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침
기관지를 앓는 딸아이를 데리고
아침 아홉 시 동부시립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평화롭다 애비 손을 잡고 가는 딸은
기침이 나와도 그저 즐겁기만 하므로
나는 평화롭다 X레이에 나타난 딸아이의
궁형의 갈비뼈와 안개 같은 허파와 암흑
그 사이에서도 나는 평화롭다 평화롭다
동대문구에서 제일 예쁜 딸아이는
그림일기를 거짓말로 그렸다고 울지만
일기는 거짓말로 써도 된다고 달래는 대학교수
나는 평화롭다 평화주의자이므로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다지도 살고 싶은가>
미당이 이렇게 노래한 것은 기막히다
그러나 나는 오늘 <살고 싶은가>를
<죽고 싶은가>로 교정하는데
이 교정에 이의 있는 자 있으면
안암동 5가 1번지 문패도 없는
이름도 없는 캠프스,
그 앞으로 올 것
선생님은 참 행복하시네요
행복 속에서 어떻게 글이 나오지요?
오냐오냐 나는 행복해서 미칠 지경이다
시가 욕설이 되는 슬픔을
문학이 땅에 떨어지는 과일아니라
피어나는 잎이라는 것을
겨울을 참는 아픔이라는 것을
사이비 정치학도여 너희들은 아는가
딸아이의 기관지병은 보름이면 낫는다는데
내 기침은 15년이 지나도 가망이 없는 날에
평화에 들떠서 이 글을 적는다
여기쯤에서
여기쯤에서 그만 작별을 하자
눈뜨고 사는 이에게는
생애의 벼랑은 언제나 있는 법
거기 피어 있는 이름모를 풀꽃
하나 따서 가슴에 달고
뜻없는 목숨하나 따서
만났던 그 자리 그 어둠 앞에
우리의 죄로 젖어 있는 추억을 심고
그만 여기쯤에서 작별을 하자
똑같은 항아리가 어느 한쪽에
깨어져서 들어가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랑도 아니다
우리의 입술은 아침저녁 비가 오고
내 몸에 묻어 있는 눈썹 하나
머리칼 한 올이 나의 새벽까지
따라와서 죄를 짓자고 속삭인다 해도
너의 찬 손이 뜨거워지고
나의 안경이 흐려진다 해도
말하지 마,아무 말도 하지 마
작별을 하자 그만 여기쯤에서
생애의 벼랑에서 뛰어내려
젖은 입술을 입술에 부비며
말하지 마, 아무 말도 하지 마
[현대시의 이해],청하, 1990.
2012.24. 원서헌에서의 하룻밤의 술자리 함께 하신 분들과 오시인님이 생각이 납니다.
저가 가져간 책 속지에 해주신 서명을 보니 동그라미를 길게 쭉 뽑아 쓰신 오자가 눈에 들어 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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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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