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874호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 26
- 내게 사랑이 있었네 ①
오태환
내게 사랑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면, 벌서듯이 서서 그대를 생각하는, 수척한 사랑이 있었네
종아리를 걷고, 허천나게 꽃이 피면 꽃으로 매 맞고 싶은 사랑이 있었네 꽃으로, 꽃째로 매 맞으며 환하게, 아프게 그대 쪽으로 새는 마음이 있었네
봄이 와서 허천나게 꽃이 피어서,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이 있었네 내게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있었네
-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황금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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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환 시인의 시집 『바다, 내 언어들의 희망 또는 그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시인은 이렇게 자서를 씁니다.
"내 몸 안 어둠의 바닥까지 들여다보려 했다// 이 무덥고 불편하고 무모하고 덧없고 수치스런// 폐결핵의 행려行旅"
시인은 어쩌자고 이렇게 지독한 말(문장)들의 시집을 묶었을까요?
시인은 어쩌자고 이렇게 지독한 시집을 읽으라고 권하고 있을까요?
시집을 덮고 나면 아마도 그동안 내가 얼마나 대충, 엉성하게 세상을 살아왔는지 살고 있는지 알게 될 텐데요.
그러니 가끔은 이런 불편하고 지독하게 쓴 말들을 씹는 것도 좋습니다. 약은 입에 쓴 법이니까 말입니다.
시집에서 그나마 편안한(덜 쓴?) 시 한 편을 띄웁니다.
시인은 "꽃은 피는 게 아니라 새는 것이다"(「새는 것들의 지평선」)라고 하더니
이번에는 "사랑은 새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 그대 쪽으로, 수척하게 새기만 하는 슬픈 몸"이 사랑이랍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네"라며 과거형을 고집합니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과거지사(過去之事)
그러고 보니 사랑은 그래서 슬픈 몸이겠다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은 다 새어나가서 이제는 없는 것
마디르마른 여윈 몸이겠구나 싶습니다.
마른 가지에 다시는 꽃피는 일도 없겠구나 싶습니다.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는 몸
마침내 다 새어버려 빈 거죽만 남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한사코 그대 쪽으로 새기만 하는 슬픈 몸
소태같이 쓰디쓴 이것은 어쩌면 毒이겠습니다.
사랑이라는 사약(賜藥)이라는 명목
사랑이라는 사약(死藥)이라는 치명
사약을 마신 자의 외마디, 사랑
사랑은 마침내 파르마콘(pharmacon), 약이면서 독이라는 것
우리는 너나없이 사랑의 희생양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런 생각까지 미치는 아침입니다.
시집에서 그나마 편안한 시를 소개한다 해놓고
거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안합니다.
2023. 2. 27.
달아실출판사
편집장 박제영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