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Jerry Stackhouse / AGAINST ALL ODDS 제리 스택하우스는 언제나 비관적인 시선 속에서 NBA 인생을 살아왔다. 그가 전혀 뜻하지 않은 기대감 속에 휩쓸려, 구단의 잘못된 선택에 휩쓸려... 그렇게 말이다. 사람들은 그의 노력과 능력 이상의 무언가를 요구해왔고, 스택하우스는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스스로를 바꿔왔다. 그리고 마침내 자신을 희생시켜 디트로이트를 디비전 1위에 올려놓은 몇 달 뒤, 스택하우스는 또 다른 허들을 맞이하게 된다. 바로 워싱턴 위저즈로 트레이드 된 것이다. 과연 그에게 있어 이번 변화는 역경일까, 행운일까 ? 그의 지난 7시즌을 돌아보고, 워싱턴에서의 새로운 삶을 조명해보았다. 넥스트 조던이라고 ? 1995년 6월, NBA 드래프트를 앞둔 시점에서 ESPN, 스포츠라인 등 해외 사이트는 물론, 국내 PC 통신 NBA 동호회에서 NBA 팬들의 이목은 단 한 명의 선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바로 제리 스택하우스였다. 햇수로는 불과 7년 전이지만, 경기 테잎은 고사하고 만족할만한 데이터조차 찾기가 수월하지 못했던 그때. 스택하우스에 대한 프로필과 기사에서 결코 빠지지 않았던 한 수식어가 있었으니, 바로 "넥스트 조던"이 그것이었다. 모두들 스택하우스를 평범한 신인이 아닌, 조던의 대(代)를 이을 새로운 스타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동안 많은 유망주들의 희비를 엇갈라 놓았던 이 수식어가 과연 제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모르겠다. 한가지 분명했던 것은 아직 스택하우스의 플레이를 제대로 보지 못한 이들까지도 마이클 조던의 전매특허였던 '그것'을 기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며, 그 기대감은 84-85 시즌의 시카고와 상황이 여러모로 비슷했던 필라델피아에 전체 3위로 지명된 후 더더욱 증폭되었다. JUST LIKE MIKE '이미 조던과 1:1 시합을 했다', '조던으로부터 호평을 들었다' 등 그의 재능을 포장해주려는 듯한 기사가 난무하던 가운데 95년 11월 3일, 스택하우스는 대학동기 라쉬드 월라스가 있는 워싱턴 불레츠를 상대로 데뷔전을 치렀으며 이 경기에서 27점을 폭발시키며 눈부신 미래를 기약한다. 나이키, 리복처럼 슈퍼스타의 이름을 빌어 고급 농구화를 출시하고자 했던 필라 (FILA)가 스택하우스와 접선, "FILAdelphia"라는 컨셉의 광고로 팬들에게 접근을 시도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95-96 시즌 스택하우스는 평균 19.2 득점, 3.7 리바운드, 3.9 어시스트를 기록했으며, 3월에는 <이 달의 신인>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초반 분위기는 무척 좋았다. 개막전을 치른 지 4일만에 그는 새크라멘토 킹스戰에서 통산 최고인 34점을 기록했고, 더블-더블도 수차례 올리면서 새 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하지만 스택하우스가 실수 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초반 러쉬' 뒤에 찾아오는 막막한 피로감을 잊은 것이다. 대부분의 신인들이 NBA 적응에 어려움을 가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살인적인' 82경기 스케쥴 때문인데, 그는 이미 1월부터 급격히 페이스가 떨어지고 만 것이다. 3월에 시즌 초반의 페이스를 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시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저조한 야투율로 태클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41.4%의 야투율과 짧은 슛거리로는 조던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들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때로 막무가내로 치고 들어가려다 범하는 3.5개의 실책도 그 태클의 부록으로 포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마지막 2주는 오른쪽 엄지손가락이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시즌을 포기해야 했다. 올-루키 팀에 이름을 올리긴 했지만 신인상은 거머쥐지 못했으며, 그를 "넥스트 조던"이라 부르는 사람들은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가운데, 그렇게 루키 시즌은 끝났다. 스택하우스는 필라델피아에서의 루키 시즌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패배가 너무나도 어색합니다. 반드시 이겨내야 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이 팀은 먼 미래를 바라보고 나아가고 있는 팀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하지만 경기가 끝난 뒤 항상 제 자신에게 말해봅니다. '이럴려고 프로에 온 것은 아닌데...' '내가 좀 더 나아진 것이 있을까 ?' 전 지는 것이 정말 싫어요. 하지만 지금은 언젠가 다가올 승리를 더 값지게 만들기 위해 견뎌낼 것입니다." 노스캐럴라이나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패배를 밥먹듯 기록했던 스택하우스. 그가 그 값진 승리의 기쁨을 맛보는데는 이후 7년이 걸렸다. 열심히 던진 당신 "떠나라" '가관'이라는 단어는 바로 96-97 시즌의 필라델피아 76ers를 두고 써야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96-97 시즌 필라델피아-시카고 戰. 모두들 조던-스코티 피펜 콤비와 앨런 아이버슨-스택하우스 콤비의 맞대결에 스포트라이트를 집중했지만, 경기에서 네 선수가 맞대결한 시간은 25분을 넘기지 못했다. 아이버슨은 공만 잡으면 치고 들어가기에 바빴고, 이에 뒤질세라 스택하우스도 공을 원했다. 조던과 피펜, 그리고 론 하퍼는 드라이브-인을 제외하면 별다른 득점루트를 발견하지 못하던 스택하우스의 진입로를 효과적으로 봉쇄했고, 아이버슨은 중장거리 슛만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승부는 3쿼터에 이미 결정이 났다. 죠니 데이비스 감독은 "당황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이러한 광경은 96-97 시즌에 자주 목격되었다. 아이버슨은 40점, 50점을 마구 몰아넣었지만 그 득점을 올리기 위해 무수한 슛을 던져야 했고, 그만큼 스택하우스가 여유 있게 1:1 찬스를 준비할 기회는 줄어들었다. 평균 20.7 득점. 평균 득점을 1.5점 더 올리고 얻은 결과는 겨우 4.8% 더 좋아진 승률뿐이었고, 아이버슨과의 골은 깊어져갔다. 그들의 패배에 동정표를 던진 이들은 많지 않았다. 단지,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떠나야 한다는 해답만이 제시되었을 뿐이며, 필라델피아는 미래의 스타로 스택하우스가 아닌 아이버슨을 택했다. 37.1%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의 나날들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다. 디트로이트 프리프레스 (Free Press)紙의 칼럼니스트는 스택하우스를 "3-of-18"이라 부르며 조롱했다. 3-of-18은 그의 필드골을 나타낸다. 18개의 슛을 던져 15개를 실패했다는 말이며, 42.8%, 37.1%의 야투율을 기록했던 스택하우스에게 이런 '난사'는 그리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디트로이트 이적 후 그는 노스캐럴라이나 신입생 시절 이후 처음으로 벤치 멤버로 돌아갔다. 디트로이트의 2번 자리는 '배드 보이'의 大父 조 두마스가 굳게 꿰차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마음고생이 가장 심했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그 시기에 스택하우스는 슈팅 슬럼프, 덕 콜린스-그랜트 힐과의 불화설, 그리고 잔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외곽슛 성공률은 갈수록 저조해졌고, 출전시간에 대비한 실책은 더더욱 늘어갔다. 이미지가 흐려진 것은 당연한 일. 어디선가는 "그렇게 리더가 되고 싶은가보지 ?"라는 비난도 흘러나왔다. "Against All Odds" PART I. 1999-2000 시즌의 스택하우스는 뭔가 달라 보였다. 디트로이트로 이적해온 후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 자리를 꿰차게 되어서일까. 96-97 시즌 이후 가장 많은 38.4 분을 소화해낸 스택하우스는 23.6 득점, 4.5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피스톤스의 플레이오프 진출에 일조 한다. 여기에 구단 행정직으로 자리를 옮긴 조 두마스는 그에게 최고의 선물로 화답했다. 7년, 3700만 달러의 계약을 약속한 것이다. 최근의 젊은 선수들과 비교해볼 때 그 금액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동기부여의 계기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후배 빈스 카터의 화려함에 밀려 주목을 받진 못했지만 올스타게임과 올스타 슬램덩크 컴피티션에도 출전해 자신의 탄력에는 문제가 없음을 입증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해 플레이오프는 무척이나 아쉽게 마무리되었다. 마이애미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그랜트 힐은 발목이 부러지는 부상으로 물러나야 했고, 알론조 모닝의 파괴력과 팻 라일리 감독의 용병술 앞에서 선수층이 그리 깊지 못했던 디트로이트는 스택하우스의 눈물겨운 분전에도 불구하고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Against All Odds" PART II. "Against All Odds"는 스택하우스의 어깨에 새겨진 문신이다. 말 그대로 "모든 역경을 넘겠다"는 의미. 암울했던 벤치 멤버를 이겨내고 다시 주전자리를 되찾았지만 이때까지도 여전히 그의 많은 슈팅 시도와 '리더'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것은 스택하우스가 넘어야 했던 새로운 역경이었다. 그랜트 힐의 올랜도 매직行은 스택하우스의 NBA 인생 '제3막'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마침내 팀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언젠가 AP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날 믿지 않았다. 그들은 내가 너무 많은 슛을 던진다고 했으며, 팀이 지면 내가 30점을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탓했다." 2000-01 시즌, 스택하우스는 자신에게 돌아온 과제를 다음의 성적으로 풀어냈다. 평균 29.8 득점으로 리그 2위에 올랐고, 이는 통산 최고 득점이었으며 시카고 불스戰에서는 57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기록을 나쁘게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야투 시도 1위 (1927개), 3점 시도 3위 (473개), 자유투 시도 2위 (810개), 32승 50패」 그리고 좋게 보면 이렇게도 풀어 볼 수 있다. 「야투 성공 3위 (774개), 3점슛 성공 5위 (166개), 자유투 성공 1위 (666개, 82.2%)」 이것을 좋게 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나쁘게 보는 이들도 있다. 좋게 보는 이들의 입장은 이렇다. "스택하우스가 슛을 많이 던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유감스럽게도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는 스택(stack)을 제외하면 믿고 슛을 맡길 선수가 없다. 그가 잘하면 이기는 것이고, 못하면 지는 것이다. 로스터를 한번 보라. 과연 더블팀, 트리플팀에 막혔을 때 믿음을 갖고 공을 건넬 또 다른 1:1 플레이어가 있는지 말이다" 반대 입장은 이렇다. "스택하우스의 관심사는 오로지 득점왕에만 있는 것 같다. 진정한 리더는 팀 동료들을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스택하우스는 절대 디트로이트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 OK. 둘 다 맞는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스택하우스의 생각은 어떨까 ? 2001년 4월 3일. 그는 시카고 戰에서 57점을 기록한 후 공허함을 느꼈다고 한다. 동료들이 유나이티드센터 신기록을 수립한 것을 축하해줄 동안 그는 '내가 뭘 한 거지?'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약체 팀을 상대로 원맨쇼를 펼쳐 승리한 것에 불과하며, 결정적으로 농구가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0-01 시즌이 끝난 후 그는 구단 측에 "더 나은 선수들을 데려와달라"고 요청했다. 공공연히 크리스 웨버의 영입을 희망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의 생각과는 달리 그는 "팀 승리를 위해서는 내 득점은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2000-01 시즌에는 반드시 득점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 드리블을 이용해 득점할 수 있는 동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난 내 비중이 줄어들길 절실히 바랬다." "Against All Odds" PART III. 2001년 12월 4일. 스택하우스는 '득점만 잘하는 스택하우스'와 '엘리트 선수들'간의 격차를 좀 더 좁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격차는 주위의 평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긴 하지만) 뉴욕 닉스와의 홈 경기에서 통산 최다 13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99-97승리를 주도, 3연승을 이끌어 낸 것이다. 그는 득점보다는 수비와 플레이 메이킹에 주력해갔고, 사람들은 포인트가드스러운 스택하우스의 다음 한마디에 그가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동료들이 슛을 성공시키지 못했다면 내 어시스트도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몇 주전 11개의 어시스트로 통산 최다 기록을 세웠던 그는 디트로이트가 자신이 5점에 묶여도 승리할 수 있는 팀이 된 것을 기뻐했다. "수비에 좀 더 신경 쓸 수 있게 되어 좋습니다. 아시다시피 수비에 열중할수록, 득점은 더 쉬워지죠." 필자가 지난 5년간 NBA 경기 인터뷰 스크립트를 정리해오며 스택하우스의 그런 멘트를 본 것은 12월 4일이 처음이었다. 승리는 스택하우스에게 더 많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비록 평균 득점은 21.4점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올스타가 되었으며, 자신이 리더가 되어도 팀은 50승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Against All Odds" FINAL REPORT "스택하우스가 부담을 버렸으면 좋겠다. 우린 그가 부담 없이 득점에 몰두하길 바란다." 팀의 베테랑 클리프 로빈슨의 말이다. 토론토 랩터스, 보스턴 셀틱스와 PO 시리즈를 치르는 디트로이트의 고민 중 하나는 스택하우스의 '돌아온' 슈팅난조였다. 시즌 중 누누이 지적되어왔던 리바운드 문제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스택하우스가 중요한 시기에 'the man'의 역할을 못해줬다는 것이 릭 칼아일 감독에게도 아쉬웠던 부분 중 하나라 한다. (물론 토론토의 수비도 좋았다!) 2001-02 시즌이 끝난 후 디트로이트 언론에서는 스택하우스의 트레이드에 압력을 가했다. 어설픈 프랜차이즈 스타보다는 제대로 된 유망주가 낫다는 것이 그들의 요지였다. 그리고 9월 13일, 조 두마스 회장은 스택하우스와 라트코 바르다, 브라이언 카디날을 트레이드하고 워싱턴 위저즈로부터 리차드 해밀턴, 휴버트 데이비스, 바비 시몬스를 받아들이겠다는 보도자료를 발표했다. 비록 해밀턴이 스택하우스보다 나은 1:1 플레이어는 아니지만 24살의 젊은 선수로서 팀 재건에는 더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NBA 선수가 된 지 7년째. 스택하우스는 세 번째 팀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천하를 호령했던 마이클 조던은 이제 그의 백업으로 출전하게 될 상황이다. 세월은 많이 흘렀고, 스택하우스에게는 더 많은 무기와 경험, 그리고 자신감이 생겼다. 남은 것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여, 새로운 도전을 성공으로 이끌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선배이자, 유령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던 '마이클 조던'과 한 팀을 이루게 된 것을 무척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과거와는 비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와 플레이하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더 이상 그를 수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요. 전 앞으로도 계속 팀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위저즈에서 스택하우스는 해밀턴의 자리를 이어받게 될 것이다. 때에 따라 래리 휴즈가 2번으로, 그가 3번으로 기용될 가능성도 높으며, 조던의 컴백 여부와는 상관없이 30분 이상의 출전 시간은 보장받을 전망이다. 이 코너에서 트레이드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은 성급한 감이 있을 듯 싶다. 아직 27살. 앞으로 더 많은 역경이 그를 찾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문신에 새겨진 "Against All Odds"를 충실히 이행해가고 있다. 새로운 멤버들과 함께 하게 될 새로운 시즌, 과연 그가 이번에도 '변화'를 '행운'으로 바꿔갈 수 있을지 지켜보자. "나와 팀의 발전을 위해 나를 기꺼이 버리는 법을 알았다"는 스택하우스라면 즐거운 결과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DATA 포지션 : 가드-포워드 생년월일 : 1974년 11월 5일 신장,체중 : 198cm, 98.9kg 대학 : 노스 캐럴라이나 전공 : 아프리칸 아메리칸 풀네임 : 제리 대럴 스택하우스 가족 : 레미라 막스 (약혼녀), 2자 (제이, 알렉시스) NBA 드래프트 : 1995년 전체 3위로 필라델피아 입단 |
블로그 > Terra Incognita 2005년도
첫댓글 조회수 0 이라...
잘봤습니다.. 제리스택집..오래전에 요런닉넴으로 활동하신분도 계셨던것 같은데^^; 스택하우스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이상하게 인기가 별로 없었던것 같군요..
드래프트 당시 루키 잡지에서 섹션 한개를 할애해서 소개하던게 생각나네요. 스택하우스 덩크장면과 조던 덩크장면을 같은 페이지에 실어서 제2의 조던이다 뭐 이런식으로..
제리 스택하우스 잘하네요!! 그러니 아이버슨, 조던, 노비츠키랑 같이 주포로 뛰었겠지만요..ㅋㅋ 복도 많고 오래가는 스타플레이어!!
노스캐롤라이나에 잇을때 라쉬드랑 찍은 사진이 기억나네요..기당시 정말 넥스트조단이란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닌 스택 ㅠㅠ
스택이 복이 많은건가요 ? ^^ 음... 좋은 팀에서 뛰고 있지만 그렇다고 우승을 한 적은 없고 디트 시절 개인득점 2위 할때는 팀 성적이 나뻤고... 다음 시즌에는 우승 가능하겠지요 ?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