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문화 : 단군왕검 마니산 초제 칠선녀
단군왕검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마니산 참성단
정확한 명칭은 단군왕검(檀君王儉[14])이지만 일반적으로 단군이라고 지칭된다. 친근하게 단군 할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하며 한국의 역사를 열었다고 알려지는 신화 속 인물이다. 즉 한민족의 시조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이른 바 단군신화의 해석은 다양하지만 적어도 근대 이래로 표면적인 이야기 자체보다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문장들을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군(檀君)은 이름이며 왕명은 왕검인데 김영하 교수에 의하면 단군은 몽골 신화의 텡그리와 같은 의미이며 왕검은 일본에서 군주를 뜻하는 오오키미와 비슷한 것이다.[15] 하지만 대종교 등에서는 여전히 단군을 왕명으로 보고 1대 단군 2대 단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왕검(王儉)의 경우 '임금'의 향찰식 표기라는 주장이 있다.# 향찰에선 2음절짜리 고유어(고대 한국어)를 기록할 때 첫 음절은 훈차, 둘째 음절은 음차하곤 했는데, 王儉도 王은 훈, 儉은 음으로 보인다는 것. 이럴 때 첫 음절은 중세 한국어를 기반으로 원래 발음을 재구해야 한다. 그 예로 川理(*NAli, *나리, 내)나 國惡(*NALak, *나락, 나라) 등이 있다.[16] 만약 王儉도 같은 표기법으로 쓰인 것이라면 원래 형태는 중세국어 '님〯금〮'을 기반으로 *NIMkem, *님검 정도로 재구할 수 있다. 王儉이 이사금과 같은 말이라는 설을 따른다면 *NISkem, *닛검 이 되겠다.
만약 '왕검'이 '임금'과 같다면 후대에 붙여진 칭호일 수도 있다. 당대 중국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의 지도자는 원래 '후(侯)'라고 하다가 기원전 323년경에야 '왕'을 칭했기 때문. 물론 내적으로는 계속 왕검/님검이라고 칭했고 후나 왕은 대외적인 칭호였을지도 모른다.
삼국 시대나 남북국 시대엔 단군에 관한 숭배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고구려에서 섬기던 '가한신(可汗神)'이 단군과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추측만 할 뿐이다. 단군의 제사에 대한 기록은 현재 고려시대부터 확인 되는데, 고려사 지리지에 따르면 구월산에 삼성사가 있어 단인, 단웅, 단군을 모셨다고 한다. 다만 고려 시대 초, 중기엔 단군 숭배가 그리 크지 않았다. 7대 목종 시기에 삼성사 의주(儀注)[22]를 만들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고려 시대에 정부가 삼성사에 제사를 지냈거나, 지방 관리가 지낸 제사 기록이 발견되지 않았다.[23] 고려에서 단군의 비중이 늘어나는 건 말기로, 고종 대에 강화도로 대피한 뒤 강화도의 유적이 단군의 유적으로 알려졌고, 제왕운기와 삼국유사에선 단군이 시조로 높여졌다.[24]
조선 왕조가 열린 뒤, 태종이 평양에 기자 사당을 지은 뒤 단군을 동쪽에 배향했다. 세종이 단군-동명성왕 사당을 지어 독립적으로 제사를 지냈고, 영조가 숭령전이란 액호를 내려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5] 삼성사에서의 제사는 숭령전이 건립되며 중지되었는데 건물 자체는 지역 차원에서 보존하며 유지되었다. 이후 제사를 평양으로 옮겨버린 탓에 역병이 나돌았다는 소문이 돌며 지역여론의 항의가 거세지자 성종 대에 복구되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26] 숭령전, 삼성사 외에도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평양시 강동군의 단군묘[27] 등이 있고 동국통감 등 조선 시대 사서엔 단군이 시조로서 확실하게 등장하는 등 단군 숭배는 조선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했다.[28]
구한말엔 민족주의가 대두되며 단군이 매우 중시됐고, 더 나아가 단군을 신으로 숭배하는 대종교가 탄생했다.[29] 민간 무속 신앙에도 단군은 숭배 대상이었으며, 지금까지 논란이 많은 증산도 계통의 종교들에서도 단군을 숭배한다.
현재엔 단군과 관련된 장소론 평양 숭령전과 단군릉, 구월산 삼성사, 강화도 마니산 참성단, 각지에 세워진 단군성전 등이 있다.
강화도 마니산
올림픽대회 성화는 그리스에 있는 고대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에서 채화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체육행사 가운데 가장 대회인 전국체육대회에서도 성화채화와 봉송이 차지하는 상징과 의미가 매우 크다.
전국체전 성화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참성단((塹城壇)에서 칠선녀가 채화한다.
마니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으로 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부르며,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안정복은 《고려사》 지리지(地理志)를 인용하여 “마니산(摩尼山)의 참성단(塹城壇)은 세속에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단이다.’ 하고, 전등산(傳燈山)은 일명 삼랑성(三郞城)인데, 세속에서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서 쌓은 것이다.’ 고 전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성소였기 왕조 시대 이곳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장소였다.
마니산은 인천광역시 강화군 화도면에 있는 산으로 두악산(頭嶽山)이라고도 부르며, 산 정상에 있는 참성단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마련했다고 한다.
참성단 제례에 관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것은 1264년(원종 5) 6월 고려 원종이 마리산참성(摩利山塹城)에서 초제(醮祭)를 지냈다는 기록이다. 초제는 성신(星辰)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소격서(昭格署)에서 마니산(摩尼山) 초제를 담당하였으나 중종 때 소격서가 격파되면서 국가차원의 제사도 폐지되었다.
마니산 참성단은 ‘민족의 성지’로 주목받은 것은 대일항쟁기 국권회복과 민족의 대동단결을 위해 민족의 시조로 단군을 재인식하면서였다.
광복 후 개천절이 부활되면서 참성단은 개천절 경축행사의 상징적 장소가 되었다.
오늘날 강화도는 연륙되어 쉽게 갈 수 있다. 참성단 또한 등산로를 정비하여 가파른 곳에 계단을 만들어 편리하게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ㅡ조선 후기 문신 죽석 서영보의 시비가 있다.
참성단
만길이나 높은 곳에
현묘한 단을 쌓았는데
하늘가에 닿았고
가벼운 바람에
맑은 아지랑이는
그윽한 정을 끌어 올리네
망연히 앉아 초파리떼 헤아리니
우리 강토가 눈앞에 질펀하구나
마니산 초제 단군에게 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