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이 영 주
하루 밤만 자고 나면 셋째 아들의 결혼식이다.
그 아이에게는 축복의 시간이 되겠지만,
우리 부부의 가슴속에는 31년 간 항상 응어리 져 왔던
세월의 아픔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눈물의 시간이다.
훈이가 태어나던 시절에는 산아제한이라는 단어가 항상
입에 오르내리던 때였다.
예비군 훈련을 가면 정관수술을 권하는 강의로 가끔씩
교육을 대체하곤 해서 산아제한을 실천한 사람은
집으로 보내줄 정도였다.
2명이상 자식을 낳으면 미개인 취급을 받던 때라
“아들 딸 구별 말고, 둘 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가 나의 머리를 항상 짓누르고 있었다.
그 무렵, 아내가 덥석 아이를 갖고 말았다.
우리 부부는 할 수없이 낙태수술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한 달 쯤 뒤 다시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서
병원을 찾으니 예상대로 임신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몇 번이나 반복해서 병원 출입을 한 것 같은데,
가는 병원마다
“선생님 축하합니다. 부인께서 임신 4개월 이십니다.”라는
인사를 받았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고심 끝에 나는 산부인과 병동을 나오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 여보, 할 수없이 아이를 낳읍시다.
이러다가는 당신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우리의 생각이 관철되지 않으니 이 애의 운명일지도 모르잖소.
생명을 거절하는 것도 우리의 죄가 될 수 있지 않겠소.”
그렇게 결심하고 부모님께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했더니
무척 좋아하셨다.
아내는 평소 다니던 산부인과가 있었다.
그러나 10달 후 산통이 느껴지자 병원으로 가는 도중
차내 출산을 염려해
길가의 조그마한 조산원을 찾아 출산을 했다.
체중은 작았지만 예정일 보다 3개월이나 빨리 태어난 셈이었다.
처음엔 별 이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커 가면서 잘 걷지를 못했다.
병원에서는 뇌성마비 2급 이라는 판정을 내렸다.
우리부부의 웃음은 그때부터사라지고 말았다.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한 아이 때문에 약과 약탕기를 늘 달고
살아야 했으며, 용하다는 무속인, 효험 있다는
종교단체들을 숱하게 찾아다녀야 했다.
그렇게 기른 아이를 특수학교인 동원학교에서
1년 수업을 받게 한 뒤
잘 적응을 하는 것 같아 정상인이 다니는 초등학교로 옮겼다.
아내는 아이를 돌봐야 했으므로 학교에서 살다시피 했다.
훈이가 1학년 되었을 여름 즈음이다.
평소 수업시간이 끝날 때면 아내가 아이를 데리러 가곤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내가 가고 싶었다.
수업시간이 약30분이나 남아있어서 천천히 교문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조용한 운동장 저편에 뭔가
사람이 보이는 것 같았다.
직감이 이상하여 걸어가 보니 훈이가 걸어 나오는게 아닌가.
전날 비가 왔으므로 진 흙탕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그만 힘에 부쳤는지 쓰러져있는 것이 보였다.
그날은 하루에 3시간씩 수업을 하던 것을 2시간 하고는
선생님이 세미나를 가시면서 미처
우리에게 연락을 못했던 것이다.
우리부부는 훈이를 집에 데려와 몸을 씻기면서 한없이 울었다.
그 뒤로 2번에 거친 다리 수술을 받았지만 완전하지는 못했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느 가수의 노래가사처럼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나와 아내였다.
나는 틈만 나면 술로 마음을 위로하다가
결국 뇌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열흘 만에 깨어난 후 몇 개월간 병마와 싸워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 한쪽 귀퉁이에 난 짧은 글을 읽게 되었다.
독자가 자동차를 몰며 방송을 듣다가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을 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쓴 글이다.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 어느 여인이 훌륭한 남편을 만나서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장애아를 낳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 괴로움을 신앙의 힘으로 견디어 내려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도 이어 장애아를 낳은 것이다.
여인은 더 이상 살아 갈 희망이 없어서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자신이 의지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데
어디선가 그녀에게 용기를 주는 음성이 들려왔다.
“애야,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 세상에서 너희 세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서 그 아이들을 네게 맡겼단다.
네가 포기하면 이 애들을 어디에도 맡길 사람이 없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그 여인은 “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인정하는구나,
이 아이들은 나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구나”
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이 글을 보는 순간 나는 마음에 뜨거운 힘이 솟아올라서
훈이도 우리 부부에게 주신 선물일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 뒤 술을 끊고 희망을 줄 수 있는 책과 말을 들려주면서
아이가 장애를 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등교시간에 맞춰 학교로 데려다 주면 하교 시에는 혼자서
걸어서 오게 하였더니 잘 따라 주었다.
그 이후 자전거도 타고, 자동차면허도 따게 되었다.
정상인과는 조금 다른 걸음걸이 때문에 보는 사람이
불편할 수는 있지만,
정작 본인은 불편 없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지금 훈이는 대한민국의 국가공무원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때부터 한 반이었던 여자 친구를 만나
대학까지 같이 다니며 사귀더니 서른 살 되어
우리부부에게 건강한 손주를 선물로 안겨주었다.
이제 내일이면 웨딩마치를 울리게 된다.
어느 날 보다 기쁨에 찬 축복의 밤이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인데
왜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처럼
내 눈에서는 눈물이 나는지
오늘 밤은 좀체 잠을 못 이룰 것 같다.
<수필문학5월호 초회추천당선 작품>
2014.05.31>
첫댓글 이영주님, 축하드려요. 앞으로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거라고 생각합니다.
좋은글 잘 읽었어요 감사해요
이제는 웃을 일만 남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이영주 선생님께서도 그런 아픔이 있었군요. 항상 밝은 모습이셔서 몰랐습니다.드립니다.
가슴이 짠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음 깊이
좋은 글 축하드립니다
아픔의 세월은 이제 축복의 날들로... 초회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