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네 차례야, 나는 책을 밀었다
나는 0.28심의 파란 볼펜이며 너는 연필이며 그들은 우리들
머리카락처럼 헝클어졌다
'뿌리 염색 하러 갈까?' '점심 먹고 가자'
너의 머리카락에 체류 중인 에메랄드색 속에서 흑역사처럼 올라오는 뿌리는 검다
0.28의 굵기는 사람 눈으로 보기 힘든 침엽수의 감정
여름에도 겨울에도 변하지 않던 감정
파란 볼펜과 연필이 『악의 꽃』 귀퉁이에서 귀를 열었다
선생의 말에는 열기가 넘쳤고 로망스를 호망스라고 호흡처럼 발음하는 프랑스어가 매력적이었는데 우리의 악필은 절박하게 질문하고 답을 구하고 있었다
침묵은 잘 지켜야 한다
영어 단어 끝의 e가 전부 묵음인 것처럼 여기가 아닌 저기에
존재하고 있다
입안에 가득한 이가 전부 묵음인 것처럼, 뿌리 염색과 점심과 젊고 유명한 이의 자살 소식과 그이를 사랑했던 이들이 이를 악물고 몰래 그이가 불렀던 곡을 듣는 시간을
선생은 몰랐을까 티백 속에서 힘이 빠진 초록과
묵음 한번쯤 끓어올랐던 물일수록 더 잘 빙의하는 초록이니까
보들레를, 버지니아 울프, 백석
우리는 이토록 여름만 기억할 거예요 우리는 침엽수처럼 날카로운 말을 했다
그래, 그러거라, 마음껏 연애하고 마음껏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선생의 말을 다르게 받아 적었다 그것은 네가 대답할 수 있는 말이었고
너는 잘 빗나가서 내게로 닿았다
오늘 빛이 좋다와 오늘 날씨가 좋다 사이에서 우리
문장과 단어와 의문부호와 별표와 그림과 x와 헝클어짐으로 가득한 우리
함께 창조한 세계에서 둘뿐인 우리
종이 울리면 밖으로 빠져나오는 우리
우리는 너희들과 이어지지 않아서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었다
[자막과 입을 맞추는 영혼],민음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