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는 많이도 변했다.
잘 가꾸어진 실습장, 식당, 도서실, 양호실, 각종 표본, 디지털 흑판을 사용하는 본보기가 되는 학교로 지정되어 있다는데 멋진 학교로 만드시는 라고 교장 선생님의 노고와 역할이 크셨나보다.
학창시절-5
전쟁 직후의 중학교생활이란 상당히 비참했다.
난방시설이 없으니 종일 추운 교실에서 공부를 해야 했으며 그나마 유리창조차도 유리공장이 없을 때이어서 한국전쟁 때 투하된 폭탄의 폭풍(爆風, 暴風이 아님)때문에 깨어진 것이 많았다.
따뜻한 계절이면 춘곤증에 시달리고 겨울이면 교실이 영하의 온도가 되어 만년필 잉크가 얼어서 글씨를 쓸 수 없는 형편이며 단지 연필만이 사용 가능하니 그때의 환경이란 지금의 학생들이라면 상상불허 이다.
도시락 반찬이래야 형편이 낳은 학생은 멸치 볶음이나 계란찜이고 좀 못한 학생은 콩조림, 고추장(찬밥과 같이 먹더라도 이마에 땀이 난다), 들깻잎, 뚜깔배추[(花心)은 실은 통배추보다 영양가가 더 많단다] 김치였고 얼기 직전의 찬밥을 학교 뒤 노천의 가마솥에 소사(小使, 大使의 반대?)가 삼배자루에 볶은 보리를 담아 물위에 띄우고 끓인 뜨거운 보리차 한 국자와 같이 먹었다.
내가 졸업한 조마[助馬 : 냇가 풀밭에다가 말을 키워서 의병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뜻]초등학교는학생수가 250명이었었는데 지금은 신안초등학교, 대방초등학교등 3개 학교를 통합해도 학생이 겨우 52명이라는데 길이 멀어 스쿨버스 까지 갖추고 있었고 모두 18명이 근무를 한단다. 내가 1952년에 졸업을 하고 60년만에 가보았는데 건물은 실습지에다가 새로지었고 스쿨버스도 있었다. 오래전에는 학교정문앞에다가 이순신장군의 흉상을 모셔놓았었는데 학국전쟁때 폭격을 맞지않은것은 이순신 장군의 덕분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일제시대에 만든 우물은 무지하세 깊었고 지붕은 양철로 덮혀 있었다
나도 해변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더라면 잘 먹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에 지금도 항구도시를 동경한다.(충무시라는 이름이 충무공의 이름을 더럽힌다하여 통영시로 바뀐다) 중학교 국어책에 나왔던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 "내귀는 한개의 조개 껍데기 그리운 바다의 물결소리여(즈앙 곡도)" 시는 "청산에 살어리랏다."보다는 내가 바다에사는것을 동경하다보니 더 기억에 남는다.
동급생이 4개 학급이 되어 240여명인데 그중에서도 안경을 낀 학생은 지금도 내가이름을 기억하는 김x문, 문x일등 3 사람뿐이어서 “안경쟁이”라고 불리어 지금 60%의 안경착용(콘택트렌즈 포함)사람들과 대조를 이루는데 유리로 된 렌즈는 찬 공기 때문에 가끔은 앞이 흐려보였으리라. 한번은 상급생에게 매를 맞고 울적에 보통아이들은 옷소매로 눈을 쓰윽 훔치는데 비해 그들은 안경을 벗은 후 소매 자락으로 눈물을 닦으니 내가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던 일이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매일 왕복 20리의 부역(백성이 부담하는 공역)으로 자갈을 깐 길을 물이 돌바닥을 흘러가듯이 이리 저리 큰 돌멩이들을 피해가면서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걸으면 가방은 바짓가랑이의 바깥쪽에 스쳐 닳아 너덜거리게 되고 작은 돌멩이 위에 운동화의 고무바닥은 한 달이면 으레 구멍이 나게 된다. 그때는‘신기료장수(다리장애자 이었음)가 매일 와서 겨울이면 양지바른 쪽에서 낚시걸상에 앉아 자전거의 폐(廢)타이어를 칼로 잘라서 창갈이 라고 신바닥에 대고서 실로 꿰매어 주었는데(바닥이 볼록함)으며 학교 측에서도 돈벌이를 하라고 배려를 했었나 보다. 학교가 시내에서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겨울철 등교 길은 추풍령으로부터 내려 쏘는 강풍이 가슴팍을 냅다 후려 칠 때는 땅이라도 깎을 듯 하며 모래를 동반한 삭풍(朔風)을 안고 걷노라면 먼지가 입안으로 들어가 자그러운 것은 감기로 코가 막혀 호흡을 입으로 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부터 나온 입김이 금방 찬 서리로 변하여 안구를 시리게 만들고 또 양쪽 볼에 닿으면 얼마나 차가운지 입이 얼어서 말이 어줍게 된다. 바람의 거센 압력 때문에 숨을 들여 마실 수는 있어도 내어 쉬기가 곤란 할 때에는 뒷걸음으로 걸어가든지 아니면 한 줄로 서서 북풍의 저항을 줄이며 기러기가 줄을 지어 나듯 키 큰 두 살 위의 앞 학생 등 뒤를 고개를 숙이고 바짝 따르는 방법이 있었다. 어떤 곳은 국도가 높아서 그 밑으로 걸으면 조금은 낳은 편이며 아예 소리길이 나 있었는데 지금은 흙을 채운 후 아파트를 지었으니 흔적도 없어졌다. 토요일 4시간을 공부하고 시골로 집으로 간 후 이틀 밤을 자고 월요일 새벽 5시에 일어나면 어머님께서 짚불을 지펴 해주시는 하얀 쌀밥은 시간이 모자라 속이 덜 익어서 씹으면 따끔따끔 하는데 부지런히 걸어서 학교에 도착한 후 수업에 임하면 설 잠에 피곤이 겹쳐 잠이 퍼붓는데 졸면서 들은 선생님의 말씀은 끝난 후면 머릿속이 남는 건 전무(全無)이다.(장안읍성의 민속촌에서 본 고가의 부엌은 깨끗했는데 실은 부엌 천정은 검게 그을리고 한쪽에는 땔감의 짚을 쌓아놓았다) 같은 동네의 친구는 잠이 많아 장면(長眠)박사(그 당시의 부통령 이름)라고 불렀고 박X석이라는 동급생은 삼국지의 장비처럼 눈을 뜨고 자는데 선생님이 가까이 간 후 손가락을 그의 면전에서 빙글빙글 돌려도 그는 몰랐다.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생긴 사립의 인문중고등학교 이었는데 나의초등학교 동기생(44명)출신으로 김천 고등학교를 졸업 한 학생은 겨우 3명뿐이었으니 지금 보면 나도 사립 고등학교 출신인 셈이다. 진학 율로 볼 때는 지금의 대학교출신에 해당 되는 셈인데 지금 보면 개인 기업체나 정관계에서 길장(長)자 붙은 출세를 한 사람이 수두룩하다. 중학교 때의 일로 직지사 쪽에서 내려오는 냇가의 모래사장에서 씨름대회를 하게 되었는데 몸집이 가장 뚱뚱했던 오야가다(おやかた; 親方, 그때는 그렇게 불렀음)가 일등을 했으며 힘이 워낙 세니까 상대방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으며 한참 있다가 모래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는데 아무도 그를 당해 낼 경쟁자 없었는데 이것은 일등이 아니라 특등인 셈이 됐다. 그가 일찍 유명을 달리했다니 졸업식이 마지막 이별이었나 보다. 살이 찐 일본씨름(스모; 相撲)선수들의 수명이 대게 오십을 못 넘긴다니 어쩌면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나 할까? 나는 그때는 달리기를 해도 키가 작으니까 다른 애들보다 주행(走行)속도가 느려서 뒤로 쳐지게 마련이며 체육시간에 축구를 해도 공을 따라잡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으며 혹시 공을 잡아서 차려고 모션(motion)을 취하면 덩치가 큰애들이 공을 빼앗을 목적으로 큰 어깨로 나를 밀어붙이면 나는 자연히 튕겨져 나가 넘어지게 되고 손바닥이나 또는 팔꿈치에는 진흙 운동장에 굴러다니는 왕모래가 박히고 어떤 때에는 피가 나기도 했다. 키가 작아 초등학교의 운동회 때 달리면서 덧셈을 암산으로 계산을 한 후 정답을 종이에 적어서 남보다 빨리 도착을 하여 상을 따본 것이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는데 이것 한가지로 나를 평가하는 것이 모순 인 것은 ‘비록 나쁜 눈일지라도 남한테는 예쁘게 보일 수도 있어서 좋고 나쁨이 양립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이기라고 격려의 3, 3, 7박수를 쳤는데 청년은 미래에 살지만 노년은 과거에 산다고 지난날을 더듬어보니 ‘빅토뤼 빅토뤼 v, i, c, t, o, r, y,'이었다. 여기에도 중고등학교 학창을 같이 했던 조B일라는 친구가 있는데 만나게 된 동기는 내가 이민 전에 서울병무청에 출국신고를 하러 갔다가 공교롭게도 반짝이는 금속 명찰을 단 접수계의 중학교 동기생을이Y상이라는 교우를 만났는데 그가 한말이 이 친구가 워싱턴으로 이민을 갔다는 말을 했다. 여기 온 후 한인주소록에서 이름을 찾아 첫 통화가 이루어 졌는데 목소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유일한 클래스메이트로 오래전에는 가끔은 골프운동도 같이 하고 한 달에 두 번씩 계모임으로 만난다. 이 친구는 미주세탁인총연합회 회장을 역임한 적도 있으니 군대시절에 소대장을 해본 경험을 되살려 역시 남을 지휘해 본 사람이 언재나 한발 앞선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국군에서 중령으로 재대한 고Y찬이란 분이 이곳 워싱턴 지하철회사에서 나와 같은 높이의 AA급 메케닉을 하다가 공개경쟁 시험에서 미국인들을 물리치고 합격하여 화이트칼라(collar; 깃, 색깔 color가 아님)로 전직, 갓 들어온 전동차 아퍼레이러(operator, 운전사)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같은 줄기이다. 구술시험에서 발음이 조금 나쁘다하니 내가 하는 말을 운전사들이 알아들으면 되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하여 합격하게 되는데 그분은 언어의 질을 높이기 위해 시간만 있으면 영어로 된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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