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7일 연중 제32주간 월요일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돌아와“회개합니다.”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7,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남을 죄짓게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그러한 일을 저지르는 자!
2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것보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내던져지는 편이 낫다.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4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
5 사도들이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6 그러자 주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
하얀 수건과 온갖 흰천으로 덮인 나무
어떤 청년이 집을 무작정 나와 오랫동안 방황하면서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괴로워하면서 매일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도저히 용기가 나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겉봉투에 보내는 이의 주소는 쓰지 않고 아버지께 편지를 썼습니다. 아버지에게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청하고, 언제인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못난 자식을 용서해 주신다면 그 표로 집 앞 철로 변에 있는 사과나무에 하얀 수건을 매달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 후 청년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에 올랐는데 집 가까이 가면서 사과나무를 얼른 쳐다봤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사과나무에는 하얀 수건이 하나 만 매달린 것이 아니라 잎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온통 모든 가지마다 매달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아들이 못보고 지나칠까봐 아버지는 매일 매일 먼지를 털고 하얀 수건으로 모든 가지를 바꾸어 걸면서 혹시라도 아들이 그 수건을 못 볼까봐 하얀 이불 호청을 뜯어서 나뭇가지에 걸면서 아들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식으로 부모를 미워하고 용서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는 어려서 그리고 젊어서 오랫동안 부모에 대하여 자주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어렵고 힘든 세월이 흐른 뒤에 내가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었고 교만하였는지 아무리 뉘우치고 아파해도 이미 늦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결국 자신을 속박하는 것이 되어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슴을 예리한 칼로 난도질을 하는 것처럼 더 큰 아픔을 겪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웃과 형제자매를 용서하라는 말이 뼈저리게 마음 가득합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런 잘못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면서 나를 위해 기도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그런데 용서하기란 참으로 어렵기만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시고, 도와주시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스페인의 어느 수도원의 성당 고해소의 위에 걸려있는 고상의 예수님의 오른 팔은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사연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십자고상이 걸려 있는 그 고해소에 오래 전에 어떤 한 신자가 엄청난 죄를 짓고 고해를 하였습니다. 고해성사를 주시는 신부님께서 ‘다른 죄는 다 용서하지만 그 죄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였는데 그때 고해소 위의 고상에서 예수님의 오른팔이 슬그머니 내려오면서 그 죄인의 죄를 무조건 용서하라면서 십자성호를 그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죄인을 무조건 용서하시는 예수님의 오른팔이 늘어져 있답니다. (송봉모 신부님, 상처와 용서 중에서)
오늘 복음에서 일곱 번 회개하면 용서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평생에 한 번도 진실로 회개하고 진심으로 용서하기도 힘든데 매일 그렇게 회개하면서 용서하고 살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든지 잘못을 청하기만 하면 한 결 같이 용서해 주시는 주님의 그 사랑이 언제나 크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때로는 그 뜨거운 사랑이신 주님을 느끼면서 가슴 깊이 뉘우치기도 합니다. 그렇게 주님의 성령께서 내게 임하시고, 안배하시고 그런 기적을 일어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내게 오신다면 더 많이 자주 회개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회개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으로 오늘 제1독서에서 티토에게 말씀하시는 바오로 사도의 서간에 명시한 교회 원로(본당 사목임원)에 대한 말씀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기준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에 합당한지 묵상하게 합니다.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원로들을 임명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티토서 시작입니다. 1,1-9
1 나 바오로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입니다.
내가 이렇게 부르심을 받은 것은 하느님께 선택된 이들의 믿음을 돕고 신앙에 따른 진리를 깨우쳐 주기 위한 것으로,
2 영원한 생명의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영원한 생명은 거짓이 없으신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3 사실 하느님께서는 제때에 복음 선포를 통하여 당신의 말씀을 드러내셨습니다.
나는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이 선포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4 이러한 나 바오로가 같은 믿음에 따라 나의 착실한 아들이 된 티토에게 인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 구원자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내리기를 빕니다.
5 그대를 크레타에 남겨 둔 까닭은, 내가 그대에게 지시한 대로 남은 일들을 정리하고
고을마다 원로들을 임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6 원로는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하고 한 아내의 충실한 남편이어야 하며,
자녀들도 신자이어야 하고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지 않아야 하며 순종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7 사실 감독은 하느님의 관리인으로서 흠잡을 데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거만하지 않고 쉽사리 화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술꾼이나 난폭한 사람이나 탐욕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8 손님을 잘 대접하고 선을 사랑해야 하며, 신중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자제력이 있으며,
9 가르침을 받은 대로 진정한 말씀을 굳게 지키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가르침으로 남을 격려할 수도 있고 반대자들을 꾸짖을 수도 있습니다.
축일11월 7일 성 라자로 (Lazarus)
신분 : 설립자, 증거자, 주행자
활동 연도 : 968-1054년
같은 이름 : 나자로, 나자루스, 라자루스
성 라자루스(또는 라자로)는 기둥 위의 고행자인 동시에 수도원 설립자이다. 968년 마녜시아(Magnesia) 근처에서 태어난 성 라자루스는 어린 시절부터 성지 이스라엘에 큰 매력을 느껴, 몇 번이나 그곳에 가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스라엘로 가게 된 그는 거기서 은수 생활을 하다가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성 사바(Sabas)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 후 에페수스(Ephesus) 근처에 수도원 세 개를 세웠는데, 하나는 구세주 수도원이고, 또 하나는 예수 부활 수도원이며, 나머지 하나는 천주의 모친 성 마리아 수도원이다. 그는 수도원 성당 근처에 세워진 기둥 위에 오두막집을 짓고 고행 생활을 한 유명한 주두(柱頭) 고행자이다. 그는 수도자들에게 규칙서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규칙서에서 그는 수도자들의 영육간의 의무를 규정하고,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돌보도록 강조하였다. 1054년 11월 8일에 가레시우스(Galesius) 산에서 사망하였다.
치프리우스의 그레고리우스 2세(Gregorius II) 대주교가 그의 전기를 썼으며, 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14세기의 한 수도자가 그의 수도생활에 관해 썼다. 극기와 절제의 고요한 생활 가운데에서도 가난한 사람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진 성 라자로의 삶은 관상생활과 활동생활의 훌륭한 조화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라자로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