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아버지는 제가 연방교도소에서 8년의 형을 살고 출감하기 4개월 전에 그리고 기다리시던 아들의 출감을 보시지 못하고 9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님의 3주기를 맞이하는 이번 주에 저는 그분이 마지막 남긴 산정연구 100호를 열어 보게 되었습니다. "산정연구"는 당신이 가장 보람을 느끼시면서 경영하던 한 경제연구소의 간행물입니다. 그가 쓴 "88세(미수)의 인생을 회고해 본다."라는 제목의 권두언을 읽으며 먼 타국에서 아버지의 기일을 맞아 그분의 얼굴을 한번 더 그려봅니다.
글에서 아버지는 "1933년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금융인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미수의 나이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이지만 돌이켜 보니 한 순간이다. 인생을 돌아보니 보람된 일도 많았고 아쉬운 점도 많았는데 크게 네 가지 일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계셨습니다.
첫째, 금융인으로서의 인생이다. 1933년 조선은행에 입행하여 1961년 한국은행 부총재로 그만둘 때까지 28년의 청춘을 은행에 다 바쳤다고 할 정도로 바쁘게 열심히 살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한국은행맨’이라고 자부할 만큼 한국은행은 나의 고향이었다. 해방과 전쟁직후라 한국의 산업은 크게 볼 것이 없었고 은행이 한국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을 때였는데 은행 중의 은행인 한국은행에서 잔뼈가 굵었다는 것이 큰 보람이다.
둘째, 민간경제인으로서의 인생이다. 5.16 직후 한국은행을 그만두고 잠시 혁명정부에서 일하다가 세계 일주를 하였다. 돌아와서 1964년 한국경제인협회(현 정경련) 상근부회장으로 취임하여 1971년 국회에 진출하기 전까지 7년간 전경련의 초석을 다졌다. 이 때 우리나라의 민간경제의 실상에 대해서 자세히 알게 되었고 훌륭한 기업인들과도 알게 되었다. 이 때 는 한국의 주요기업과 국가경제가 막 세계로 도약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는데 이 당시 민간 경제사절단을 이끌고 수출 향상을 위해 세계 곳곳을 누비던 것이 큰 보람이었다.
셋째, 정치인으로서의 인생이다. 오랜 기간 금융업무와 실물경제를 익히고 나이도 그만하니 고향과 나라를 위해서도 봉사 할 만 한 때이기도 했다. 다행이 박대통령의 배려로 공천을 받아 고향 여수에서 1971년 출마하여 8, 9대 의원생활을 8년 했다. 경제전문가가 드문 국회에서 경제통으로 일했는데 이때는 한국의 경제가 탄탄한 기초를 닦은 시점이기도 하다.
넷째, 국회의원으로 일하면서 창업한 산업경제연구소의 일에만 전념한 시기다. 3남인 김성곤 (현 국회의원)이가 고대학생회장으로 반유신 데모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10대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하여 정계를 은퇴한 것이다. 그러나 성곤 이가 나의 뒤를 이어 고향여수출신 국회의원으로 봉사하고 있다.
솔직히 나는 은퇴를 생각하지 않고 "죽을 때 까지 현역으로"라는 심정으로 현장에서 쓰러져 죽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나는 노인들이 은퇴하면 할 일 없이 놀러 다니고 아이들 신세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달리 건강에 신경을 써 건강도 좋았으나 5년 전 터진 로버트 김 사건은 나를 그만 일에서 쉬게 만들었다. 내 인생의 말년에 일어난 청천벽력의 사건, 즉 채곤 (로버트 김)이가 미국 해군 정보국에서 일하다가 우리조국을 돕기 위해 문건을 유출한 것이 간첩혐의를 받아 9년형을 받은 사건, 나는 지금도 큰아들을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그래서 가능하면 그 일을 생각하지 않으려 했는데 작년에 감옥에 있는 큰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기 위해 미국 연방교도소에 에 면회를 갔었는데 그 만 그곳에서 쇼크를 받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미국에서 엎여 오다시피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생을 마무리하면서 소원이 있다면 큰 아들 채곤 이가 빨리 교도소에서 나와 자유로운 몸이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의 노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또 하나의 소원이 있다면 내가 30년 동안 정성을 쏟은 이 연구소가 앞으로도 조국과 인류 세계를 위해 계속 봉사할 수 있는 길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 김상영은 기억하지 못해도 이 연구소는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노욕일까?
이상이 당신의 마지막 바람이었는데, 장남의 출감도 못 보시고 또 아끼시던 연구소의 문도 닫게 되어 그의 소원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 한스럽기만 합니다. 더욱이 강직하시던 당신이 이 아들 때문에 눈물 흘리시며, 오직 자식 걱정만 하시게 한 불효가 죄송스러우며, 당신을 위해 효도 한번 못해본 것이 한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