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다시 미궁속으로
“너가 파란 알약을 선택하면, 이야기는 끝나고, 너는 너의 침대에서 일어나서 너가 믿고 싶어 하는 것들을 믿게된다. 너가 빨간 알약을 선택하면, 너는 "이상한 세계"에 남게 되며, 나는 토끼의 굴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줄 것이다.”
불편한 진실과 편한 거짓을 두고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물론 나는 이 가정에 결함이 조금 있다고 생각한다. 언뜻 보면 ‘불편함 vs 편함‘으로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불편함 vs 불편함‘이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은 ’불편한‘ 진실이기에 불편하고 편한 거짓은 편한 ’거짓‘이기에 불편한 것이다. 그러니까 쉽게 말해 빨간약과 파란약의 존재를 인지한 순간, 즉 이 세상은 거짓이고 진실은 따로 있다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그저 두 불편함 사이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두 불편함 중 어떤 것이 감수할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진실을 아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일까? 가치는 무엇으로 정해지는 것일까? 사람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물질적인 유익으로, 누군가는 심리적인 포만감으로 가치를 정할지도 모른다.
물질적인 유익으로 가치를 정한다면 거의 대부분은 ’진실을 아는 것‘에 대해 가치가 없다고 판단할 것이다.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말이다. 진실을 안다고 해서 그것이 밥을 먹여주진 않는다. 영화 매트릭스 안에서 생각해 보자면, 주인공 네오가 빨간약을 선택한 후에 물질적인 유익이 생겼는가? 전혀 아니다. 네오는 어쩌면 평생 겪지 않아도 될 것들을 체험하며 몸에 구멍이 뚫리고 언제나 위험에 시달리는 세계로 갔다. 그곳의 환경은 먹을 것도 잠자리도 아주 열악했다. 진리는 알았지만 그에게 남은 건 열악함 뿐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에게 ‘진실을 아는 것’은 가치가 없다.
반면, 심리적인 포만감으로 가치를 정하게 되면 어떨까? 대충 이 쪽 의견이 나의 의견과 비슷하다. 인간에게는 진실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그 열망이 정확히 어디서 나오는 지는 모른다. 누군가는 이성으로 부터 나왔다 라고 할 수 있고 또 누군가는 그 모든 것이 신으로 부터 나왔다 라고 이야기 한다. 나는 후자에 가깝다. 나는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허함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이성과 지성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태어났다면 질문하는 일을 멈추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인간은 같은 질문에 체류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부터 왔고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존재하는가?’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이 어마어마한 질문에 인간의 지식은 평생이 걸려도 답을 내리지 못한다. 그렇게 평생 텅 비어버린 공허함은 인간을 깊은 수렁에 빠뜨린다. 그리고 결국 초월적인 어떤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신을 만나진리를 알게 되며 구원을 받고 인간으로써의 온전함을 누린다. 나는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의 진실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모두 신의 작품이라 생각한다. 어쩌면 인간에게 능력을 부여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둔 것이다. (다소 갑작스러운 유신론적 결론이라고 받아드려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진리를 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앞서 보았듯이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물질 너머의 가치를 창출하고 허망한 존재가 더 이상 허망하지 않도록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까 진리를 안다는 것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매트릭스라는 영화를 보기 전까지 가졌던 생각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떨칠 수 없는 한가지 질문이 있었다. 네오가 앤더슨의 이름으로써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그 세계가 가짜였던 것처럼 인간이 재배되고 몸에 구멍이 뚫린 그 세계마저 가상 속 세계라면 어떡할까? 컴퓨터 속 공간과 가상현실을 넘나들며 모든 게 의심만 가득해지게 되었다. 이젠 진짜와 가짜의 세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젠 아무도 알 수 없다.
결국 진실은 다시 미궁속으로 가라앉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