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가꾸는 마을 [이기철]
채소도 아닌데 어떻게 시를 가꾸느냐고
사람들은 핀잔하고 새는 노래한다
이런 때는 사람보다 새가 시를 가꾼다
산속 마을은 골마루처럼 깊어 실로폰 바람 지나가면
마당가엔 아직 이름 불리지 않은 풀꽃들 있어
단추꽃 댕기꽃이라 짐짓 불러보는데
꽃나무는 저 부르는 이름인 줄도 모르고
나흘 전 흙에 상추씨만 젖니 같은 이파리 밀어 올린다
시는 읽는 것이지 가꾸는 것 아님을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 책상과 난로들
여기서 실낱같은 생각 하나 가락지 낄 수 있다면
하늘 스무 평 공짜로 얻은 셈은 되지 않을까
열 사람 가고 혼자 남은 저녁에게 말 걸면
저녁이 저도 외롭기는 마찬가지라고
달빛을 끌어다 방석을 내주기도 한다
이럴 땐 슬픔이 새끼 쳐 쫑알대지만
나는 그에게 줄 좁쌀 한 홉도 마련하지 못했다
사람은 가도 저녁은 남아 담요처럼 깔리는 적요
왔다가는 가 버리는 하루에 시비 걸 마음은 없으나
어느 하루도 공으로는 다녀가지 않는
밤이 떨어뜨리고 간 바늘 같은 저 저녁별!
- 영원 아래서 잠시, 민음사, 2021
* 그 옛날 시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시를 쓰고
시단을 가꾸었다.
내가 즐겨 읽었던 시잡지는 심상과 시안.
심상이 서점에서 볼 수 없을 때 참 아쉬웠는데
그 후 시안을 만나 다시 시안을 즐겨 읽었다.
하지만 61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시단을 가꾸는 게 참 어렵다는 거고
시가 돈이 되지는 않는다는 거다.
시인이 열심히 한 편 써서 시잡지에 올려도 '삼마넌'을 받는다 했던가,
아니 공짜로 실어주기만 해도 고맙다고 했던가.
시를 가꿀 형편이 무지무지하게 힘들다는 거다.
시사랑 카페가 시를 읽으려고 하는 목적은
시인들이 기를 쓰고 시를 지어 바치는데
큰 도움은 안되더라도 시를 읽음으로써 시인이 시 쓰는 목적을 달성케 하는 것과 같다.
시인은 짓고 시민은 읽고.
언젠가는 시 쓰는 마을이 시 읽는 마을과 같아지지 않을까.
며칠전 소천하신, 시안을 주간했던 오탁번 시인의 시집 한 권을 꺼내드니
시집 제목은 '사랑하고 싶은 날'이었다.
2009년에 자신의 시 100편을 모아 한정판으로 낸 시집이다.
몇권을 발행했는지 모르겠으나 내 시집에는 '443책'이라고 빨간색 수기로 적혀 있다.
책머리에
" 눈물로, 피로, 쓰고 지우고, 다시 쓴 시, 100편을 미래의 과거에다가
불쑥 남기게 됐으니, 이제 발걸음도 한결 사뿐하겠다.
아내야, 애인아, 다 고맙다.
풀이여, 이슬이여, 다 눈물겹다.
원서헌에서 오탁번"
수많은 저녁별들 중에 수백편의 바늘 같은 별을 남기고 가신 덕분에 시 읽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