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생명 말씀(2023.2.19.) 말씀/ 마가 3:13-14 배우는 자가 되라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어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하심이러라”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3:13-14)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모두 열두 명입니다. 열두 제자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야고보, 요한, 안드레, 빌립, 바돌로메, 마태, 도마, 알패오의 이들 야고보, 다대오, 가나안인 시몬, 가룟 유다입니다. 제자들은 어부, 세리, 열혈당, 의심 많은 자, 후에 배반자까지 다양한 직업과 기질의 사람들입니다. 이름이 각자 다르고 또 예수님이 각 사람의 특질대로 별명을 붙여주신 것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각자에게 맞는 교육 목표를 두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의 원하는 자’를 부르셨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만들어주겠다’. 주님의 의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나는 도마인지, 왜 나는 베드로가 아니고, 안드레와 빌립은 누가 더 훌륭한지 비교하는 것이 의미가 없습니다. 쌩떽쥐베리는 그이 책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를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라 만약 자연이 그대를 박쥐로 만들어놓았다면 그대는 타조가 되고 싶다는 그런 따위의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박쥐는 박쥐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타조는 타조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 박쥐가 우월하다거나 타조가 우월하다는 식의 발상은 무척 위험하다. 박쥐와 타조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코 비교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대에게 주어진 사명을 따라 행하라. 용기를 가지고 그대가 결정한 길을 따라 망설이지 말고 걸어가라. 지금은 한 배를 타고 배우지만 각자이길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3년 반 제자 훈련이 끝난 후 부활하신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났을 때 베드로가 요한을 가리켜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는가 묻자 에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찌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각자이 길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있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가? 가장 큰 목적은 예수님과 가까이에서 생활하며 배우는 자가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장기적 안목을 가지시고 제자를 양성하여 예수님과 똑같은 사역을 계승하여 섬길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수는 딱 열둘 함께 하기에 좋은 수입니다. 함께한다는 것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고, 함께 길을 걷고, 함께 전도도 하고, 함께 무리들을 섬기고.. 이렇게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며 배우는 자이며, 주님의 생명 역사에 직접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함께 살면서 보고 듣고 체험하면서 가장 잘 배울 수 있습니다. 멀리서 수 많은 군중들 가운데서도 듣고 배울 수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음식을 나누며 질문도 하면서 눈을 바라보며 배우는 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난 번에도 이야기했지만 가치 투자의 달인이라 불리우는 워렌 버핏과 점심 식사 한번 함께하는데 얼마라고 했습니까? 65만100달러(약 9억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책들이 나왔음에도 부구하고 식사를 함께하며 만나려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가까이에서 직접 들으려는 것ㅇ지요. 주인공 헤지펀드사의 CEO인 가이 스피어라는 사람은 버핏과 점심식사를 하고 전혀 후회하지를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매주 화요일마다 예배 후마다 모여서 말씀을 나누고 독서 소감을 나누며 서로 배우는 시간을 갖고 있는데 이런 배움의 생활공간이 있다는 것 정말 큰 은혜 아니겠습니까? 작은 무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임을 믿습니다.
지난 주 수요 독서 모임 때 최광휴 선교사님이 딸 최신혜 자매가 함께 참여했습니다. 신혜 자매는 두 번째 참여한 것입니다. 사실은 다음날 일이 있어서 인천에 올라가야하는데 최 선교사님이 딸이 한 번 더 참석했는데 딸을 사랑하는 아빠가 배움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데리고 온 것입니다. 그 대신 “아빠가 밤에 너를 인천에 데려다 주겠다“ 약속을 했고, 그날 모임 끝나고 밤 10시가 넘어서 인천으로 출발을 하였습니다. 대단한 아빠 대단한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질문을 해라, 의문을 품어라 하는 책의 내용을 생각하며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질문한다는 것은 배운다는 것입니다. 공부하면서 신혜 자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을 하면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데 아니라. 지금부터 인생 공부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체적으로 하는 공부로 그게 진짜 공부라고 했습니다. 책을 많이 읽ㅇ라고 하였습니다. 최신혜 자매도 이번에 대학 졸업을 하고 간호사로 병원에 취업을 했지만 전체적인 목표 방향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데 무엇인가를 의문을 갖고 질문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고 하였습니다. 레오버스가 글리오는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책을 통해서 우리가 숨 쉬고 있는 사는 동안에는 살며 사랑하는 것과 배우는 것이 계속 되어야함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또 일본 작가 사이토 다카시는 점수를 위한공부, 인정 받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공부라고 하라. 무엇인가를 즐기며 배우는 호흡이 깊은 공부라고 하였습니다. 성경도 우리에게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통해 배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눅 2:46-47). 어떻게 공부하고 배우는가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말씀입니다. 핵심 단어가 무엇입니까? 묻고 듣는 것입니다. 정말 잘 배우는 사람은 두가지를 잘 하는 사람입니다. 묻는 사람, 잘 듣는 사람, 평상시 무엇인가를 알려고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묻는 사람만이 답을 얻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교툐대학 출신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유카와 히데끼 박사는 만년에 거의 매달 열리다시피한 젊은 연구자들의 담화에 참석해서 맨 앞줄에 앉아 종잡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때론 주제와 벗어난 것같은 질문도 끊임없이 던졌는데 오히려 그런 질문이 연구자들이 놓치기 쉬운 맹점을 찔러 새로운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근대 프랑스가 낳은 가장 위대한 수도자였던 샤를 드 푸코(Charles de Foucauld)는 사람이 있습니다. 1858년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였기에 그 역시 태어나면서부터 신자였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린 나이에 양친(兩親)을 여의면서 그는 신앙의 길을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장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반란군 진압에 투입되어 상관의 명령에 따라 반란군의 심장을 겨누어 총을 쏘면서 그는 인생에 대하여 큰 회의(懷疑)를 느꼈습니다. 그 후 군대를 스스로 떠나 학자로서 모로코를 탐험하던 중 그 곳의 이슬람 교도들이 깊은 신앙 속에서 신앙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하느님을 향해 시선(視線)을 돌리고 다시 가톨릭으로 귀의(歸依)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의 수도원 생활을 거쳐 그의 나이 43세 되던 1901년 신부 서품을 받은 후 당시 세상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여겨지던 아프리카 사하라의 베니아베스로 들어가 1916년 12월 한 토착민이 쏜 총에 맞아 숨질 때까지 15년 동안 그곳에서 원주민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느 날 푸코는 나무를 보면서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자신의 잎이나 부서져 나가는 가지에 대해 아무런 염려를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떨어지지 못하도록 기를 쓰거나 떨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전혀 안달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그저 의연할 뿐이었습니다. 이 사람ds 나무에게서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나무도 그런데 그렇다면 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재물(財物)이나 건강이나 생명 때문에 염려하고 절망한다는 것은 스스로를 하찮은 나무보다도 더 못한 존재로 전락(顚落)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근심하거나 탄식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자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니까? 그러나 정말 스스로 반문해보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정말 하나님을 향해 부족함이 없는 신앙을 갖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어러분, 진짜 향나무와 가짜 향나무의 차이를 구분하는 방법 아시나요? 도끼에 찍히는 순간에 나타난다고 합니다. 향나무는 찍힐수록 향기를 더욱 진동하지만, 가짜는 찍을수록 도끼의 날만 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똑같아 보일 수 있지만 찍히면서 비로소 진위(眞僞)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느님을 믿는 자(者)인가 아닌가는 평소에는 판가름 나지 않습니다. 오직 결정적일 때에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내 건강이, 내 재물(財物)이, 내 생각이, 내 뜻이 찍히고 떨어지고 빼앗기고 부서지고 깨어져 나갈 때, 바로 이러한 순간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맞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일 때, 가장 중요한 순간에, 가장 믿음이 필요할 때에 포기하거나 원망하거나 비(非) 신앙적인 길을 걷는다면 우리는 아직까지 참된 신앙인(信仰人)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샤를르 드 푸코는 그리스도인들이 이처럼 결정적일 때 오히려 비 신앙적으로 처신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다. 첫째는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보기 때문이요, 둘째는 하나님보다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더 크게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무엇이 보이는가? 참으로 적절한 지적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들여다보는가 하나님을 바라보는가?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극대화하여 보는가?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요, 그 누구보다 비참한 사람이요,내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자라는 피해망상에 젖는다면 절망 외에 더 얻을 것이 없게됩니다. 믿음이 없으면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으먼 그렇지 않습니다. 지난 주 큐티 역대하 말씀 중에 유다가 암몬과 싸우려고 드고아 들로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역대하 20:20) 어호사밧은 어떤 상황이나 어려움 속에도 우리를 도우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전쟁의 승패를 잡고 계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끝까지 신뢰하라고 백성들을 독려하였습니다. 그는 백성과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며 여호와께 감사 찬송케 했습니다. ”여화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그 믿음대로 하자 하나님이 암몬과 모압과 세일의 사람들과 싸우시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매일 쿠틸르 통해서 이런 성경 말씀을 묵상하고 새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우는 것입니다. 나 보다 더 좋은 성숙한 믿음을 배우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하려는 것입니다. 왜 성장합니까? 성장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고, 가장 좋은 길로 안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묻고 들으면서 누구에게든지 무엇에서든지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샤를 드 푸코의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라는 시가 있습니다. 많은 것을 생가하게 하는 시인데 조용히 묵상하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가 좀 깁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으로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사랑 받을 만한 사람이 되는 것뿐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선택입니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쏟아 다른 사람을 돌보아도 그들은 때로 보답도 반응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최대치에 나 자신을 비교하기보다는 내 자신의 최대치에 나를 비교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인생은 무슨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일어난 사건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사랑의 말을 남겨 놓아야 한다는 것을. 어느 순간이 우리의 마지막의 만남이 될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을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마음을 비우는 자들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영웅임을 나는 배웠습니다. 사랑을 가슴 속에 담고 있으면서도 이를 나타낼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에게도 분노할 권리는 있으나 타인에 대해 몰인정하고 잔인하게 대할 권리는 없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진정한 우정은 끊임없이 두터워 진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도 이와 같다는 것을 내가 바라는 방식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이 아님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또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라고 해도 때때로 그들이 나를 아프게 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용서받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고 내가 내 자신을 때로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내 슬픔 때문에 운행을 중단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라도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오로지 나 자신의 책임인 것을. 우리들이 서로 다툰다고 해서 서로가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님을. 그리고 우리들이 서로 다투지 않는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것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밖으로 들어나는 행위보다 인간 자신이 먼저임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가지 사물을 바라보면서도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앞과 뒤를 계산하지 않고 자신에게 정직한 사람이 결국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서 앞선다는 것을. 내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에 의하여 내 인생의 진로가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을 도울 힘이 내게 없다고 생각될 때에도 사람들이 내게 울면서 매달릴 때에는 여전히 그를 도울 힘이 나에게 남아 있음을 나는 배웠습니다. 글을 쓰는 일이 대화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 마음의 아픔을 덜어준다는 것을 나는 배웠습니다. 나는 배웠습니다. 내가 너무나 아끼는 사람들이 너무나 빨리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그리고 정말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과 나의 믿는 바를 위해 내 입장을 분명히 한다는 것, 이 두 가지 일을 엄격하게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을 받는 것을...
1984년, 일본 도쿄에서 진행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한 무명의 마라토너 야마다 혼이치(山田本一)가 우승컵을 차지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한적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 밀라노에서 국제 마라톤 대회에서 그는 또다시 금메달을 따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기자들이 비결을 묻자 그는 2년 전과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나는 머리로 달렸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도대체 머리로 달리다니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비밀은 10년 뒤 선수생활을 은퇴한 그가 출간한 자서전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출발선을 나서면 선수들의 목표는 40k미터밖의 결승선에 걸린 깃발 이었습니다. 길고 긴 거리를 달리면서 선수들의 흥분과 긴장은 점차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0km를 달리고 나면 이미 지쳐서 자신도 모르게 속도가 늦추어지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 야마다 혼이치도 고민을 하였습니다. 머리를 썼습니다. 목표는 크지만 실천은 작게 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표점을 작게 나눈 것입니다. 주변 도로, 건물, 상표, 나무 등등, 한 코스 한코스를 목표로 하여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전력해서 달릴 수 있었고, 40km까지 마침내 도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재능 있는 선수도 아닌데 1등을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표점은 분명히 저 천국 맞습니다. 최고의 목표점입니다. 그러나 실천은 작게 잡고 실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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