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롱보드 위에서 긴머리 휘날리며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여전사,
자동소총에서 불을 뿜어내며 춤추는 그녀는 아름다운 시카고의 철의 여인.
3. 시카고는 전쟁터
Chicago is War Zone
거리는 시카고 남부 슬럼가와 다를 바 없었다. 3층과 5층짜리 높지 않은 서민 아파트와 작은 방갈로 하우스가 뒤섞인 동네는 가로등마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더 우중충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매그놀리아를 따라 들어 선 길에는 방갈로 주택이 촘촘히 늘어선 좁은 길이었다. 간간히 불 켜진 집이 몇 채 보일 뿐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넘어져 구르는 쓰레기통, 부서진 자동차. 밤중에도 널려 있는 빨래들, 무릎까지 수북하게 자란 잡초들, 어둠 속에서도 동네의 사는 수준을 대충 짐작하게 했다.
허름한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매기! 부르며 반가워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소녀가 달려 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매그놀리아가 대답 대신 가볍게 안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들린은 아직도 안 자고 있었어? 저녁은?”
“먹었지. 오늘 내가 칠리 치킨 만들었어, 엄마가 가르쳐 주었어.”
“아, 착한 소녀네. 그런데 에일리는 방에 있니?”
“응 여전히 음악만 듣고 있어.”
매들린은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동양인은 어디에서나 같은 눈총을 받는다.
“응 회사 동료야!”
“하이!”
“헬로우! 작은 숙녀님!” 나는 상냥하게 인사했다.
매그놀리아는 나를 작은 부엌 테이블의 의자에 앉게 한 다음 약상자를 가져왔다. 셔츠를 올리고 등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구멍 나지는 않았어.”
기적이다. 총에 맞았는데 총알이 박히지 않았다니. 나는 운이 좋은 남자다. 유탄이었든지 아니면 백팩이 완충역할을 해주었을 것이다. 거울을 보니 중심 부분은 살갗이 빨갛게 찢어져 피멍이 들었고 주변은 시커멓게 멍을 들었다. 매그놀리아가 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여 주었다. 살을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통증도 감각이다. 익숙해지면 견딜만하다.
이때 방문이 열리고 주춤거리며 한 소녀가 나왔다. 이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고 헤드폰을 쓴 고개를 정면으로 세우고 오른손으로 벽에 줄을 긋는 것처럼 벽을 따라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실이 길게 매어져 있었다.
“에일리는 시각장애인이야. 5년 전에 사고를 당해 눈을 다치고 시력을 잃었어.”
매그놀리아가 아주 조그맣게 속삭였다.
“이게 아메리카의 리얼 라이프지. 엄마는 병들어 누웠고, 동생은 맹인이고 무책임한 아버지는 우리 가족 모두를 버리고 도망 가버리고…….”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족의 상처를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를 보니 갑자기 모든 현실이 서러워졌다.
“우리의 삶도 다를 바 없어.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희망을 품고 왔다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고 단지 먹고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려야 하지. 자식들을 위해 이민 왔노라고 말은 하지만 그게 진짜 자식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없는 현실을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착각과 희생이 따르는지......, 트럭 운전이라도 하고 있어서 가족이 먹고 산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하는 우리 자신도 가엾지.”
우리는 침묵했다. 서로 각각의 입장은 다르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있음을 알았다. 다만 삶에 쫓기며 살다 보니 상대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그녀보다 나은 삶인가? 나의 꿈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오직 일에만 열중하는 속마음에는 비참한 현실을 잊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내가 돈을 벌어야지 아픈 엄마와 동생들을 보살필 수가 있었어, 마켓에서 캐쉬대를 찍거나 레스토랑에서 접시를 날라서는 어림도 없었지. 그래서 배운 것이 용접이었고 기계를 다루는 일이었지, 훨씬 수입이 많았거든. 친구들이 나를 철의 여인 Steel Woman이라고 부르는 이유야.”
매그놀리아는 아무렇지 않게 그녀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형편이 사실대로 좀 힘들다는 것이지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롱 보드 스케이트 클럽에서 쟈니 더 브레인을 만난 것은 행운이었어.”
내가 몸을 돌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층 더 성숙하게 보였다.
“이렇게 총격전을 벌이는 것이 행운이라고? 갱들과 싸움을 벌이는 것은 목숨이 열 개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이야.”
그녀가 웃었다. 처음으로 그녀의 웃음을 보았다. 예뻤다.
매그놀리아는 조끼에서 총을 꺼내 철컥하고 노리쇠를 당겼다. 그리고 클릭, 소리와 함께 탄창을 빼낸 후 엄지로 총알을 밀어내 앞으로 내밀었다.
“잘 봐.”
총알의 모양이 조금 이상했다. 총알은 구리 빛의 날렵한 유선형이어야 하는데 이 총알은 짙은 흑색의 고무 탄 같이 앞이 뭉툭했다.
“탄피는 진짜지만 총알은 진짜가 아니야. 총도 자세히 봐! 조금 조잡하고 가볍지 않아?”
“이게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쟈니 더 브레인은 천재야. 물론 집안도 부유하지. 이것은 그가 만든 사제 총과 총알이야. 지금까지 총격전에 사용된 총들은 전부 진짜가 아냐.”
그리고 매그놀리아가 내 등을 살짝 건드렸다.
“아~ ” 나는 짤막한 비명을 질렀다. 통증이 날카롭게 살갗을 찌르며 파고들었다.
“아프지? 진짜 총알이었다면 울프, 너는 여기 이 의자가 아니고 이미 병원 시체실에 누워 있어야 할 걸.”
“뭐야? 이게 모두 실제가 아니라고? 그럼 그놈들은 진짜 갱단이 아냐?”
“맞아, 그들은 진짜 갱단들이야.”
갑자기 모든 사실이 혼란스러워졌다.
“그럼 회사에 있는 3D 프린팅 머신으로…….”
“이제 머리가 좀 돌아가네. 권총, 총알 모두 쟈니 더 브레인의 작품이고 최근에 기관총까지 완성했어. 실제 총에 비해 내구성도 없고 정확도와 사격 거리도 형편없지만 총격전 게임을 하기에는 충분해. 가끔 오작동을 일으키는 것이 흠이지만 진짜 같은 스릴과 현실감을 느낄 수 있잖아. 울프, 너도 완전히 속았지?”
“그래도 위험해 보이는데 왜 이런 게임을 하는 거지?”
“울프, 너는 시카고를 몰라서 그래, 시카고에서 총은 장난감보다 더 흔해. 총을 만지면 쏘아보고 싶어지지. 인터넷에 널린 RPG 게임 MMORPG 게임은 모두 전쟁이나 총격전이고 재미는 있지만 현실감이 없어. 그래서 빠져드는 것이 페인트 볼 슈팅게임이지. 그것도 역시 제한된 곳에서 물감 총이나 쏘는 애들 장난이고, 한때 파이어 볼 슈팅게임도 유행했지만 그건 불꽃놀이이지 진짜 게임이 아니거든. 그러자 쟈니가 진짜 같은 총을 만들었지. 3D로 제작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해, 총알을 만드는 것이 훨씬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이었지. 마침내 우리는 실제 같은 총격전을 게임으로 즐길 수 있게 된 거고, 이것은 미친 듯이 퍼져나갔어. 모두 흥분했고 열광했지. 비밀스럽게 시카고의 전역에 퍼졌고. 게임은 점점 다양하게 변했지. 마침내 USC라는 이름으로 실제 전쟁 같은 길거리 총격전이 벌어지고 막대한 돈을 걸고 서로 싸우는 도박게임이 된 거야.”
"USC?"
"극한 총격 챔피언전 Ultimate Shooting Championship!"
나는 놀라운 이야기에 굉장한 흥미를 느끼고 귀를 기울였다.
“USC는 게임이라기보다는 전쟁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실전에 가까워. 마지막 한 팀이 살아남을 때까지 계속 진행되고 참가 팀이나 인원수는 제한이 없어. 룰이 있다면 반드시 해가 진 후부터 해가 뜰 때까지만 공격할 수 있고, 모두 쟈니가 만든 총과 총알을 사용하는 것이야.”
“그래도 위험한데 왜 하는 거야?”
“큰돈이 걸린 도박이거든, 상금이 무려 수십만 달러야.”
“누가 그 많은 돈을 내 거는 데?”
“게임을 즐기고 싶어 하는 중독자들이 내는 참가비지. 이 스트리트 슈팅게임에 한번 빠지면 그 짜릿한 스릴감은 그 어느 게임에서도 느낄 수 없는 쾌감이 있거든.”
처음 듣는 이야기 속으로 완전히 몰입해서 빠져들었다.
“매그놀리아도 쟈니와 한 팀이야?”
그녀는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조끼에 새겨진 마크를 가리켰다.
S. V. D. M.
“뭔지 알겠어? 세인트 밸런타인데이 매스커!”
“아하 그래서 발렌타인이라고 불렀구나? 그럼 이무지치도?”
“그들은 진짜 총격전 전문가들로 상금보다 게임을 즐기는 스트리트 슈팅 클럽이지, 갱단은 아냐.”
그녀의 설명으로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어. 평범한 젊은이들이 게임을 시작했지만 1년 전부터 시카고에 갱단들이 이 게임에 참가하기 시작했어. 상금이 대폭 늘어나기도 했지만 더 폭력적이고 실제 전쟁 같은 상황으로 치닫게 된 거지.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갱단을 조직화할 수 있고 동시에 단원들을 실제 총격전에 훈련시킬 수 있다는 목적에 최고의 방법을 찾은 것이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세력을 과시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변해버렸어.”
사태가 극도로 폭력적이고 심각해진 이유를 알았다.
“가장 큰 골치는 바로 불개미 군단으로 불리는 MD13 갱들이지. 폐병원에서 만난 MD13 의 단원도 이제 겨우 열세 넷 정도밖에 되지 않은 애들이었잖아. 지금은 게임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는데 모든 아마추어 팀들은 전멸했고 우리 발렌타인과 남부 서부 북부의 갱단들만 살아남았어.”
“시카고 경찰은 뭐해? 이걸 알아?”
“시카고 경찰은 총격전에 상관 안 해. 누군가 총상으로 죽어야만 그때 나와서 잠깐 조사할 뿐이지. 아마도 갱단들과 관계있는 나쁜 경찰들도 많을 거야. 우리도 경찰이 반갑지 않아. 모든 게 다 불법이잖아, 총기 제작도 불법이고 시가지에서 벌이는 총격전도 불법이고 도박도 불법이고…….”
“매그놀리아가 하지 않으면 되잖아.”
“나보고 여기에서 빠지라고?”
“울프, 그런 말 하지 말고 내 주변을 돌아봐. 엄마는 병으로 죽어가고 있고 동생은 시각장애자야. 수술비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비싸고 어린 동생까지 내가 보살피려면 돈이 필요 해. 나는 우리 가족이 길거리로 쫓겨나는 것을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거야.”
매그놀리아의 푸른 눈에 강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괜한 말이 그녀를 더 슬프게 한 것 같아 미안했다. 당차고 매력적이고 철의 여자라는 별명이 있는 여자가 되기까지 슬픈 사연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고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녀의 뺨이 내 얼굴에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스치고 올라와 내 입술에 머물렀다.
“어어, 언니! 사랑 만드는 거야?”
나와 매기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조금 열린 방문 사이로 매들린이 얼굴을 내밀고 배시시 웃고 있었다.
“너, 늦게까지 안 자면 이번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주지 않을 거야.
빨리 가서 자!”
매그놀리아가 소리쳤다.
이제 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매그놀리아와 헤어져야 한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각자의 삶에는 헤치고 나가야 할 험난한 문제들을 갖고 있다. 서로 다르지만 한 부분은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바로 생존해야 한다는 것! 매그놀리아가 더 어려운 처지에 있지만 나는 그녀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녀는 철의 여자이니까.
느닷없는 자동차 바퀴의 정지소리가 밤의 적막을 깼다.
그녀가 얼른 창가에 가서 창문 커튼을 슬쩍 들추어보더니 한 숨과 함께 내뱉었다.
“이런 젠장! 비겁한 글렌개리 자식이 당신과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 준 것 같아.”
두 대의 차가 집 앞에 멈추어 섰고 그중 한 대에서 글렌개리가 얼굴을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울프, 빨리 뒷문으로 나가. 나는 저들과 함께 가야 해.”
그녀의 생각이 옳다고 여겨졌다. 이제 모든 것이 스트리트 슈팅 게임이라는 것을 알게 됐지만 내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글렌개리는 나를 의심하고 있다. 서둘러서 트럭으로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일찍 시카고를 떠나는 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다. 배낭을 메고 부엌을 지나 뒷문을 열고 좁은 마당으로 나왔다. 그녀가 판자 벽 사이에 보이는 조그만 구멍을 가리켰다. 옆집으로 통하는 곳 같았다. 구멍 앞에서 뒤돌아 봤을 때는 그녀의 모습은 뒷문에서 이미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다시 그 갱들과 최후의 대격전을 벌이러 가겠지. 매그놀리아가 무사하길 바랐다.
작은 길을 빠져나와 가로등이 있는 주유소까지 한참을 걸어 나온 후에 택시를 탔다. 해질 무렵부터 겪은 모든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미국은 정말 알 수 없는 나라다. 무슨 일이 언제 어디에서 벌어질 것인지 예측할 수 없다. 시카고는 그 오명대로 총격전의 도시임을 확실하게 체험했다. 이제 시카고를 떠나는 일만 남았다.
트럭은 주차장 구석의 어둠 속에서 괴물처럼 서 있다. 언제 봐도 거대한 쇳덩어리는 강한 중압감을 준다. 내가 이 괴물을 끌고 대륙을 횡단한다는 사실은 10년이 지나도 놀랍다.
트럭에 올라타고 나니 집에라도 온 듯 편안함과 더불어 살아 있다는 안도감이 온몸에 전해와 피로감이 몰려왔다 시계는 새벽 2시를 가리켰다.
일단 포트에 물을 끓이고 커피를 탔다. 운전석에 앉았다. 뜨거운 커피가 몸속으로 흘러들어 가면서 카페인이 무기력해진 세포를 자극했다. 시동을 걸자 우르릉~, 400마력의 우람한 엔진 소리와 함께 거대한 괴물이 깨어났다. 나는 악몽 같은 꿈에서 현실로 깨어난 듯한 기분의 변화를 느꼈다.
어둠 속에서 회사 건물을 바라보았다. 3D 프린팅 머신에 대해 말하던 쟈니의 도전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을 떠올렸다.
‘고작 게임과 도박을 하려고 총을 만들다니…….’
그리고 철의 여인 매그놀리아의 미소를 상기했다.
이때 어둠 속에서 언뜻 그림자가 지나갔다. 이상했다. 지금 회사에는 아무도 없어야 할 텐데 누굴까?
미처 생각할 여유조차 없이 소스라치게 놀라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창문에 불쑥 나타난 시커먼 복면은 나를 기절초풍하게 만들었다. 검은 복면에서 하얀 눈이 부라리며 총을 들이댔다. 반대편 조수석 창문에도 비슷한 복면이 나타났다.
트럭 밖으로 끌려 나온 나는 시커먼 갱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검은 복면을 썼고 검은 조끼를 입었고 모두 무장했다. 그것이 진짜 총인지 쟈니가 만든 사제 총인지는 알 수 없다.
“이놈, 로코의 레스토랑에 있던 녀석이잖아. 내가 봤어!"
누군가가 손전등을 내 얼굴에 비추며 말했다.
"쟈니와 함께 있던 놈이야. 우릴 봤으니까 죽여서 물속에 처박아버려야 해!"
키 큰 한 남자가 검은 마스크를 벗었다. 징그러운 문신이 얼굴에서 꿈틀거렸다. 목에서 귀밑으로 666이란 숫자가 보였다. 손등과 팔뚝까지 빼곡하게 빈틈없이 문신으로 새겨져 있었다. 잔혹하기 이를 데 없다는 불개미 군단파가 언뜻 떠올랐다. 제대로 걸렸다는 불안함이 심장을 요동쳤다.
“넌 누구냐?”
그에게서 입에서 날카로운 쇳소리가 났다.
“트럭 운전사!”
말이 끝나기 전에 주먹이 날아와 복부를 강타했다. 극심한 통증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신음했다.
“운전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어. 너, 발렌타인 전사지? 거짓말하지 마! 네 노란 얼굴은 이미 제이케이 닥의 유튜브에 나왔어.”
내 머리카락을 잡고 얼굴을 치켜세운 녀석이 불빛을 비치며 호통을 쳤다. 로코의 레스토랑 앞에서 유튜버라며 카메라를 들고 있던 제이케이 닥이란 놈이 생각났다. 벌써 유튜브에 올렸으리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디바고! 이 놈을 어떻게 할까?”
문신의 사나이가 우두머리답게 냉정하고 침착했다.
“이놈은 지금 우리에게 딱 필요한 것을 갖고 있어.”
그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복면을 쓴 검은 그림자들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쟈니의 회사에서 가져온 상자들을 트럭에 옮겨 실었다. 그중 두 개를 열고 기관총을 꺼내 나누어 가졌다. 쟈니가 로코에게 보여준 그 새 자동 기관총과 같은 모델이었다. 그들이 트레일러에 나머지 나무상자를 옮겨 싣고 나자 십여 명의 모터사이클 부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트레일러 안으로 들어가 로프와 타이 스트랩으로 모터사이클을 고정시켰다. 모두 디바고란 문신의 사나이의 지휘 아래 신속하게 움직였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두 녀석이 기관총을 들고 트럭 뒤에 타고 디바고는 조수석에 앉은 다음 내게 짧게 명령했다.
“링컨 파크로 간다.”
그는 스스로 흡족한 듯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쟈니 더 브레인, 기다려라, 아주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안겨 주겠다. 흐흐흐.”
뒤에 탄 녀석들도 따라 웃었다. 나는 꼼짝없이 붙잡혀서 트럭을 운전하며 시카고 시내로 향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걸까? 이 스트리트 갱들의 전쟁에서 빠져나가기 직전에 진짜 갱단에게 붙잡혀 다시 끼어들게 되다니……. 오늘 밤, 나는 시카고의 전쟁터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을까? 할 수만 있다면 다리 위에서 방향을 바꾸어 트럭과 함께 미시간 호수 속으로라도 뛰어들고 싶었다.
스카이웨이 브리지에서 보이는 풍경은 흑과 백으로 확연히 나누어졌다. 시카고의 고층빌딩이 밀집된 야경은 화려한 빛으로 쏟아지는 별처럼 수를 놓고 있다. 나머지 반은 미시간 호수의 검은 물결은 주위의 모든 빛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암흑의 바다였다. 시카고의 스카이라인은 흑과 백이 만나 푸른빛을 띠고 있다.
불안한 마음으로 운전하는 나는 어떻게 도망을 칠 수 있을까 생각을 굴리기에 바빴다. 벨이 울리고 디바고가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상대는 영어가 아닌 말로 뭔가 전했다. 말없이 통화를 마친 디바고는 한 녀석에게 워키토키를 건네받아 명령했다.
“케네디 익스프레스 고가도로 아래 북부파의 오코너 상사가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서 웨스트 스트리트에서 멈추고 너희들은 애쉬랜드에서 공격한다. 모두 준비해, 우리가 이 트럭에 타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을 거다. 놈들에게 뜨거운 지옥의 불 맛을 보여줘라.”
드디어 스트리트 총격 전쟁이 또 시작된다. 이들이 남미 계통의 언어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악명 높다는 불개미 MD13 갱단이라고 짐작했다. 매그놀리아가 남부파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갱단이라고 말했다. 북부파는 오코너 상사가 보스이며 그는 해병대 전역자로 실제 전쟁을 겪은 베테랑이고 비교적 신사적이라고 했다.
고가도로 아래에서 벌어진 총격전은 싱거울 정도로 금방 끝이 났다. 연발 사격으로 쏟아내는 기관총의 위력 앞에 권총으로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트럭에서 달려나오는 모터사이클 부대는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오코너 상사가 탄 차는 정신없이 도주하고 미처 도망치지 못한 북부파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MD13 갱 단원들은 휘파람을 불고 괴성을 질렀다. 사뭇 기세가 등등했다.
“가자! 이제 발렌타인의 머리통을 박살 내자!”
“로코도 오늘은 운이 없는 날이 될 것이다. 놈들의 피를 보고 서부, 남부 놈들의 내장을 쏟아내게 하자!”
오늘이 USC의 최후 결전의 날이었다. 시카고 모든 갱단들이 집결하여 마지막 혈전이 벌어질 것이다. 나는 쟈니 더 브레인 발렌타인 전사의 매그놀리아가 링컨 파크에 없기를 빌었다. 그러나 철의 여인, 시카고의 여전사는 거기에 있을 것이다.
클라크 스트리트 남쪽으로 진입하자 왼쪽으로 링컨 파크가 보였다. 링컨 파크는 미시간 호수와 시카고 다운 타운 사이에 있는 넓은 공원으로 남북 9킬로미터나 되는 관광지로 동물원과 식물원이 맨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늘 같이 깊고 푸른 밤, 새벽 3시에는 아무도 없다. 아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요한 적막은 곧 대격전이 벌어질 것을 예고한다. 4개의 갱단 백여 명이 총격전을 하는 시카고는 바야흐로 전쟁지역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시카고의 새벽을 흔들어 깨울 것이다.
미시간 호숫가에 나란히 놓인 도로 위에 십여 대의 차량이 서행하며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고 어두운 공원의 나무 사이에 소리 없이 움직이는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도망친 줄 알았던 오코너 상사가 이끄는 북부파였다.
동서로 놓인 노스 애비뉴에는 서부파의 보스 블러드 엄지가 십여 명의 대원과 함께 트럭에 탄 채 링컨 파크에 접근 중이었다.
제일 먼저 총격전이 벌어진 곳은 북부파와 서부파가 만난 동상이 새워져 있는 지점이었다. 총소리를 시작으로 자동차가 질주하며 격전이 벌어졌다. 디바고의 모터사이클 부대가 진입하면서 양상은 크게 달라졌다. 신형 기관총의 위력은 강력했다. 시카고는 온통 총소리로 뒤흔들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어 오직 총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디바고가 양손을 뒤로 묶어놓고 발도 묶어놓아서 모로 누운 채 트럭 바닥에 꼼짝 못 하고 있었다. 굼벵이처럼 꿈틀거리며 내 배낭을 찾았다. 그 안에 스위스 주머니 칼을 꺼내기 위함이다. 칼만 있으면 손에 묶인 줄을 자를 수 있다. 묶여 있는 자세로는 좀처럼 배낭을 열기가 어려웠다. 손목이 쓰려오고 어깨에 쥐가 났다. 이때 누군가가 트럭에 올라타는 기척을 느꼈다. 숨을 죽인 채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울프? 안에 있어?”
SVDM 마크가 새겨진 조끼에 헬멧까지 쓴 완전 무장한 시카고의 여전사 철의 여자 매그놀리아가 나타났다.
“아! 매그놀리아!”
반가움의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데?”
내가 말하자 그녀가 웃었다.
“그 꼴로 누구를 걱정한다는 거야?”
“디바고가 기관총을 탈취했고 그걸로 쟈니와 발렌타인팀을 쓸어버리겠다고 해서 알려주고 싶었어.”
매그놀리아는 대답 대신 먼저 줄을 끊고 나를 풀어 주었다.
“알아, 울프가 걱정 안 해도 돼. 우리는 이미 정보를 받아서 알고 있어. 지금은 즉시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이 더 중요해. 당장 떠나. 몇 분 후면 주변의 모든 도로가 완전히 봉쇄될 거야.”
“매그놀리아!”
내가 진지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나랑 함께 가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나에게는 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 울프도 알잖아!”
그녀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려고?”
“우리가 시작한 게임이니까 우리가 끝내야지.”
“부디 조심해!”
누군가 트럭을 가볍게 두드리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매기! 가야 할 시간이야!”
그녀는 내 뺨에 살짝 입을 맞추고 일어섰다. 트럭 주위에 십여 명의 발렌타인 전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해드 랜턴이 달린 헬멧을 쓰고 스케이트 롱보드를 타고 있었다. 쟈니 더 브레인, 샘 네일 그리고 글렌개리가 보였다. 그들은 미끄러지듯 롱보드를 타고 링컨 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디바고를 추격할 것이다.
바야흐로 시카고는 전쟁터로 변했다. 총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총격전은 여러 팀이 뒤죽박죽 섞인 혼전이었다. 쟈니 더 브레인이 이끄는 발렌타인 전사들은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면서 기관총을 쏘아댔다. 거리를 좌우로 S자 곡선을 그리며 총격을 가하고, 롱보드 위에 앉은 자세로 정조준 사격을 하고, 번쩍 뛰어오르며 방향을 돌리며 총을 쏘는 발렌타인 전사들의 움직임은 황홀했다. 그들 중 유난히 우아한 자세로 날렵하게 움직이는 그녀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시카고의 여전사! 스틸 우먼! 매그놀리아! 롱보드 위에서 긴머리 휘날리며 미끄러지듯 달려나가는 여전사, 자동소총에서 불을 뿜어내며 춤추는 그녀는 아름다운 시카고의 철의 여인. 툼 레이더의 라라 크로프트가 실제 환생한다면 바로 저 모습일 것이리라!
발렌타인 전사들은 시카고의 오래된 다운타운 쪽으로 달리며 좌우로 사격하며 전진했다. 그들의 모습이 링컨 파크의 어두운 숲 속으로 사라지자 나도 비로소 트럭을 출발했다.
I 90 익스프레스 웨이를 가기 위해 천천히 운전하는 도중에 수십 대의 경찰차와 기동타격대가 링컨 파크 쪽으로 질주하는 것을 보았다. 매그놀리아가 곧 길이 봉쇄될 것이라고 한 의미를 알았다.
한편으로 매그놀리아와 쟈니는 어떻게 빠져나올지 걱정이 됐다. 이내 그들이 쓰고 있는 헬멧에 헤드랜턴이 장착되어 있었음을 기억해내고 안심했다. 글렌개리는 시카고의 지하 터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경찰과 기동타격대가 전면적으로 출동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차로 움직이지 않고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 지금쯤 워터 타워 앞에 도착했을 것이다.
하이웨이에 올라서자 단숨에 인디아나주를 지나 미시간 주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어느덧 검푸른 하늘을 헤치며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트럭은 눈부시게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질주했다.
Chicago Is War Zone
시카고는 전쟁지역
오늘 새벽, 시카고에서 대규모 시가지 총격전
갱단끼리의 세력다툼으로 시가지 총격전
경찰차 120대 기동타격대 40명 경찰 인원 300명이 동원된 대규모 진압
남부파와 불개미파로 알려진 MD13파 등 보스인 디바고를 포함한 갱단 멤버 80여 명을 일망타진. 폭력 및 살인 미수 마약 및 대량 불법 무기 소지혐의로 구속
나는 인터넷으로 모든 뉴스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뉴스는 온통 시카고 시가지 총격전 사건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러아 어딘가 이상했다. 대규모 총격전이라고 했는데 사상자 수는 밝히지 않았다. 매그놀리아나 글렌개리는 물론 쟈니 더 브레인이나 오코너 상사, 더 럭키맨 로코 루치아노등의 이름들은 아예 언급하지도 않았다. 물론 트럭 운전사에 대한 이야기도 없었다. 가장 중요한 사실, 총격전에 사용된 무기들이 3D 프린팅 기술로 제작된 사제 총이라거나 고무총알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경찰이 갱단을 체포하기 위해 오랫동안 조직에 위장 침투하고 있었던 한 용감한 경찰의 공로가 컸다는 말은 있었다. 나는 글랜개리의 미소를 떠올렸다.
에필로그
아직도 인터넷 유튜브에는 내 얼굴이 떠돌아다닌다. 비록 어두운 화면에 짧은 클립이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쉽게 알아볼 수 있다. 그 유튜버의 영상을 찾아보면 스트리트 슈팅 게임 장면이 계속 올라왔다. 이 영상들은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는 중이다. 이 극한 총격 챔피언전 Ultimate Shooting Championship은 시카고뿐 아니라 뉴욕, 엘에이등, 전 아메리카 대륙에 무서운 속도로 퍼지며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곧 세계는 USC 열풍으로 새로운 전쟁게임이 벌어질 것이다.
며칠 전, 나에게 한 장의 초대장이 도착했다.
MR. Wolf
You are Invited to the Ultimate Street Shooting Championship
S. V. D. M
from Iron Woman
울프, 당신을 극한 총격 챔피언 전에 초대합니다.
세인트 발렌타인 데이 전사
철의여인으로부터
곧게 뻗은 네브래스카 평원의 하이웨이를 달리는 기분은 아주 상쾌했다. 나는 트럭 창문을 열고 초대장을 밖으로 날려 보냈다. 초대장은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갔다. 대륙을 횡단하는 트럭 운전은 힘들어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언제나 그랬듯이 기대하지 않았던 모험이 하이웨이 저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시카고의 여전사, 철의 여인 매그놀리아의 살짝 스치기만 한 달콤한 입술을 기억하며 미소 지었다. 동시에 등에 맞았던 고무총탄의 아픔도 되살아났다.
이번엔 로맨틱하고 정열적인 모험이 기다리고 있기를 기대하며 달린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어떤 여인을 만날까?
시카고의 여전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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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휴~ 진짜ㄴ줄 알았네 ㅎ
나는 폭력이 싫어.
육체적 뿐 아니라 정신적 언어적 폭력도 반대하는데
요즘 세상은 영화 소설은 물론 뉴스마저도 폭력을 조장하는 것 같아.
캐나다에서도 총격전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서 사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써 본 이야기.
읽어줘서 고마워!
·초반에 갑자기 왠 3D프린터? 했더니...ㅎ
요즘 한국 드라마는 기본적인 복선도 안깔아....
·갱영화 같은 것을 보면 "네 똥구멍에 쳐박는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더라고 ㅎㅎ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는 옛 병원건물로 가자고 했을 때)
나는 펄쩍 뛰듯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 내 심장은 팔딱팔딱 잘 뛰고 있어. 그러니까 병원 갈 필요 없어. 그리고 아직 정기검진할 때도 아냐."
나는 이런 영어식 유머를 좋아하는데....
영어권 사람들은 일상에서도 이런 유머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인지? 아니면 영화 대사, 방송, 정치인, 셀럽 들이나 하는지?
·본문에 “나는 망치가 못돼서 못일세.”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
그 구절을 보며 문득 Simon & Garfunkel 의 El Condor Pasa 가사 중에
I'd rather be a sparrow than a snail....
I'd rather be a hammer than a nail....이 생각나더라고....ㅎ
고등학교 때부터 궁금했는데....
그냥 '먹고 먹히는 관계, 때리고 맞는 관계, 강자와 약자? 능동과 수동?'의 의미에 그치지 않을 것 같은디~
공감하는 부분이 많은 것을 보며 감성코드가 잘 맞는다는 생각이...
한국식 언어유희보다 아메리카는 영어식 유머를 더 좋아 해
스탠드업 코미디를 즐겨 보는데 반은 이해 못하는데도 재미있더라고.
hammer than a nail ... 언제나 생각나는 가사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