주원류고》 둘인데,
이 사서들은 “대개 신라 땅(新羅之地)이 고려에 병합되어 들어갔으므로(并入髙麗),
이 때문에 어떤 이는 고려라 하고 어떤 이는 신라라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은 다 한 가지 말이다(故或云髙麗或云新羅其實一也)”고 합니다.
함보가 원래 살았던 땅이 원래 발해(-고려) 땅이었다가
당-발해-신라 전쟁으로 빼았겨 신라의 땅이 되었다가,
다시 발해 선왕 때 금행이 빼앗았다가
함보 시절에 또 다시 신라 땅이 될뻔했다가 그 손자 시절에는 궁예의 고려(후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또 얼마 안 가 나중에는 송나라에서는 “신라”사람으로 이해된 왕건의 땅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죠.
따라서 함보의 “지적(地籍)”이 아니라, 그의 “족적(族籍)”을 보아야 하는데,
우리 일부 학자들이 금행과 김행이 한자로 그 이름 하나가 같다는 것과
여러 사서 중에서 두 사서가 “신라인”이라고 하는 한 마디에 깊은 연구도 없이 책을 쓰고
인터넷에 올리고 KBS방송의 역사스페셜 등에서 대대적으로 홍보하여 대중을 오도한 것입니다.
정리하면, 사람들이 혼동을 하는 유일한 이유가 단 하나
이름이 같고 한 두 사서가 그가 “신라인”이라고 적었다는 정도로 이런 오류가 발생한 겁니다.
하지만,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쇠)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김”성이 아니고,
발해의 “대”성의 우리 말인 “큰/큼”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금(今, 金)”성이죠.
다시 말해 “금(큰)-행(칸)(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대-행(大-幸)”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고려사》에 가장 처음 나오는 글자 ‘금(今)’ 자로 쓴 겁니다.
‘안동 권씨 시조 김행’과는 구분하라고 하는 뜻에서요.
그러니까 금행과 신라인 김행(권행)은 동명이인이지 절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이름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습니다.
우선 두 분이 산 연도가 다릅니다.
금행은 아래 도표에서 보다시피 김행(권행)보다 대략 120년 전의 사람입니다.
‘신라인 김행’이 ‘안동권씨 시조 권행’이 된 이유는
김행이 후백제의 견훤의 군대를 안동에서 물리치고
그 지방을 들고 왕건에게 귀부해 왔을 때,
왕권이 그에게 공을 세운 상으로 김행에게 안동지역을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의미에서
‘권’이라는 성을 하사합니다.
그 ‘권행’과 그보다 4세대전의 ‘금행’을 혼동하는 그 오류를 바루기 위해
저는 제 책에서 한 장을 할애하여
송(宋) 광종(光宗)소희5년(紹熙五年, 1194년)에 쓰인 《삼조북맹회편》이 함보,
곧 “여진[추장]은 주몽(朱蒙)의 후손이고 말갈(靺鞨) 씨”라고 하고
또 앞서 말한 대로 학자들이 ‘권행’이 여진추장이라고 오인할 수도 있도록
또 다시 “여진추장은 곧 신라인”이라고 말한 그 《대금국지》조차도
그가 “발해에서 갈라진 별족(別族)”이라고 한 것도 제 책에서 인용해 두었습니다.
또 《흠정만주원류고》도
“발해왕(渤海王)이 금나라의 선조이다”고 하는 것을 다시 인용해두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함보의 7세손 아골타가
《금사》에서 양박을 시켜 발해유민들에게 말한 대로
자신이 속한 “여진과 발해는 본래 같은 집안(同一家)”이라고 한 것도 인용해두었습니다.
또 그 외, 그들이 살던 시대가 918년 후의 여진시대가 아니라, 810년대의 발해시대이고,
그들이 살던 곳도 황해도 평산과 함경북도 길주이며,
그들의 직업 또는 직책은 서해(발해)군왕 및 반안군왕이었고,
아들의 수자도 신라인 김행(권행)의 아들 1명과는 달리
금행의 아들 수는 3명이었고,
금행이 살던 시대는 ‘신라인 김행’보다는 적어도 4세대 빠르고,
경순왕의 아들 ‘마의태자’의 시대보다는
5세대 전의 훨씬 이른 때라는 등등 8가지 이유를 들어
기존학자의 설이 잘못임을 증명해 두었습니다.
이 가운데 《금사》 하나만 보더라도 금사에는 “금시조 함보는
처음에 고려에서 왔다(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고 하고 있을 뿐
‘김-함보’라고 한 적은 결코 없습니다.
그런데 일부 우리 학자들,
예컨데 김운회 교수 등이
그 정사 《금사》에 그를 ‘김함보’라고 적었다고 잘못된 주장을 했습니다.
《금사세기》에는 ‘김함보’는 절대 없습니다.
또 《금사 고려전》에는 고려와 금나라 사이의 외교관계를 기록했을 뿐,
함보에 관한 언급을 한 적도 없습니다.
<金史> | <大金國志, 卷一> | <고려사> | <고려사> | 비고 |
금행,今幸,金幸 <고려사>) |
| 작제건 아버지(발해시대, ?~*819년?) | 서해용왕 두은점 각간 | 금행=서해용왕 |
함보=큰바=큰가(函普) | 감복(龕福) (작제건 아내 용녀의 형제/작제건의 처남/ 용건 외삼촌) | 작제건 (발해시대, ?~*849년?) | 용녀(작제건 아내) | 아들(1대) 세대 |
오로(烏魯) | 胡來 (용건 외사촌 형제) | 용건(고려 세조 왕륭, 王隆, ? ~ 879년 5월)-후삼국시대 | *궁예 세대 | 손자(2대) 세대 |
발해(跋海) 신라인 김행(金幸) 세대 | (왕건 외6촌 형제) 918년 왕건의 고려 성립, 926년 발해 멸망 | 왕건 (고려 태조, 877~943년, 재위: 918~943년) | 궁예 아들 세대 | 증손(3대) 세대 |
수가(綏可) 경순왕(909?~979년) 세대 | (안종 외8촌 형제) “[*발해가 망해] 거란을 섬기다(臣伏契丹)”<삼조북맹회편> -발해가 거란 치하에 들어간 시대 | -왕건의 맏아들인 고려 제2대 혜종(惠宗, 912~945 재위: 943~945) 세대 -[*셋째 아들] 제3대왕 정종(定宗, 923~949 재위: 945~949) -[넷째 아들] 제4대왕 광종(光宗) [925년(태조 8)∼975년(광종 26)/ 재위 949년∼975년/ 고려 제4대 왕] -안종(安宗, ? ~996년) | | 4대 후손 |
석로(石魯), 아내 고려여인 후비의 아들이 호실답(胡失答) 마의태자 세대 | (현종 외10촌) 북국 여진의 남국 고려에서 취한 아내 | 현종(顯宗, 992~1031년 고려 제8대 왕, 재위: 1009~1031년) -안종(安宗, ? ~996년) 아들 세대 | | 5대 후손 |
오고래(烏古乃, ? ~1074, 재위 1021~1074년) | 호래(胡來) (문종 외12촌) | 문종(文宗, 1019~1083년, 고려 제11대 왕, 재위1046~1083년 | | 6대 후손 |
핵리발(劾里鉢, 1039~1092년, 오고래 둘째 아들) 파랄숙(頗剌淑), 영가(盈歌) 형제 | 양할(楊割) (숙종 외14촌)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숙종(肅宗, 1054~1105년, 고려 제15대 왕, 재위: 1095~1105년) | | 7대 후손 |
아골타(阿骨打) 1068~1123년, 핵리발 둘째 아들) | (예종 외16촌) 楊割生三子:長曰阿骨打 *단, <대금국지>의 이 기록은 잘못된 기록임 | 예종(睿宗, 1079~1122년. 고려 제16대 왕 재위: 1105~1122년) | | 8대 후손 |
*는 추정을 나타냄
위 도표는 그들이 살던 시기를 알기 쉽게 정리한 것입니다.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금행의 8대손이 아골타입니다.
바로 그가 왕건의 5대손인 예종 왕우 때
“형인 금나라 황제가 아우 고려 국왕에게 말 하노니 형제나라가 되자”는 국서를 보내옵니다.
그러므로 아골타는 예종과 같은 시대, 같은 세대인데,
바로 그 예종의 8대 선조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의 아버지인데,
그는 왕건의 외증조부(3대 조부) 금행과 같은 세대라는 것이 명확해집니다.
다시 말해 아골타의 8대 선조 금행은 예종 왕우의 선조 때 외가쪽 8대 선조 금행입니다.
이 분은 왕건의 3대 선조입니다.
그런데, 신라인 김행은 왕건과 동시대인이고,
김행과 왕건은 또 아골타의 5대 선조인 발해(跋海)와 같은 세대인물입니다.
그런 김행이 왕건의 3대 외조 금행일 수가 있습니까.
또 왕건에게 신라를 들고 귀부해온 경순왕은 왕건의 아들 세대이고,
그 아들 마의태자는 왕건의 손자 세대입니다.
마의태자는 아골타의 3대조인 석로(石魯)와 같은 시대 사람인데,
그 마의태자가 아골타의 8대조인 금행이나, 7대조인 함보가 될 수 있나요?
금행은 금행→키얀(澗)의 아들→키얀(澗)→일하→대야발의 계보속에 있습니다.
제 책에는 자세한 설명과 왕건과 아골타 가계도표까지 첨부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학자들의 설의 진위도 파악하지 않은 독자분들이
이미 고정관념이 되어버린 잘못된 지식을 바탕으로
같은 내용의 댓글을 반복해서 다는 것을 보고 참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대중에게 전달되어 고정관념이 될 때
그 파급효과는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분들에게는 역사의 진실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 비치된 제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2&mcate=M1001&nNewsNumb=20150818136&nidx=18137
첫댓글 전원철박사님께 재야 사학자들이 고역사로 고조선에 대해 밝히고 있읍니다. 함께하시면 엄청난 성과 있을 겁니다. 귀박사께서는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그래서 혹시 황해도 평주에서 탈출한 종족이 나오는 부분이 있읍니다. 고조선역사, 지금의 베이징일대 하북일대까지도 고조선, 고구려 내지는 백제강역이 중국에 광할하게 있었을 가능성이 있읍니다.그러면 박사의 징기스칸조상은 정확할 지라도 민족의 활동범위가 엄청날 수 있다고 생각듭니다. 꼭 고조선, 고구려,백제, 신라 동이족의 역사를 연구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세계 100인에 선정된 박창범 천문학자가
신라가 중국땅에 있었다고 천문연구를 통해 밝혔다고 하더군요.
일단 전원철 박사가 중국역사책과 자료를 바야 연구를 할수 있겠지요.
지금은 보기 힘들지도 모르지요.
몽골도 고구려 이두와 향찰로 기록했듯이,
한민족은 왕족의 기록과 중요한것은 이두와 향찰로 기록했다고 봅니다,
고로 타국인들은 이해를 못하겠지요.
결국 전박사가 보면 알수가 있겠지요.
백제도 이두와 향찰을 사용했다고 짐작합니다.
어버과 철자가 많이 틀렸은데 미안하고요. 박사님은 엄청난 언어능력과 고역사서 비교 능력이 반드시 고조선과 고구려백제,신라,즉 동이족의 빛나는 역사를 밝힐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존경하는 우전님 ~ 답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전박사님의 우수한 두뇌에 감탄합니다. 그리고 뛰어난 머리를 자신의 경제적실리에만 두지 않고 우리의 역사의 비밀을 밝히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쓷는 것에 존경을 표합니다. 그리고 재야 사학자들이 연구한 분야를 참고하면서 고역사서를 연구하고 함께 토론하면 좀더 효율적이지 않겠는가 싶습니다. 강의나 발표에 꼭 참석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찾아보겠지만 전박사님의 카페나 연구소 등 연락가능한 곳이 있으면 답을 주시기 바랍니다.
전원철 박사 저서
후원- 한류열풍 사랑 (사) 대한사랑
070- 7728 - 2694
여기 문의해 보시고,
안되면 비봉 출판사에 문의하면 알려줄것 같네요.
저가 고조선, 고구려, 백제역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전주이씨 족보를 보고 ~ 왜 서기 650~70년 경에 중국에서 건너왔다고 되어있는지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되었읍니다. 혹시 중국에서 이민온 것이 아니고 대륙에서 패배하면서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나다. 재야 사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그런 것 같아서요
이성계는 여진족= 금나라 호족출신인가 그런 모양이더군요.
징기스칸 처럼 고구려 후손이거나 한민족이겠지요.
중국에도 전주가 있더만요.
한반도로 이주하며 전주이씨로 했다고 봅니다.
전주이씨란 말은 중국 전주를 본향으로 하겠지요..
전라도 전주는 지명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네요.
안동권가의 시조는 "고려사""고려사절요"
"삼국사기"에는 金幸이 아니고 金行으로
기록되 있습니다.
본인이 그 자손이고
금나라의 金幸의 역사서의 기록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저의 시조공 할아버지의 생몰년도는 미상입니다
당시 안동 병산전투에서 고려가 팔공산 폐전의 상처를
안동 병산전투에서 회복했는데
그 공로로 장,김,권씨 성이 본관을 안동으로 하게 되는데
장,김씨 시조공은 생몰년도 명확함
제 私見이지만
修行하다 뜻의 行이고
아들은 仁幸인데 어질어서 다행이다 뜻이고(命修에 치우침)
손은 冊인데 (性修에 치우침 )
증손중 淸(일명 권진인,문둥이 태어나 버림을 받았는데
후에 性命雙修로 진인이 됨)
함보의 아버지 금행(今幸)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그 이름을 원래 금행(今幸)으로 쓰고
다른 하나로 금행(金幸)으로 써두었습니다
그러므로 앞의 이름은 당연히 “금행”이고 뒤의 이름도 “(쇠)금행(金幸)”입니다
발음은 신라의 “김”성이 아니고
발해의 “대”성의 우리 말인 “큰/큼”을 이두식 한자를 써서 적은 “금(今, 金)”성이죠
다시 말해 “금(큰)-행(칸)(今幸)”은
그 성씨를 한자로 바꾸면 “대-행(大-幸)”이라는 말이고
이는 후대에 “대칸(大汗)”으로 쓰죠. - 본문 내용.
삼국사기도 일제시대 조작했다는 글을 본것 같은데요.
@우전 천하고금대총편람도에 따르면,
경주 바로 밑에 팔공산이 표시되어 있다
팔공산 아래 '수' 지명이 있는데
이는 '천하고금대총편람도'상의 '경주'위치
고려의수도가 개경이라면
개경은 현재의 개봉이었을 때
장안(지금 서안 : 섬서성)은 서경이었고
이성계는 華山(섬서성) 아래 3년간 도읍하였다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고, 한양이라 한 것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을 추가로 덧붙이자면
섬서성의 화산 부근에 화양과 화양구곡(송시열의 건물)도 있다
高麗史와 대륙 정사서에 쓰여져 있는 고려는
대륙1만리 강역에서 황도를 하남성 개봉(開封)으로
동경(東京)을 낙양(洛陽)으로
서경(西京)을 섬서성 서안(西安:호경)으로 했다 - 가져온글
안동지역이 우리 권가들이 많이 사는데
님의 말대로라면 국적이 전부
"중화인민공화국"이네요
님은 네이버 백과는 믿고 상식을 믿지 않으니
대한민국 호적을 믿지 않으니
재산도 없겠고
댓글 알바비로 열심히 입에 풀칠하세요
중국대륙에서 한반도로 후퇴했고 이성계는 여진족이라고 배웠겠지요?
님이 믿는것만 진실이라고 믿으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