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차례 말한 바이지만 혹독한 고문과 고통 없는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지금 저의 생각으로는 고통 없는 죽음을 택할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중풍을 앓으며 오래 사는 것보다 안락사가 나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통을 오래 견디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이런 저와 달리 김대건 신부님이나 순교자들은
죽음보다 괴로운 고통을 통과하고 순교까지 한 분들인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두 가지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얘기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희망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입니다.
희망이 앞에서 끌어주고 사랑이 뒤에서 밀어준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뒤에서 밀어주고,
하느님 나라의 희망이 우리를 앞에서 끌어줍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모든 환난을 견딜 수 있고,
하느님 나라에 가리라는 희망 때문에 모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바오로 서간은 그 희망이 어떻게 생기냐 하면
환난과 고통을 견뎌내면서 생기는 것이라고 또한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 인내는 환난을 겪으면서 생기고 자라납니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인내력은 환난을 통해서 생기고 자라납니다.
여기서 인내력은 인내심과 다르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인내력이 인내할 수 있는 힘이라면 인내심은 인내하려는 마음가짐인데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 나라에로의 희망이 우리에게 인내심을 준다면
인내력은 환난을 실제로 겪으면서 생성되고 자라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하면서 순교의 열망이나 희망이 우리에게 생길 수 있지만
실제 순교 상황이 되고 환난을 겪게 되면 그로 인해 우리의 열망과 희망이
시련을 받아 꺾일 수도 있고 단련을 받아 오히려 인내력이 자랄 수 있지요.
그래서일까, 200주년 성경과 옛날 공동 번역 성서와 개신교 성경은 각기
“환난은 인내를 생기게 하고, 인내는 단련된 품성을, 단련된 품성은 희망을 생기게”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게”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라고 좀 다르게 번역합니다.
그러니까 기도 안에서 막 잉태된 순교의 희망과 열망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것으로,
환난과 고통으로 시련도 받고 단련도 받아 어른의 희망과 열망으로 자라야 하는데,
이러기 위해서는 인내심만 가지고는 안 되고 인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거지요.
그래서 너무도 편안한 신앙생활,
고통이나 환난이 없는 신앙생활,
고통으로 단련되지 않는 신앙생활이
우리의 신망애 삼덕을 약화하고
신앙을 약화함을 걱정하고 반성하는 오늘 우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