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정치인들이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실질적인 수도인 로스엔젤레스를 방문할 때면, 우아한 레스토랑에서 이민 1세대들과 모임을 갖고, 한국에서 했던 업무와 똑같은 일들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마치 우물안 개구리처럼, 그들은 바깥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영어를 못하는 언어 능력이 그들을 제약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1960년대부터 로스엔젤레스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금융인 하워드 리는 말했다.
그러나 지난 금요일, 서울에서 온 한 색다른 유형의 한국 국회의원이 코리아타운의 한 호텔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젊은 신세대 코리안 아메리칸들과 함께 어울려 유창한 영어로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토론을 함으로써, 이민 사회의 전통을 깨뜨렸다......
그들이 표현한 "색다른 유형의 국회의원(different breed of lawmaker)", 그가 바로 이부영이다.
'과격한 재야인사' 또는 '강인한 야당투사'의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이부영 의원을 직접 만나게 되면 두 번 놀라게 된다. 부드러운 인상과 합리적인 논리 전개가 바로 그것이다. 맑은 미성의 목소리와 정확한 서울 표준말에 담긴 정연한 논리 전개는 많은 정치학자와 기자들이 한국을 이끌 차세대 지도자로 그를 손꼽는 까닭을 밝혀주는 열쇠이다. 어떤 스타일리스트가 그를 '한국에서 안경이 가장 잘 어울리는 남자'로 꼽았을 정도로 부드러운 인상 역시 그의 미덕중에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부드러움과 합리적 사고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삶에 있어서 일관된 원칙을 유지해 온 강인함이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는 이부영 의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살아온 내력을 잠시 일별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부영 의원은 올해 만 60세(42년생, 말띠)로 용산고등학교(1961년)와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1969년)했다. 그 즈음의 연배가 대개 그러하듯 이부영의 학창시절도 평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거주하던 영등포에서 남산 밑에 있는 용산중·고등학교까지 4시간 넘는 거리를 때론 걷고, 때론 차를 타고 다닌 덕에 지금도 젊은 사람 못지 않은 튼튼한 체력과 두 다리를 지닐 수 있게 됐으며, 신문 배달을 하며 고학을 했던 내력은 근검과 절약을 몸에 배게 했다. 그의 고교 동창들은 그를 '얌전한 모범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 얌전한 모범생이 정치의식에 눈 뜬 사건은 60년 그가 고3이던 당시 일어났던 4.19 학생혁명이었다. 그와 절친했던 이한수 군이 흉탄에 맞아 숨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기계공학도가 되어 좋은 농기계를 만들어 농업 생산력 발전에 기여하겠다는 다소 낭만적인 꿈을 가지고 있던 이부영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정치가 우리 삶의 근본 문제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되고 결국 서울대 정치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서울대 정치학과 시절과 동아일보에 근무하던 현역 기자 시절 이부영은 전후의 척박한 사상적 풍토속에서 희망의 불씨였던 <思想界>의 발행인이자 대표적인 민족운동 지도자중에 한 사람인 故장준하 선생으로부터 커다란 정신적 영향을 받는다. 재야시절 그가 지녔던 지사적 풍모와 투철한 민족 정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장준하 선생의 세례라 할 수 있겠다. 장준하 선생은 이부영에게 정신적 영향뿐만 아니라 또 하나의 아주 구체적인 영향을 미쳤으니, 이부영의 부인 손수향 여사는 당시 장준하 선생을 모시고 함께 일하던 비서이자 동지였던 것이다.
사회운동가로서 이부영의 삶은 1974년의 동아일보 파동 때부터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의 무자비한 언론탄압에 맞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1974년)의 대변인을 역임하면서, 75년 7월에 '민완 기자 이부영'은 2년6개월 동안의 첫 번째 징역살이를 하게 된다.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던 유신독재에 맞서 언론자유를 위해 앞장선 그의 모습을 회상하며 입사동기이자 함께 거리로 쫓겨났던 성유보(현 민주언론운동연합 이사장)씨는 '행동가이자 조직가로서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후 이부영은 유신 시절에 두 번, 80년대에 세 번 등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총 6년8개월을 감옥에 갇혀 지냈다. 또한 12차례에 걸쳐 짧게는 열흘에서 길게는 한 달의 구류 처분을 받기도 했다.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서울민주투쟁연합> 의장, 해방이후 최대의 재야 연합 조직이었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의 초대 상임의장 등을 역임하면서 7∼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고비고비마다 그의 땀과 눈물이 베어 들게 된다. 87년 영등포교도소에 갇혀 있으면서도 같은 교도소에 수용된 고문 경찰관을 취재하여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조작 경위를 밝혀내 6월 항쟁의 불씨를 당기는 등 언제, 어디서든지 치열한 투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7∼80년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이부영은 90년 3월 재야의 삶을 뒤로하고 야권통합추진회의(통추회의)를 이끌고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여 부총재로써 제도권정치에 본격적인 발을 들여 놓게 된다. 그는 당시 김대중씨가 이끌던 신민당과 이기택 씨가 이끌던 민주당을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야권 통합에 힘을 기울인다. 그 결과 일부재야 세력까지 합친 통합야당 민주당 창당의 주역이 된다. 그러나 통합야당 후보 DJ가 92년 대선에서 YS에게 패배하자, 그는 좌절을 딛고 '지역주의 청산, 세대교체, 3김청산'을 내걸고 새로운 야당의 모습을 건설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이 명분은 이후 그의 정치적 신념이 된다.
그러나 95년, 정계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씨는 이부영의 땀과 눈물이 스민 통합민주당을 깨고 국민회의를 창당하여 야당은 분열되고 만다. 이부영은 이에 맞서 통합민주당에 잔류하였고, 96년 15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는 서울 지역에서 유일하게 당선된다. 그러나 당선의 기쁨을 누리기에는 박계동, 이철, 유인태 등 이부영과 함께 정치개혁을 주도하던 젊은 정치인들의 좌절과 패배는 너무 큰 아픔과 시련을 안겨주고 말았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 절치부심, 통합민주당의 재건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러나 그 혼자만의 힘으로 넘어서기에는 현실 정치의 벽은 높고도 험했다.
97년 15대 대통령선거를 맞아 현실 정치인으로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할 것을 강요받는 상황에서 그는 오랜 고민 끝에 김대중-김종필 연합 대신 이회창-조순 연합을 택했다. 이회창-조순 연합이 이부영이 부여잡고 씨름해 온 화두인 지역주의와 권위주의 색채가 상대적으로 덜했고, 3김 청산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조합이기 때문이었다.
결국 이회창-조순 연합은 대선에서 패배했으며, 그후 집권당이 된 국민회의는 한나라당 의원들을 36명이나 빼내가면서 야당의 기반을 송두리째 파괴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정치세력간의 균형과 견제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야당을 파괴하려는 행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이에 이부영은 한나라당 야당파괴저지투쟁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위기에 처해 있던 야당을 지켜내고 대여투쟁을 주도했으며, 99년1월에는 재선의원이지만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의 원내총무로 선출되어 헌정사상 최초의 특별검사제 도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여당의 선거법 개악을 저지하여 한나라당이 16대 총선에서 승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2000년 4월에 실시된 16대 총선거(강동갑)에서 무난히 3선 의원이 된 이부영은 같은 해 5월 실시된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출되어, 야당의 개혁을 주도하는 지도부의 대열에 당당히 서게 된다.
이제 이부영은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추구하는 삶과 국가의 미래상은 백범 김구가 원했던 '아름다운 나라'와 맥이 닿아 있다. 그가 꿈꾸는 사회를 들어보자.
"우리 내부로는 복지와 민주주의가 충만한 나라, 밖으로는 평화를 나눠주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나라를 '평화국가', '균형국가'로 표현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변국 어느 나라에게도 기울지 않는 나라, 우리로 인해 동북아와 세계의 평화가 유지되는 그런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
끝으로 사족 한 마디. 흔히 정치인들은 호의호식할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지만, 손수향 여사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 이부영은 강동구 길동의 방 세 칸짜리 24평 서민 아파트에서 20년 넘게 살고 있는 여러분들의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