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를 타기 전에 젖은 우산을 길가에 터는 사람은
누군가의 곁이 눅눅해지거나
바닥에 물자국이 고이는 일을 염려하기 때문이겠지요
꽃을 주고받는 연인들이
잘게 부순 두부 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너머에 대한 상상은 여기까지입니다
먹구름이 가득한데 선글라스를 쓰고 다녀서 이상한가요
겉멋에 취했냐느니 눈두덩이에 멍이라도 들었냐느니
이유가 꼭 있어야만 하나요
비탈을 오를 땐 지나치게 흔들립니다
좌우로 따라 흔들리고 있는 손잡이를 잡고 나서야
함께 흔들리지 않게 됩니다
팔뚝과 팔뚝이 닿은 채 창가에 앉습니다
옆 사람의 가슴이 부풀고 가라앉는다는 것을 보지 않고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정도의 호흡, 이 정도의 박자로
연결되어 있구나
뱅갈고양이는 러그를 할퀴다가 등을 말고 자고 있을 거구요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거실의 선반 위에 기타 한 대
쌓인 먼지라도 닦아 주었어야 하는데
이런 날에는 음이 엉망으로 바뀌거든요
고데기를 한 머리는 금세 망가졌고
하필 그때 몸도 덜컹거려서 원피스에 커피를 다 쏟으니까요
셀 수 없이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어
놓치는 순간의 장면들이 얼마나 될까요
말랑하고 탱탱한 도토리묵처럼
너무 힘을 약하게 주면 놓치고
너무 힘을 세게 주면 갈라지고 마는
내일을
몇 번이고 더 들어 보는 얼굴
일월과 십일월은 무척 가깝고 어울리지 않나요
같은 계절인데도 마지막과 끝을 착각하는 사람들
잘 지내요 뒷문이 열리면 우리
우산을 앞으로 활짝 펴면서 나갈까요
당신이 다 나갈 때까지 모두가 멈추고 기다려 줍니다
[그 웃음을 나도 좋아해],민음사, 2020.
첫댓글 일월과 십일월은 무척 가깝고 어울리지 않나요
같은 계절인데도 마지막과 끝을 착각하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