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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敎文化財 둘러보기 (5-1) 서울·京畿地方 (6-3) 國立中央博物館 (1)
國立中央博物館
1909년 11월 昌慶宮 帝室博物館 開館이 始初이다. 1915년 朝鮮總督府 博物館開館, 1945년
德壽宮 石造殿 건물에 國立博物館으로 開館했다. 1953년 還都 以後 잠시 南山分館에서 머무르다
1954년 德壽宮 石造殿으로 移轉했다. 1972년 7월 國立中央博物館으로 이름을 바꾸고, 8월
景福宮에 博物館을 신축하여 擴張·移轉하고, 1986년 옛 中央廳 建物로 移轉했으나 中央廳建物의
撤去로 1996년 景福宮 內 社會敎育館을 增·改築해 개관했다. 2004년 10월까지 景福宮에서
운영하다가 2005년 10월 龍山家族公園(옛 陸軍本部) 內의 新築建物에서 開館했다.
展示는 크게 常設展示와 企劃·特別展示로 구성되었다. 常設展示館銀 1층은 先史·古代館과
中·近世館, 2층은 書畵館과 寄贈館, 3층은 彫刻·工藝館과 아시아館으로 구성되었으며,
企劃展示室과 野外에는 石造物庭園이 있다.
國立中央博物館 展示 佛敎文化財 (拔萃)
(01) 金銅 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78호
-三國時代 6세기 後半 -재료; 金銅 -높이 83.2cm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菩薩像으로, 머리에는 화려한 冠을 쓰고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豊滿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가 나오고 입가를 들어가게 해 微笑 띤 얼굴이다. 上體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下體는 優雅한 曲線美를 느낄 수 있다. 전체적으로 彈力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律動的인 優雅한 모습이다.
양 어깨를 감싼 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 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交叉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전체적으로 均衡 잡힌
姿勢, 아름다운 옷주름, 冥想에 잠긴 듯한 奧妙한 얼굴 등으로 보아 韓國的 菩薩像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보인다. (*奧: 깊을 오)
(02) 金銅 彌勒菩薩半跏思惟像 -국보 제82호-
-삼국시대 7세기 前半 -재료; 金銅 -높이 93.5cm
머리에 3면이 둥근 山 모양의 冠을 쓰고 있어 ‘三山半跏思惟像’이라도 한다.
얼굴은 거의 圓形에 가깝게 豊滿하고 눈두덩과 입가에 微笑를 풍기고 있다.
上體에는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으며 옷도 걸치지 않았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臺座를 밟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었다.
왼손으로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單純하면서 균형 잡힌 身體 表現과 자연스러우면서 立體的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精巧한 彫刻品으로 완벽한 鑄造技術을
보여주고 있다. 잔잔한 微笑의 慈悲로움은 우수한 宗敎彫刻으로서의 崇高美를 더해준다.
(03) 국보 78호(왼쪽)-국보 83호 金銅 彌勒菩薩半跏思惟像이 나란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作品을 交代로 展示해 같이 보기 어려운데, 2015.11월 特別殿
[간다라에서 서라벌까지]에서 나란히 展示되어 두 작품을 함께 볼 수 있었다.
(04) ‘延嘉七年’銘 金銅佛立像 -국보 제119호-
-高句麗 -539년 -전체높이 16.2㎝ -1963년 慶南 宜寧에서 發見
光背 뒷면에 4行 47字의 楷書體 銘文에 따르면 平壤 東寺의 승려들이 千佛을 만들어 세상에
널리 퍼뜨리고자 만들었던 불상 가운데 29번째 것으로 高句麗 佛像이 옛 新羅地域인
慶南 宜寧에서 발견된 점이 주목된다. 정수리 부근에는 큼직한 상투모양의 肉髻가 있으며,
얼굴은 비교적 작은데, 살이 빠져 길쭉한 가운데 미소를 풍기고 있다.
두꺼운 옷에 싸인 신체는 굴곡이 없으나 體軀와 약간 보이는 어깨의 골격 등에서 강인한
힘을 느끼게 한다. 光背의 일부분이 손상되었으나 鍍金도 완전히 남아 있는 희귀한 佛像으로,
광배 뒷면의 銘文과 강렬한 느낌을 주는 표현방법 등으로 보아 6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高句麗 佛像으로 보인다. (*髻: 상투 계)
(05) 百濟 金銅 大香爐 -국보 제287호
-百濟 6~7세기 -忠南 扶餘 陵山里 절터 出土
-높이 61.8㎝, 무게 11.8㎏의 大形香爐 -국립부여박물관 所藏(複製)
佛殿에서 香을 피우는 香爐로, 百濟時代 王室무덤에 제사 지내는 陵山里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전체적으로 龍 한 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듯한 모양으로 꽃봉오리
가운데가 분리되어 몸체와 뚜껑으로 나누어 진다. 不老長生의 神仙들이 살고 있는
神仙世界가 理想的으로 표현된 三神山 위에 날개를 활짝 편 鳳凰이 서있다.
中國 漢나라 博山香爐의 영향을 받은 듯 하나, 중국과 달리 山이 立體的이며, 동물과
人物像을 寫實的으로 표현했다. 百濟時代의 創意性과 뛰어난 造形性을 바탕으로
당시 道敎와 佛敎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 工藝技術 및 美術文化를 종합적으로 파악하게
해주는 百濟 金屬工藝 최고의 걸작품이다.
(06) 敬天寺 十層石塔 -국보 제86호
-高麗 忠穆王 1년(1345) –상설전시관 1층 로비 –재료; 大理石
敬天寺는 京畿 開豊郡 光德面 扶蘇山에 있던 절로, 高麗時代 前期에 창건했으며,
절터에 세웠던 이 탑은 日帝强占期에 日本으로 無斷 搬出되었던 것을 돌려 받아
1960년 景福宮에 移建했다가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했다.
3段의 基壇은 平面이 ‘亞’字形이며, 10층의 높은 塔身 역시 3층까지는 ‘亞’字形이나,
4층부터는 정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基壇과 塔身 側面에는 화려한 彫刻이 가득 차 있는데,
부처, 보살, 풀꽃무늬 등을 뛰어난 彫刻手法으로 새겼다.
탑 1층 몸돌에 高麗 忠穆王 4년(1348)에 세웠다는 기록으로 建立年代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새로운 樣式의 石塔이 많이 출현했던 高麗時代에서도 특수한 형태를
자랑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균형과 세부적인 彫刻手法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자태이다.
지붕돌의 처마가 목조건축의 構造를 나타내고 있어 당시의 建築樣式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이러한 양식은 朝鮮時代에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2호)에 영향을 주었다.
(07) 堤川 月光寺址 圓朗禪師塔碑 -보물 제360호
-新羅 眞聖女王 4년(890) 건립 -전체높이 3.95m, 너비 97㎝, 두께 24㎝.
忠北 堤川郡 寒水面 月光寺터에 전해오던 塔碑로, 1922년 景福宮으로 移建,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1층 로비에 전시한 統一新羅 後期의 승려 圓朗禪師의 행적을 기록한
塔碑이다.
圓朗禪師(816∼883)는 文聖王 18년(856) 唐나라에 유학하며 11년간 名山을 두루
돌아다니다 歸國한 뒤 月光寺에 머물렀다. 68세로 入寂하자 ‘圓朗禪師’라고 追諡하고
‘大寶光禪’이라는 塔銘을 내렸다. 碑文은 文臣 金穎이 짓고 글씨는 승려 書藝家 淳蒙이
歐陽詢體의 楷書로 썼다. 현재 月光寺 터에는 塔의 部材 일부만 남아 있다.
(*穎: 이삭 영 *諡: 시호 시 *詢: 물을 순)
전체적으로 塔碑의 머리·몸·받침 각 부분의 比例가 훌륭한 碑로, 端雅하면서 安定된
느낌의 塔碑는 眞聖女王 4년(890)에 세웠다.
(08) 驪州 高達寺址 雙獅子 石燈 -보물 제282호
-高麗時代 10세기경 -石燈높이; 2.43m
京畿 驪州市 北內面 高達寺터에 남아 있는 높이 4.3m의 高麗時代 石燈으로, 高達寺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59년 景福宮으로 옮겼으며,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高達寺는 統一新羅 景德王 23년(764)에 創建했으며, 高麗 光宗 이후에는 王들의 보호를
받아 큰 寺刹로 면모를 유지하기도 했으나, 朝鮮時代에 廢寺된 것으로 보인다.
高達寺에는 石造文化財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모두 高達이라는 石工이 만들었다고 한다.
高達은 家族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寺刹을 이루는 데에 渾身을 바치고, 完工 後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으며, 훗날 道를 이루어 큰스님이 되니, 高達寺라고
불렀다는 傳說이 있다.
石燈은 火舍石까지만 남아있었으나, 2000년 京畿道의 發掘調査에서 지붕돌이
출토되었으며, 받침돌에는 구름무늬를 陽刻하고, 火舍石은 4면에 창을 뚫었다.
우리나라 雙獅子石燈의 獅子는 대부분 서있는데, 이 석등은 웅크리고 앉은 모습이
特異하며, 彫刻手法 등으로 보아 高麗前期인 10세기경에 만든 것으로 보인다.
(09)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왼쪽) -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慶州 甘山寺 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
-新羅 聖德王 18년(719) -石造佛像 -높이 1.83m
慶州에 있는 甘山寺는 新羅 聖德王 18년(719) 重阿飡 金志誠이 父母의 冥福을 빌고,
國王과 王族의 안녕을 祈願하며 창건한 사찰이다. 창건한 해에 그는 어머니를 위해
彌勒菩薩을, 아버지를 위해 阿彌陀佛을 만들었다고 한다. 石造彌勒菩薩立像은 화려하게
장식된 冠을 쓰고 있으며, 얼굴은 볼이 통통하여 원만한 인상이다. 光背 뒷면에는
聖德王 18년(719)에 佛像을 조각했다는 銘文이 있어 만든 시기와 유래를 알 수 있다.
돌로 만들었어도 풍만한 신체를 寫實的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어 統一新羅時代부터
유행하는 國際的인 樣式을 잘 보여주고 있다. (*飡: 먹을 찬)
=慶州 甘山寺 石造阿彌陀如來立像 –국보 제82호
-新羅 聖德王 18년(719) -石造佛像 -높이 1.74m
重阿飡 金志誠이 新羅 聖德王 18년(719)에 아버지를 위해 만든 阿彌陀佛이다.
石造阿彌陀如來立像은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人體比例에 가깝고, 얼굴은
풍만하고 눈·코·입의 細部表現도 세련되어 新羅人의 얼굴을 寫實的으로 묘사하고 있다.
佛身 뒤의 光背는 배[舟] 모양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새겼다.
통일신라시대의 理想的 寫實主義 양식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例일 뿐만 아니라, 光背 뒤의
記錄으로 製作時期와 製作者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佛像으로 우리나라 佛敎 彫刻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10) 서울 三陽洞 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127호
1967년 서울 道峰區 三陽洞에서 발견된 높이 20.7㎝의 보살상으로, 삼각형의 冠을 쓰고,
量感 있는 얼굴은 원만해 보이며,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上體는 어깨가 좁아
위축된 모양이며,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
오른손은 허리 근처에서 淨甁을 들고 있으며, 왼손은 위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V자형으로
곧게 펴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臺座에는 엎어 놓은 연꽃무늬를 새겼으며, 꽃잎은
끝이 뾰족하여 보살상의 부드러움과 대비된다. 살찐 얼굴과 身體, U字形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7세기 전반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三國時代 後期에 유행했던
觀音信仰의 斷面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甁: 병 병)
(11) 楊平 新花里 金銅如來立像 -국보 제186호
1976년 京畿 楊平郡 江上面 新花里에서 農地를 정리하던 중에 우연히 발견된
높이 30㎝의 불상으로, 이곳에서 기와조각 등 遺物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전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佛像은 臺座와 光背를 잃었으나, 보존상태가 좋고 鍍金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얼굴은 길고 둥글어 풍만한 느낌을 주며, 목은 길고 굵으며, 얼굴에
비해 몸이 매우 길어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양 손가락이 없어진 상태여서 정확한
손 모양은 알 수 없으나,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손끝이 땅을 향하여
손바닥을 보이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묵직하고 단순한 圓筒形의 몸체, 간결한
U자형의 주름은 中國 隋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당시 新羅가 점령하고 있던
漢江流域에서 출토되어 新羅時代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12)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국보 80호) (왼쪽) -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국보 79호)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 -국보 제80호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국보 37호)에 안치된 舍利函 안에서 발견된 佛像이다.
높이 14㎝의 순금으로 만든 불상으로 臺座와 光背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민머리 위에는
肉髻가 큼직하게 솟아 있고, 갸름한 얼굴은 量感있고 慈悲로우며, 눈은 정면을 바라보고,
콧날은 날카롭고 입가에는 微笑가 번져 있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光背는
머리 뒤에 圓形으로 표현했는데, 불꽃무늬에 둘러싸여 전체적으로 寶珠形을 띈다.
머리와 신체의 적당한 비례, 옷주름의 모양 등을 볼 때, 三國時代 後期의 佛像에서 발전한
統一新羅 初期의 새로운 양식의 佛像으로 보인다. 舍利函의 銘文을 통해 692년에 탑을
건립할 때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佛像으로 제작 년대가 거의 확실해 統一新羅時代
佛像硏究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坐像 -국보 제79호
1942년 慶州 皇福寺址 三層石塔(국보 37호) 解體修理工事 때 나온 舍利函에서 慶州
九黃洞 金製如來立像(국보 제80호)과 함께 발견되었다. 舍利函의 銘文에 통일신라
聖德王 5년(706) 純金으로 된 阿彌陀像을 舍利函에 넣었다고 하는데 이 佛像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으나 크기가 6치[寸]라고 기록했는데, 이 佛像은 12.2㎝로 4치도 되지 않아
의문이 간다. 미소 띤 얼굴에 뚜렷한 耳目口鼻와 균형 잡힌 몸매를 지녀 더욱 위엄 있게
보이는 불상으로 손 모양이나 옷주름, 量感이 강조된 표현 등에서 8世紀初 佛像의 양식과
성격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13) 河南 下司倉洞 鐵造釋迦如來坐像 -보물 제332호
京畿 河南市 春宮洞의 廢寺址에서 발견된 鐵佛坐像으로 얼굴은 둥글고 치켜 올라간 눈,
꼭 다문 작은 입, 날카로운 코의 표현에서 관념적으로 변해가는 高麗時代 佛像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당당한 어깨와 두드러진 가슴은 石窟庵 本尊佛의 樣式을 이어 받은 것이며,
날카로운 얼굴 인상과 간결한 옷주름의 표현은 高麗初期 佛像의 전형적인 표현기법이다.
新羅佛像 樣式을 충실하게 계승한 高麗 初의 傑作品이다.
(14) 聖居山 天興寺銘 銅鐘 -국보 제280호
國內에 있는 高麗時代 鐘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높이 1.33m, 입구지름 96cm이다.
如意珠를 물고 있는 모습의 龍鈕는 新羅 鐘의 龍보다 고개를 쳐 들어 올린 모습을 하고 있다.
龍鈕 뒤에 붙은 音筒은 대나무 모양이며, 扁平한 부분인 天板 가장자리에는 연꽃무늬를
돌렸다. 撞座 사이에는 2具의 飛天像을 두었는데, 1구씩 對角線上에 배치하여 新羅 鐘과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쪽의 蓮郭 바로 아래로 位牌形의 틀 속에 陽刻 銘文은,
統和 28년, 高麗 顯宗 元年(1010) 天安 聖居山 天興寺用으로 鑄造한 鐘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鈕: 인꼭지 뉴 *撞: 칠 당)
현재 국내에 있는 新羅 上院寺 銅鍾(국보 제36호), 聖德大王神鍾(국보 제29호) 다음으로
크면서도 製作技法이나 樣式이 高麗梵鐘을 대표하는 종이라고 할 수 있다.
(15) 金銅藥師如來立像 -보물 제328호
높이 29㎝의 자그마한 金銅佛로, 光背와 臺座는 없어졌으나 비교적 잘 보존된
藥師如來立像이다. 藥師如來는 모든 衆生의 疾病을 救濟해준다는 부처로 손에 藥盒을
들고 있다. 풍만한 얼굴은 미소 없이 근엄한 인상이며 눈·코·입의 선이 명확하고 치밀하여
세련된 彫刻美가 느껴진다. 두 귀는 어깨에 닿을 듯 길게 표현되었고, 목에는 3줄의
주름인 三道가 뚜렷하다. 오른손은 허리 아래로 내려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을 맞대고
있고, 왼손에는 藥 항아리를 들고 있다. 높다란 머리묶음과 얼굴 표정 등이
慶州 栢栗寺 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제28호)과 비슷해 8세기 前後에 제작한 작품으로
보고 있다. (*盒: 합 합 *栢: 측백 백)
(16) 金銅 彌勒菩薩 半跏思惟像 -보물 제331호
왼다리를 내리고 걸터앉아서 오른손을 들어 두 손가락을 살짝 뺨에 대고 생각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彌勒菩薩像이다. 긴 얼굴은 눈꼬리가 치켜 올라가고 미소가 없는
靜的인 표정이다. 머리는 평평하고 그 위에 높은 肉髻가, 가늘고 긴 몸은 양 어깨와
양 팔에만 옷을 살짝 걸치고 있으며, 옷주름은 단순하면서 圖式的으로 표현했다.
4각형의 臺座에는 마름모꼴 文樣이 1면에 2개씩 뚫려 있는데 臺座의 이런 모양은
우리나라 金銅佛에서는 보기 드문 例이다. 彫刻手法이 線과 面의 구분이 분명하고 세련된
모습이며, 出土地가 분명하지 않으나 二重의 구슬장식과 가운데가 솟아오른 연꽃의
형식 등으로 보아 三國時代後期 作品으로 보고 있다.
(17) 扶餘 軍守里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329호
1936년 忠南 扶餘邑 軍守里의 百濟 절터를 조사할 때 발견된 佛像으로, 곱돌로 만들었으며
4각형의 높은 臺座 위에 앉아 있는 百濟 特有의 佛像이다. 네모난 얼굴은 두 볼에 웃음이
가득하고, 지그시 감은 눈, 넓은 코, 미소 띈 입 등에서 부드럽고 온화한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두터운 옷자락에 싸여 몸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는 점, 좁아진 어깨, 두 손을 배 앞에서 모아
깍지를 낀 端雅한 손 모양 등에서 옛 手法을 잘 간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佛像은 형식과 자세로 보아 4~5세기 中國佛像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으나 얼굴 모습이나
신체의 표현 등 세부모습에서 百濟化된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完熟한 6세기 중엽
百濟佛像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18) 石造地藏菩薩坐像 -보물 제1327호
머리에 두건을 쓴 地藏菩薩像으로 바위모양의 臺座에 앉아 있으며, 전체 높이 33.4㎝ 정도의
작은 佛像으로 몸체는 두껍게 鍍金하고 臺座는 붉은 빛이 도는 칠을 했다.
조선시대 佛敎彫刻品으로는 드문 小形石造像이며, 특이한 바위모양의 臺座 뒷면에는
佛像造成背景 및 施主者와 제작자, 製作 年代를 밝혀주는 49字의 銘文이 있다.
朝鮮 中宗 10년(1515) 제작한 石造地藏菩薩坐像으로 각 부분의 표현이 간략하나 時代的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 형태가 잘 보존되어 있고 造成背景이나 年代가 확실하여 중
요한 가치가 있다.
(19) 感恩寺址 東三層石塔 舍利莊嚴具 -보물 제1359호
慶北 慶州市 陽北面 感恩寺 터에 있는 慶州 感恩寺址 東·西 三層石塔(국보 112호)의 동쪽
석탑을 1996년에 해체·수리하면서 발견된 一括遺物 중 舍利 一括品이다.
1959년에 발견된 感恩寺址 西三層石塔 舍利莊嚴具(보물 366호) 靑銅製舍利器와 구조가
비슷하며, 바깥을 감싸고 있는 外函과 안쪽의 舍利器, 舍利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外函의 네 壁面에는 舍利를 수호하는 四天王像을 표현했으며, 사천왕상 주변에는
구름무늬를 새기고, 좌우에는 귀신의 얼굴 모양을 새긴 고리를 배치했으며, 사리를 모셔 둔
內函은 基壇部, 몸체, 天蓋의 3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水晶으로 만든 舍利甁은
높이 3.65cm이며, 이 사리기 세트는 製作技法이나 遺物 形態로 볼 때 통일신라시대
工藝技術의 精粹를 보여주는 것으로 佛敎彫刻史와 工藝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20) 金銅 觀音菩薩坐像 -高麗 14세기
갸름한 얼굴에 화려한 장식으로 뒤덮인 身體 등에서 라마(Lama) 佛像樣式의 영향이
엿보인다. 跏趺坐한 자세에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그 위에 오른팔을 자연스럽게
올려놓은 뒤 왼손으로 바닥을 짚는 輪王坐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원래 輪王坐는 印度神話에서는 理想的인 帝王인 轉輪聖王이 취하는 자세이다.
(*跏: 책상다리할 가 *趺: 책상다리할 부)
(21) 鐵佛 -統一新羅 8~9세기
忠南 瑞山 普願寺 터에서 傳한다는 統一新羅時代 8~9세기의 鐵佛이다.
(22) 石造 毘盧遮那佛 坐像 -統一新羅 9세기
毘盧遮那佛은 온 누리에 가득 찬 眞理의 빛을 形象化한 부처이다. 우리나라에서
毘盧遮那佛像은 8세기에 등장하여 9세기에 크게 유행했는데, 中國이나 日本과는 다르게
寶冠을 쓰지 않은 부처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손갖춤[手印]은 한쪽 손으로 반대편 손가락을 감싸 쥔 智拳印을 하고 있다.
이 비로자나불상은 얼굴이 동그랗고 表情이 현실적이며, 身體는 鈍重하고 옷주름은
계단모양으로 규칙적이다. 화려하고 생동감 넘치는 光背와 臺座는
統一新羅 後半期 石佛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3) 鐵造 毘盧遮那佛 坐像 -統一新羅 末~高麗 初
우리나라에서 9세기에 크게 流行한 비로자나불은 中國이나 日本과는 다르게
如來[부처를 부르는 다른 말로, 진리의 體現者(涅槃에 다다른 者)라는 뜻]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端正한 얼굴, 安靜感 있는 자세, 표면에 이음새가 보이지 않는
뛰어난 鑄造技術 등에서 統一新羅 佛像의 전통이 엿보인다. 그러나 形式化된 옷주름 등
세부표현에서는 寫實性이 떨어지는 高麗 鐵佛의 특징도 함께 나타나고 있어
統一新羅 末~高麗 初에 제작한 佛像으로 보인다.
(24) 石造 佛頭 -統一新羅 8~9세기
(25) 鐵造 佛頭 -高麗 10세기
(26) 鐵造 佛頭 -高麗 10세기
(27)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 -국보 제2호 (사진)
서울·京畿地方의 서울 탑골공원 (04) 서울 圓覺寺址 十層石塔(국보 제2호)에
설명했으나 風化作用 방지를 위해 遮斷幕을 설치하여 塔을 제대로 볼 수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사진을 올린다.
-佛敎文化財 둘러보기 (5-1) 서울·京畿地方 (6-4) 서울(4) 國立中央博物館(2)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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