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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의 축복에 나타난 복음 (민 6:22-27)
이 시간에 “신구약의 축복에 나타난 복음”이라는 제목으로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복을 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우리 부모의 마음과도 같습니다. 육신의 부모보다 백배 천배 더 복 주시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여러분, 정말 복을 받고 싶습니까? 그러면 먼저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축복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27절에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하셨습니다.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해야 복을 주십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하면 축복하지 않으면 복을 주지 않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축복이 중요합니다. 축복하면 복을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축복할 때 항상 하는 소리거니 하면서 무시하지 말고 아멘으로 붙잡아야 합니다. 구약에는 제사장의 축복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셨고, 신약에는 사도들이나 주의 종들을 통해서, 나아가 우리 믿는 자 서로서로를 통해서 축복하게 하시고 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롬12:14에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하셨습니다.
그런데 신구약의 축복 속에는 하나님의 거대한 복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고후13:13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하신 말씀입니다. 구약의 축복은 본문 민6:24-26입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내용은 다른 것 같지만 살펴보면 신구약의 축복 모두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신구약의 축복 속에 하나님의 귀한 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1. 축복 속에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4절에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기 지키신다는 말은 ‘솨마르’인데 “가시 울타리로 둘러친다.”는 의미입니다. 악한 원수가 넘보고 침입하지 못하도록 특별히 보호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악한 세력으로부터의 보호뿐 아니라 가난과 재앙과 각종 질병과 전쟁으로부터의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랑의 날개 그늘 아래입니까? 그래서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24절은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은 영구불변의 복음입니다. 복음은 믿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 같지 않으신다면 그 생각을 물리치시고 이 사랑의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야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요3:16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요일4:10-11에도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한다는 말씀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그 사랑을 많이 받아야합니다. 나무도 동물도 사랑 받고 커야 잘 자란다고 합니다. 미국 예일 대학교의 베카 리비 박사는 최근 발표한 논문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평균 7년 6개월을 더 산다고 합니다.
미국 뉴욕에 에드워드라는 기독교 아동병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이 많은 병원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다른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는 병을 다 고칩니다. 많은 의사들과 제약회사에서 몰려와서 그 비결을 물으니 "우리가 쓰는 약은 T.L.C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처음 들어본 약이라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T.L.C는 Tender(텐더, 부드러운), Love(러브, 사랑), Care(케어, 보살핌, 치료)의 약자로 '부드러운 사랑으로 치료를 한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치료를 하지만 사랑해 줄 때 치료의 효과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히 변함없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2. 축복 속에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5절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랬습니다. 은혜란 구약에서 ‘헤세드’나 ‘헨’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구원행위(출15:13), 하나님의 축복, 은사들(민6:25), 용서하심(시 85:1), 보호와 안위(렘31:2)라는 의미입니다. 신약에서는 은혜를 ‘카리스’라고 하는데 기쁨, 매력, 총애, 호의적 반응, 감사, 좋은 뜻 등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온갖 좋은 것들이 다 은혜입니다. 신약이 축복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얼굴에 이 은혜가 달렸습니다. 얼굴을 향해 주시면 은혜이지만 얼굴을 돌리시면 버림이십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신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얼굴을 돌리신다면 그것은 절망과 고통과 죽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더라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완전한 은혜를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속죄함을 받은 사람에게 얼굴을 비춰주십니다. 죄인에게는 얼굴을 감추시지만 의인에게는 얼굴을 향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난다는 것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말한 것입니다.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고 버림받을 수밖에 없는 우리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 받게 된 것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용서와 해결과 부활과 승리와 권세와 모든 복이 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제불능의 죄악 가운데 있을지라도 예수님께서 나의 주가 되셔서 나를 다스려 주시면 다 해결 되고 고쳐집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심을 고백하고 나를 다스려 달라고 기도하면 그 어떤 악습도 다 고쳐주십니다. 다스려 달라는 그 기도가 응답 되었다는 확신이 올 때가지 엎드려 있어 보세요. 그 시간부터 고쳐진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그 앞에 엎드려 나에게 주신 은혜를 묵상하면서 확신으로 다가올 때가지 기도해 보세요. 예수님의 구원이 나의 구원으로 예수님의 영광이 나의 영광으로 다가오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축복할 때 그 은혜를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 내용 자체가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3. 신구약의 축복 속에 성령의 교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26절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이 구절에 성령이라는 용어는 없지만 평강이라는 낱말에서 성령의 역사가 암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든다.”는 말씀은 훨씬 특별하고도 적극적인 하나님의 관심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 친히 임하셔서 느끼도록 체험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임재하시는 복입니다.
여호수아 리프맨이라는 소설가가 쓴 <마음의 평안>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소원을 들어주는 노인을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① 건강이고, ② 재물이고, ③ 미모이며, ④ 재능이고, ⑤ 권력이고, ⑥ 명예입니다.” 이 청년의 소원을 다 듣고 난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청년이여, 그것이 자네를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은가? 거기에 평안이 없으면 아무 것도 즐길 수가 없다네.” 그 말에 깨달음을 얻은 청년이 노인에게 부탁합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평안을 빌어주십시오. 다른 것은 없어도 좋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교훈은 평안의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평안의 복은 성령께서 주십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평안이 옵니다. 시127:2에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셨는데 참 평안을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평안해야 단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 평안은 성령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아무리 무관심하고 거부해도 거부할 수 없게 어떤 일을 주셔서라도 기도하게 하시고 은혜 받게 하십니다. 성령 충만도 바로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주실 것을 조금도 이심하지 말고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요14:27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평안을 누리고 싶지 않으십니까? 황량한 광야 같은 인생길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평안의 약속만큼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외로워서 죽는답니다. 고독처럼 불행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평강 누리면서 사십시다. 예수와 함께 사십시다. 엎드려 많이 기도하고 교통하면 성령이 임하십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한 복을 받길 원하십니다. 신구약의 축복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음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축복은 사람이 하지만 복은 하나님이 주십니다. 우리 모두 예수를 나의 주로 잘 믿고 하나님 잘 공경하여 아버지의 사랑이 넘치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타나고 성령의 평강이 강물 같이 흐르는 가장 복 받은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agaser
하원식 목사 / 복은 하나님이 주신다. (민 6:22-27)
제사장의 축복 기도
민수기 6장 22-27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추 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오늘은 구정입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 새해가 된 것입니다. 옛 선조들은 "하루의 시작은 아침에 있고, 일 년의 시작은 정초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정초의 계획이 1년을 좌우하기 때문입니다. 정초에 좋은 계획들을 세우면 일 년을 의미 있게 지낼 수 있지만,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되는 대로 살다가는 한해를 망치게 됩니다.
1월을 영어로 January라고 하는데 이것은 희랍의 신중에 '제누아스'라는 신의 이름에서 온 것입니다. '제누아스'는 두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뒤에 있어서 지나간 일 년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며, 하나는 앞면에 있어서 또 앞을 내다보고 희망을 설계하라는 의미가 있는 달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받습니다. 그 내용은 고후13:13절의 내용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신약의 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을 일반적으로 '구약의 축도' '아론의 축복'이라고 합니다.
'축도'는 복을 비는 기도입니다. 축복이나 축도는 그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라고 한 대로하는 것입니다. 즉 강복 선언으로 구약에서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로 아브라함을 선택한 순간부터 자신이 사랑하고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창12: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찾아와 예배하고 돌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복을 내려주라고 제사장(목사)들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 받기를 좋아합니다.
추석이나 설날에 조상을 잘 섬기고 사람이 죽으면 묘를 명당을 찾아서 잘 쓰고 제사를 지내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님 살아 계실 때는 못 되게 굴다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제사도 잘 지내고 온갖 법석을 떠는 것을 봅니다. 그런다고 해서 복을 받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의 실록을 보면 자손들이 복을 받기 위해서 살아있는 아버지의 목을 따서 중이 지정해준 명당에 묻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 후에 후손들이 잘되었는지는 기록에 없었기에 어찌 된지는 모르지만, 한국 사람들은 복 받는다면 밥그릇, 베개, 문, 밥상, 등등 福자를 써놓지만 진짜 복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제사장 아론이 백성들에게 복을 비는 내용입니다. "야웨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야웨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야웨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달리, 축복의 말을 사모하고 복 받기를 사모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부모로서 자녀에게 축복을 선언하기도 하고, 랍비나 제사장에게 축복의 말씀을 듣기도 하는데, 성경에는 축복 권에 대한 말씀이 여러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32:26절에 보면 야곱이 하나님께 축복 받기 원하여, 밤새 씨름했던 천사가 떠나려고 하자 그 천사를 붙들고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하며 끈질기게 간구했습니다. 말로 축복을 해주어야 하나님이 복을 허락하신다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천사가 축복의 말을 하자, 야곱은 그 축복의 말을 듣고 천사를 가게 했습니다. 야곱은 하늘의 복을 그렇게 탐냈습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늘의 복을 받기 위해 끈질기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알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이렇게 본문 전체에서 택한 백성들에게 복을 주겠다고 했는지 알아야만 합니다.
?-복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은 대박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누적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가 올 때는 홀로 오지 않고 한꺼번에 몰려옵니다.
요셉의 복 - 요셉의 복을 보십시다. 요셉의 축복이 담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복이 쌍을 지어 몰려 온 것이 아닙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종으로 팔려가서 종살이, 감옥살이를 통하여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한 계단 한 계단 쌓아 올린 복이었습니다. 복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이었습니다. 복 받을 짓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욥의 화 ?창세기의 시대에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살던 욥을 봅니다. 그는 동방에서(터키지역) 제일 부자였습니다. 하루아침에 재산을 다 빼앗겼습니다. 하루아침에 자녀 10명이 다 죽었습니다. 하루아침에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창이 나서 잿더미에 앉아서 고름을 빨아냈습니다. 화는 홀로 오지 않고 쌍으로 왔습니다.
노아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노아 당시 모든 사람들이 홍수로 죽었습니다. 화는 한꺼번에 왔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받은 복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이었습니다. 늘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살았습니다. 복은 쌍으로 오지 않고 화는 홀로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온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의 원수인 마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음을 탄식하셨습니다. 그래서 홍수로 온 세상을 멸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 때 모든 사람들은 누워서는 음탕하고, 앉아서는 술 마시고 놀음하며, 서서는 춤을 추는 온갖 경우에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죄에 물들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노아였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만은 살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에게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는 아라랏 꼭대기에서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방주 모양을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셨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120년간 만들었습니다. 그것도 산꼭대기에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비난하였습니다. 미드라쉬에 보니 노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홍수를 대비히여야 합니다. 앞으로 큰 비가 옵니다. 그 비는 발목을 적시는 비가 아닙니다. 무릎까지 차는 비가 아닙니다. 온 몸을 담그는 정도의 홍수가 아닙니다. 온 땅을 잠기게 하고 모든 생물을 죽이는 홍수입니다. 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허허! 웃기지 마십시오. 불의 홍수가 오면 물로 막을 것이고 물의 홍수가 오면 철판으로 막겠습니다. 그런 소리 마십시오. 산꼭대기에 배를 만드는 사람을 우리는 보지 못 하였소!”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만일 노아가 믿음이 없었다면 그렇게 하지 못 하였을 것입니다. 노아의 믿음이 돋보이는 것이 두 가지입니다.
(1) 120년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실망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믿음의 결과입니다. (2) 산위에 배를 만들었습니다.
바닷가에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산에서 재목을 구하기에 편하게 하려고 한 의도도 있겠지만 믿음을 보신 것이기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후에 모세에게 하나님의 집인 성막도 정확하게 지시하셨습니다. 재료, 크기 그리고 모양 등을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성경대로만 하면 됩니다. 1,000 년간 연구하지 않아도 성경대로만 하였으면 1,000년 앞서 갔을 것입니다.
방주의 재료
재료는 잣나무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칸칸을 막고 역청으로 발라 물이 새지 못하게 하고 방과 방 사이가 밀폐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배를 만드는 나무 중에 가장 좋은 나무가 잣나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배들이 모두 이 원리에 다라 잣나무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역청(아스팔트)을 바르면 배에 물도 스미지 않고 가장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성 베드로 성전 문도 잣나무로 만들었는데 1,000년간 썩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주의 안정성과 견고성은 완벽하였습니다.
방주의 크기
길이는 300 규빗 그러니까 150 m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축구장 길이가 108 m입니다. 축구장 길이의 1.5배입니다. 그리고 넓이는 50 규빗 25 m입니다. 그리고 높이는 30 규빗 그러니까 15 m입니다. 그런데 이런 배는 바다위에 떠있는 배중에 가장 이상적인 배라는 것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습니다. 1844년 영국 조선소에서 1,000년간 연구하여 만들어 낸 배 브리튼 호와 같은 배였습니다. 하나님은 과학자 중에 과학자요 조선기술자 중에 기술자입니다. 노아의 방주는 현대 조선기술자들이 감탄하는 배라는 것입니다.
방주안의 생명
하나님은 노아의 8식구에게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지구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을 넣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을 보호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예비하고 계신 분이십니다. 노아는 500 세에 결혼하여 500세가 넘어서부터 아들을 낳기 시작하였습니다(창 5;32) 그리고 950세에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상합니다. 그런데 노아가 죽을 때 쯤 되어서의 인구는 100만 명이 되었습니다. 노아의 8식구가 500년가량 지나면 100만명이 충분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신비의 예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홍수 이전에 인구를 번성시키면 그 가족들을 다 살릴 수가 없습니다. 만일 노아가 400세에만 결혼하였어도 노아의 식구는 10,000명도 넘었을 것입니다. 나는 10,000명이 동시에 탈 수 있는 배를 본적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큰 배였습니다. 노아 당시 그런 정도의 배는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노아의 아들을 셋만 주시고 홍수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예정이 들어 있습니다. 되어져 가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심을 우리는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예정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 70명이 들어가서 400년 후에는 200만이 되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놀랐습니다.
방주의 문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창은 위로 하나만 내고, 문은 옆으로 하나만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거기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16)이 문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성격을 7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나는 선한 목자다. (2) 나는 생명의 떡이다. (3) 나는 빛이다. (4) 나는 길이다. (5) 나는 진리이다.
(6) 나는 생명이다. (7) 나는 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요 10:7)
방주에 낸 옆구리 문은 바로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이 문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의 네 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한분이신 예수님
방주는 거대한 항공모함입니다. 이미 언급한 대로 축구장의 한 배 반 되는 배를 상상하여 보십시오. 그렇게 큰 방주에 문은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상하여 보십시오. 천국은 거대한 곳입니다. 수 천년동안 이 땅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구원을 받아 들어가는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양을 넣는 우리가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누가는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 4:12)
다른 종교에서는 기독교가 너무나 독선이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만 구원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철저한 독선입니다. 예수님 외에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천하 인간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습니다.
공수부대 훈련 중이었습니다.
낙하산 훈련 중이었습니다. 공수부대원 중 하나의 낙하산 펴지지 않았습니다. 상관이 보더니 빨리 와서 핀을 풀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미처 자기 낙하산 핀을 빼지 못하여 그는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 원등 상사 이야기입니다. 그의 동상이 한강을 내려다보고 서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님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신 그리스도이십니다.
2. 생명 되신 예수님
방주는 문이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문입니다. 그런데 이 문은 무엇 하려고 만든 문입니까? 노아의 식구 8명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지구상에 온 짐승들이 들어가는 문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 방주 안에 들어간 생명만 살았고 방주 밖에 있는 생명은 다 죽었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모조리 죽었습니다. 생명과 죽음을 갈라놓는 문입니다. 문안은 생명이요, 문밖은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영생이고, 예수그리스도 밖으로 나가면 죽음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300 규빗, 50 규빗, 30 규빗이면 모두 한 층이 축구 경기장에 1.5배가 되는 크기입니다. 그것이 3층이라고 성경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화물차량 522 대의 용적과 맞먹는 크기입니다. 17,600종을 하나님의 지시 수만큼 넣으니 모두 35,000마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용적에는 125,280 마리가 들어 갈 수 있음이 밝혀졌습니다. 노아의 식구들이 다 들어가고 그 동물들이 다 들어가고 일 년분 양식을 다 넣을 수 있는 방주라는 것이 정확하게 발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입니다.
핀란드에 선정을 베플어 백성들에게 추앙을 받는 왕이 있었습니다. 왕은 백성들의 평안과 행복을 지켜주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이 왕에게는 말 못 할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대를 이를 후계자 아들이 없었습니다. 왕은 왕업을 이을 사윗감을 찾는다는 방을 전국 방방곡곡에 붙였습니다. 전국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몰려왔습니다. 몇 일간 활쏘기, 말 타기 등 무예시험에 합격한 10명에게 왕이 말했습니다.
“하늘과 땅, 이웃과 이웃을 이어주는 나무를 일주일 내에 구하여 오라.”
일주일 후 청년들은 저마다 웅장하고 괴상한 나무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죤 페로라는 청년은 왕 앞에 십자가를 내밀었습니다.
“폐하! 십자가의 세로 막대는 하늘과 사람을 연결하고, 가로는 인간과 인간을 연결하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왕이 구하는 최고의 상징입니다.” 왕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우리의 일시적인 생명을 이어주신 생명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은 생명되신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영국 미들랜드 지방에는 이상한 두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이 무덤 앞에는 오른 손이 없는 여인 동상이 우뚝 솟아 있습니다. 동상 이야기 때문에 동상을 구경하러 오는 관광객이 연인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이 오른 손이 없는 여인 동상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교도들이 성지 이스라엘을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군이 출동하여 회교도들과 치열하게 싸울 때였습니다. 십자군병중에 한 병사가 회교도 정복자 살라딘(1138-1193)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그런데 그 병사에게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습니다. 약혼까지 하였습니다. 그 여인은 담대하게 회교도 장군을 찾아가서 자기 애인을 석방시켜 달라고 애걸하였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허사였습니다. 지쳐버린 여인은 일단 집에 가서 기다려 보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사라딘은 그 여인이 얼마나 자기 애인을 사랑하는가 시험하여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의 진심어린 사랑에 감동을 느낍니다. 당신의 간청을 듣고 생각한 결과 당신의 오른손을 잘라 보내면 당신의 애인은 당신 품으로 무사히 돌아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를 읽고 그 여인은 당장 오른 손을 잘라 종이에 싸서 정복자 사라딘에게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 병사는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 두 사람의 묘는 나란히 있게 되었고 오른 손 없는 동상이 서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오른 손을 주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습니다.
3. 새로운 시작이신 예수님
이제 지구상의 모든 사람과 동물은 다 죽었습니다. 방주 문안으로 들어간 동물이 동물의 시작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간 8 식구가 인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우리는 모두 노아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모든 동물들의 시조는 노아의 방주에 들어 간 동물들에게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9)
미드라쉬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좁은 공간에서 온 세계 동물들이 골고루 살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사고가 없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만 방탕하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물들도 성적으로 타락하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개와 늑대가 성적 교배를 하였습니다. 닭과 꿩이 교배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동물들이 다른 동물들과 교배를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난장판이었습니다.
그러나 방주 안에 있는 동물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질서가 있었습니다.
방주의 문은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새로운 시작입니다. 예수님부터 새롭게 시작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1. 새로운 기원이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안식일 다음날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역사가 새로 시작되는 원년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서기 2013년이란 달력은 예수님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2. 성령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10일 만에 성령을 마가의 다락방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3.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예수님 이후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시작하는 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문은 시작하는 문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을 순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2-5)
순은 모든 일을 시작하는 분입니다. 나무 가지는 순을 통하여 자라고 생명을 순을 통하여 퍼져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은 예수님이십니다. 순이라는 말은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방주문은 시작하는 문, 바로 예수님입니다.
오늘부터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제 목 : 제사장의 축복 기도
본 문 : 민 6:22-27
요 절 : (민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성취하며 모든 민족들의 구원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선택하신 거룩한 민족이다. 이러한 성민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는 것이 바로 본 장에 나와 있는 나실인과 제사장 제도다. 특히 본문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서 보장해 주시는 권위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을 베푸는 이른바 축도권에 대한 내용이다.
본 축도는 그 내용이 매우 짜임새 있고 은혜스러우며 거칠고 험난한 광야 여정에서 무한한 위로와 용기를 이스라엘에게 주었음에 틀림없다. 제사장의 축복 기도 내용을 살펴보자.
1. 보호의 복.
24절에 "(민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원하는 분이시다. 험악하고 험난한 광야를 행군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켜주셨던 그 하나님께서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보호와 안전으로 돕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거룩하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하신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부터 영원까지 눈동자같이 지키는 분이심을 확실히 믿고 체험한다면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2. 은혜의 복.
본문 25절에서 "(민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라고 하신다. 실로 얼굴은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것으로 "얼굴을 비췬다"는 것은 아무런 사심 없이 온 마음을 그에게로 향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런 사심 없이 백성들에게 다가와 은혜 베풀기를 원하신다는 말이다. 은혜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일방적으로 베풀어지는 호의와 사랑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지는 은혜를 사모하는 빈 마음이 과연 나에게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겠다.
3. 평강의 복.
본문 26절에서는 "(민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고 말씀하신다. 평강이란 "온전하다" "완성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이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담이 제거되고 온전한 관계가 성립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온전함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있는 것으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는 평강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 평강이란 무조건 문제 없는 상태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폭풍우가 몰아치더라도 그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는 평안함이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평강을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어하시는 것이다.
적용
1) 우리는 과연 세상의 판단과 가치관에 매도된 그런 복을 간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복을 간구하고 있는가?
2)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키시듯 우리들을 지키기를 원하시는데 나는 과연 이것을 실감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3)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하고 그 은혜를 갈구하는가?
4) 이 세상이 주는 평강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구별하고 묵상해 본 적이 있는가?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