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가불자 수행지침
③알아차림
수행의 또다른 원리는 알아차림이다. 현재 자신의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그것이 일어남과 유지됨과 사라짐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실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들뜬 의식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여실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숨쉬기에 얼마나 깨어있는가. 숨쉬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밥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몸가는데 마음 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중에 알아차림을 잃지말라고 하셨다.
선지식을 구하고 선호조(善護助)를 구하는 것은 생각을 오롯하게 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念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각찰(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오욕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유교경>
(4)지금 여기
알아차림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음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라고 하는 것도 한 순간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오직 지금 이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순간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음으로써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다. 상념과 온갖 환상에 속지않고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⑤일심으로
어떤 일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과를 증득하는 해법은 열심히 하는데 있다. 그것은 일심이 됐음을 의미한다. 일심으로 해서 안되는 일이 없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화두를 타파하는 모든 것이 모두 일심이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일심이란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어떤 하나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즉, 염불이면 염불, 진언이면 진언, 화두면 화두에 일념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 자체가 되버릴 때 무지가 자리를 비껴나고 본성광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심을 방해하는 탐심, 진심, 치심, 의심, 산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일심이 될 수 없다. 특히 진심은 마음을 격동시키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잘 경계해야 한다. 또한 내가 재대로 하고 있나? 나를 가르치는 사람은 진짜 깨달음을 얻었을까? 등의 의심, 수행의 해서 뭘 어떻게 해봐야 겠다거나 빨리 이루고자 한다거나 결과에 연연하는 것 등의 욕심, 수면욕·식욕·성욕 등의 습관적 욕구(본능적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욕망이라는 습관적 의식작용이 결부될 때가 많음),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로 일어나면서 일심을 방해한다. 이럴 때에는 적절하게 그것들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각각에 대해서는 참선편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⑥계·정·혜의 통일
계정혜 삼학은 불교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수행의 세가지 측면이다. 먼저 계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여 수행자들이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지침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안정되면 선정을 통해 더욱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맑게 한다. 그리고 고요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게 계는 정의 바탕이 되고 정은 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선적으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혜가 생기면 어떤 것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 알게 된다. 또 정이 깊어지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계를 지키게 된다. 또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끝과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라고 가르기도 힘들고 어느 한쪽만 취하기도 어럽다.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분들도 정혜쌍수라 하였다.
<익진기(翼眞記)>에 말하였다.
"선정과 지혜 두 말은 바로 삼학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다. 계율이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는 것이요, 선정이란 이치에 맞추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는 뜻으로서 여섯욕심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며, 지혜란 법을 가지고 공을 관한다는 뜻으로서 묘하게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이 처음에 수행할 때에는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하는 것이다. 또 삼학에는 상을 따르는 것과 성에 맞추는 것의 구별이 있다. 상을 따를느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고, 성에 맞음이란 이른비 이치에 본래 <나>가 없는 것은 계율이요,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선정이며, 이치에 본래 헷갈림이 없는 것은 지혜다. 이 이치만 때달으면 그것이 곧 진정한 삼학이다."
그러므로 조계스님이 "본마음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율이요, 본바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본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다." 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선정과 지혜의 그 이름은 다르나 요는 그 당자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보통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위 없는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 하고 그 게송에,
번뇌의 화살을 막
은 지혜를 지키는 고장으로서 온갖 공덕의 복밭이라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큰 비가 그거슬 능히 씻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으면 선정이 능히 그것을 없앤다.
고 하였다.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