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흥 무관 학교
서로군정서 등 독립군 3500명 배출 독립군→광복군→국군 정통성 연결
한일 강제병합 1년 전인 1909년 봄, 독립운동가 양기탁의 서울 집에서 신민회 간부들의 비밀회의가 열렸다. 이동녕, 주진수, 안태국, 이승훈, 김도희, 김구 등이 모인 이날 회의 안건은 ‘해외 독립기지 건설’과 ‘무관학교 설치’였다.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이미 독립운동가들은 나라 밖에서의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신민회를 중심으로 1911년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는 3500여명의 독립군을 배출하며 국외 무장 독립투쟁의 대표적인 산실이 됐다.
이역만리에서 변변한 자원도 없이 맨손으로 농장을 개간하는 등 간난신고를 겪어야 했지만, 항일 무장투쟁의 근거지로서 신흥무관학교는 그 위상이 높았다.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은 15살 때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만주지역의 독립군 항일투쟁에 폭넓게 참여했으며,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서로군정서의 간부들도 대부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또한 우당 이회영 일가 등 구한말 사회지도층들이 가산을 털어 신흥무관학교를 뒷받침했던 것은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꼽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은 광복군 창설의 감격적인 모습을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940년 9월17일 상오 여섯시에 가릉강반 가릉빈관에서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를 열다.
식장 문전에는 큰 국기를 교차하였고 식장에 들어가 대(臺) 중앙에 우리국기를 달고 그 양쪽에는 “초(楚)나라는 비록 세 집만으로도 진나라를 망칠 수 있었다. 나무가 베히고 뿌리가 말리우는 각오라면 끝내 우리는 고국에 돌아갈 날이 있을 것이다” “하(夏)나라는 군신이 함께 덕으로써 나라를 흥하게 하였고, 어려운 일을 무릅쓰고 거듭 만성을 따라 완고한 왜놈들을 몰아냈다”라는 표어를 장식하여 자못 숭엄하다.
근 여섯시가 되니 각급 내빈과 우리 총사령부 장관직원과 임시정부 국무위원들이 모두 참석하여 근 200명에 달하다. 여섯시 정각이 되니 사회가 개회를 선포한다'
1908년 8월1일 대한제국의 군대해산 이후 실로 32년 만에 새로운 조직 체계를 갖춘 군대의 창설이다.
3·1운동 이후 대한독립군 등 수많은 항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나 체계적인 군대의 편제와 조직, 군사외교활동 등에 있어서는 그 예를 견줄 수 없으며, 광복군이 거둔 대표적인 군사 활동은 광복군의 인도·버마전선 파견과 미군 첩보기관인 OSS(현 CIA전신)와의 연합작전이다.
피나는 훈련을 받으며 국내 진공작전을 앞두고 있던 광복군은 해방으로 인해 그 꿈을 접을 수 밖에 없었지만 1941년 12월9일 임시정부의 대일선전포고를 시작으로 광복군의 손으로 해방을 앞당기고자 분연히 참전했던 한미군사작전은 참으로 놀라운 시도가 아닐 수 없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고자하는 신념 하나로 뭉친 광복군 특수요원들의 모습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본다.
1946년 5월 16일 한국광복군 복원선언으로 해산됐으나, 요원들 대부분이 국방경비대로 참여해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다
누가 독립군에게 입영통지서 보내나요?
우리 민족은 국난이 다치면 이렇게 자발적으로 나라 위해서 목숨 바칩니다
민초들은 목숨을 재력가는 재산을 자신이 가진 것을 국난 타개 위해서 이렇게 합니다.
일제에 국권 빼앗기고 독립군 숫자가 만 명 넘는 것으로 아는데요.
이것은 그때 당시에 인구 비례에 비해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일입니다
물론 그전에 우리역사에도 우리 민족은 거국적으로 국난에 타개에 나서지요
임진 전쟁도 그렇고 몽고와 전쟁에서 삼별초 까지
일부의 몰지각한 위정자들이 문제 이지요
이런 위정자들이 대한민국 초기에 이승만은 자신의 안위 지키기 위해서 친일파대거 등용 했고
곧이어 박정희가 군사행동으로 독립군 출신 많이 냉대 한 것 아세요.
우리나라 침입 방위 하는 국군을 자신의 사병으로 하지요
박정희가 일본군 위관급 장교 이니 독립군 출신하고 앙숙이니 당연히 냉대 하지요
예 – 장준하 선생님
곧이어 전두환 과 노태우 역시 국군을 자신의 사병 마냥 부리고 광주 사태으로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지요.
이북에서는 김일성 역시 자신의 안위 위해서 친일파 등용하고
일본의 식민지 생활이 참 암담하다면서 일부에서는 아직도 친일파지지 하고
심지어는 일본인 보다 더한 망말 하는 사람들 있지요
조선의 농어촌 근대화는 일제가 만들어 준 것 이다
농사가 끝나면 전부 일본군의 군량미로 되어다는 사실
731부대가 독립군 부대로 둔갑 하지요
난 그래서 위정자 들 안 믿네요.
위정자 보다 대한민국 민족의 저력 믿습니다.
6.25 전쟁에 자발적인 국민의 참여 학도병 소년병
IMF 사건 때 국민들의 금 모우기 운동
친일인명 사전 정부에서 발간비용 예산 삭감 하자
국민들의 성금으로 된 사실
두 가지 일에 재벌가들이 얼마나 참여 했는지 모르게네요.
친일파와 친일파지지 하는 사람 때문에 우리의 애국 순국선열님들이 지하에서 피눈물 흘리고 계십니다.
첫댓글 도올 김용옥 교수님의 동영상강의 듣고 몰랐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과연 2012년 4월 현재싯점에서 조국을 위해 자신의 안위를 내려놓고, 생명까지 아끼지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민족혼이 사라져버린 이 시대는 정말이지 우리 배달민족의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기로 기록될 것입니다. 얼간이, 말그대로 얼을 강간당한 이들로 이뤄진 시대로요.
난 우리 민족 믿습니다 IMF 전국민 금 모우기 운동 친일인명 사전 정부에서 예산 삭감 하니 국민들 성금으로 된 사실 난 위정자 안 믿지만 우리민족 믿어요
친일종미의 근현대사 가 언제 끝날지..
친미사상이 앞으로 더 문제가 되지 않을까요?!!
역학자님
26일밤 석오 이동녕 주석 손녀님이 글을 확인 하시고,
고맙다는 말을 했습니다.
가족사의 비밀중에 광복군 군사활동과 광복군의 인도 버마 전선 파견과,
미국 첩보기관인OSS(현CIA전신)와의 연합작전을 이야기 했고,
UN장군님들도 이 내용을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지식 인이라고 하는 자들이 미국 OSS(현CIA전신),
관련을 믿지 않았습니다.
고마울것은 없고요 전 단지 보통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을 적은 것 입니다 저 역시 보통 사람 이니까요 남 해 롭게하면서 나 자신의 권위 내 세우고 안위 보전 하는 것은 기드권들의 행패 이지요 쉽게말 해서 선의의 경쟁은 좋으나 악의적인 경쟁 하는 사람들 있지요 그런 사람들은 거의 제거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더불어서 같이 잘 살아야 하는데 나 혼자만 잘살고 넌 불행 당해라 그런사람들 많지요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인 종자들이 많지요 즉 식인 사건 일본만 아니라 중국도 그런일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