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 양
" 선비의고장 물레방아 고을"
경남 함양군은 ‘좌안동 우함양’이라는 말처럼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고장이다.
경상우도의 유학을 대표하고,
산 좋고 물도 좋아 함양엔 ‘농월정’이나 ‘정여창선생’가옥처럼 양반 사대부와 관련된 문화재가 많다.
하지만 경남 함양이 고향인 사람들이 옛 친구보다 더 그리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통일신라시대 유학자인 고운 최치원이
천령군(함양의 옛 지명)태수로 재임당시 조성했다는 상림(上林)이다.
상림(上林)은 함양에 살았고,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양을 둘러본 사람들의 추억과 낭만이 서려 있는 곳이며
통일신라시대 천령군의 지방관인 고운 최치원의 애민정신이 서려 있는 곳이다.
개평 마을
개평이라는 이름은
내와 마을이 낄 `개(介)` 자처럼 생겼다는 데서 유래했다.
개평마을 표지석이 서 있는 마을 입구에서 보면
좌우로 두 개울이 하나로 합류하고, 그 사이로 개평마을이 들어서 있다.
마을과 잇닿아 넓은 들판이 펼쳐져 `개들`이라 불리기도 한다.
상 림
함양에는 모두 약 1백50여 개의 정자와 누각이 있고
이 중 화림동계곡을
‘정자문화의 1번지’로 손꼽는다.
골짜기 폭이 넓고 물의 흐름이 급하지 않은데다가
기암괴석이 널린 풍치는 좀체로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없다.
애초 화림동계곡에는 ‘팔담팔정’이라고 해서
여덟 개의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와서는 아쉽게도 농월정 등 네 개의 정자만 남아있다.
아쉽게도 농월정은 근래 화재로 소실되고 말아
현재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거연정(居然亭)
조선중기 화림재 전시서(全時敍)가 이 곳에 은거하여 지내면서
억새로 만든 정자를 그의 7대손인 전재학 등이 1872년 재건한 것으로,
거연(居然)은 주자의 시 정사잡영(精舍雜詠)12수 중에
‘거연아천석(居然我泉石)’에서 딴 것으로
물 과 돌이 어울린
자연에 편안하게 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물을
옛 선비들은 ‘방화수류천(訪花隋柳川)’이라고 불렀다.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이 정자에 앉아 계곡물이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 위에 떠가는 꽃잎을 좇다 보면,
내가 곧 자연이 되고 / 자연이 곧 내가 된다
군자정
정여창 선생이 수양한곳으로 전세걸, 세택이 정여창 선생을 기리기 위해
정면3칸, 측면2칸으로 바위 위에 올라앉은 형상을 하고 있다.
조선시애 대학자인 정여창이 이곳을 찾아와 운치를 즐겼다 하여
군자정으로 불리우며 1802년경에 만들었다 한다
동호정
임진왜란 때 선조의 의주몽진을 도와 공을 세운
동호 장만리를 기리기 위하여
그의 9대손으로 가선대부오위장을 지낸 장재헌 등이 중심이 되어 1895년 건립한 정자이며
1936년에 중수가 있었다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강 가운데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영가대),
악기를 연주하는 곳(금적암),
술을 마시며 즐기던 곳(차일암)을 포함하며,
차일암이라고 불리는 수백평의 널찍한 암반이 있어
이 곳이 풍류를 즐기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고 택
함양 정일품농원
일두 정여창 선생의 16대손이 운영하는 곳으로
한옥 체험이 가능하다.
황토 찜질방이 함께 있어 여행에서 쌓인 피로를 달랠 수도 있다
개평마을 ...
"박흥선 명인" 자택
함양 솔송주 전승자
"박흥선 명인"
정여창의 16대손 정천상씨와 그의 부인 박흥선(58)씨가 이를 안타까이 여겨
현재 100살 된 어머니 이효의씨로부터 가양주 담그는 법을 배워 조심스레 상품화하니,
이것이 명가원의 솔송주다.
‘솔송주’는
통훈대부, 제천현감을 지낸
일두 정재범 선생의 집안에서
350여년 동안 전수 중인 사대부 집안의 전통명주다.
솔송주
솔송주에는
발효주(약주) 와 증류주(소주)가 있다.
함양에서 나는 찹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잘 버무려
지리산 자락의 지하 암반수를 부어 발효시키면 13% "약주" 가 되고,
함양 토종 멥쌀에 누룩·솔잎·송순을 원료로 하여 20여 일 발효시킨 뒤 증류해 숙성시키면
도수는 높지만 부드럽고 향기가 은은하며 뒤끝이 깨끗한 40%
"소주" 가 나온다.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유학을 대표하는
동방5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일두 정여창 선생의 고택이 있다.
다섯 개의 정려비가 걸려 있는 솟을대문을 지나면
12동의 건물이 그 멋스러움을 고고히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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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지난 후에 후손들이 중건했다.
무오사화ㆍ갑자사화로 유배와 죽음, 부관참시까지 우환이 이어졌으니
집안을 쉽게 일으키지는 못했을 터다.
고택에는 원래 17동의 건물이 있었지만
현재는 사랑채, 안채, 문간채, 사당 등 12동의 건물만 남아 있다.
사랑채와 안채는 조선 후기에 중수돼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석가산
일두 고택의 가장 큰 특징은
집 안에 "석가산" 을 조성해놓았다는 점이다.
사랑채 누마루 앞에 조성한 석가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산에 흙과 돌, 물과 나무가 있듯이 마당 안으로 산을 끌어들여
자연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정원을 만든 셈이다
마당에 들어서면 높은 축대 위에 다부지게 올라앉은
사랑채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충효절의(忠孝節義)`라는 글이 사랑채 벽면에 붙어 있다.
한지가 겹겹이 붙어 있어 세월의 흔적이 물씬 느껴진다.
한지에 쓰인 글자가 바래거나 해지게 되면
그 위에 다시 한지를 덧대어 똑같이 필사한다고 한다
5개의 편액
고택 입구 솟을대문 안쪽으로
홍살문과 함께 붉은색 목판에 흰 글씨가 쓰여 있는 5개의 편액이 눈길을 끈다.
이 편액은
나라에서 하사한 충효 정려(旌閭, 충신ㆍ효자ㆍ열녀가 살던 고장에 붉은색을 칠한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일)로
집안의 자랑이자 자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징표다.
상 림
고운 선생이 천령군 태수로 있던 시기는 894년에서 897년 사이라고 전해진다,
당시 함양읍은 중앙에 위천(謂川)이 흘렀는데,
매년 여름이면 범람해 인적·물적 피해가 컸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고운선생은 물길을 서쪽으로 돌려 둑을 쌓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에서 가져온 나무들을 10리에 걸쳐 심었고 이를 대관림이라고 명명했다.
이후 숲은 중간부분이 파괴되어 상림과 하림으로 나뉘었고
지금은 상림만 남아있다.
고운선생이
상림 숲을 조성한 후 “모든 미물은 상림에 들어오지 말라”고 외쳤는데
그때부터 숲에는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고운선생이 지역을 떠나면서 “상림숲에 뱀이나 개미가 나타나면 내가 죽을 줄 알라”고 전했고,
숲에서 개미가 나타나자
함양군의 사람들은 ‘고운선생이 신선이 되어 하늘로 갔다’고 믿었다고 한다.
상림은 지난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 154호로 지정됐다.
대관림(大舘林)이라고도 하며,
천년이 넘는 역사와 문화를 간직하고 있어 “천년의 숲”으로 불린다.
위천천의 맑은 물은 사시사철 많은 관광객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으고 있으며,
상림 숲속에 조성되어 있는 오솔길은
이곳을 찾는 연인이나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금호미손
고운 선생은 숲을 만든 후 종료의 표시로 금(金)호미를 힘껐 던졌다고 한다.
그러자 호미는 숲 속의 신목가지에 걸려 ‘뎅그렁’ 소리를 냈고,
이때부터 함양은
그 어떤 재앙도 없는 고장이 되었다고 한다.
"은사시나무"
상림공원에 조성된 꽃 단지
상림공원에 조성된 "연꽃 단지"
"물레방아"
현감으로 부임하면서
지금의 안의면 안심마을에 물레방아를 설치한 데서 연유했단다.
“함양·산청의 물레방아는 물을 안고 돌고, 우리 집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
쉴 틈 없이 아내를 안고
돌았을 함양 남자들 에게 박수를 보
함양군의 상징물이다.
연암 박지원이 1792년 낸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의 몸통이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목"
가지가 합쳐져 하나가 된 것을" 연리지" 라 한다.
흔히 부부간의 금실이나 남녀 간의
깊은 애정을 상징하기도 한다.
상림숲에는 특이하게도 종류가 서로 다른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가
몸통 전체를 결합해 자라고 있는 연리목이 있다
함화루
상림 안에는 함화루가 들어서있다.
이 누각은 본디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이었으나 1932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멀리 지리산을 바라본다’고 해서 망악루라고 했지만
상림 안으로 이전되면서 이름이 함화루로 바뀐 이력을 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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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상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