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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국립 현충원, 충주 탄금대를 다녀와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의 충의와 위훈을 기리고, 2010, 4, 14 초계함 772 함대 천안함 46용사 3주기 참배와 임란당시 충주에서 일어난 8천명의 장강백파(長江白波)에 투신 순국한 대문산 아래 남한강을 낀 전적지와 탄금대를 필두로 결정지우며 2013, 3, 25 계사년 춘계 유적답사의 커튼을 나열해가며 인원파악을 위하여 가, 나, 다, 순으로 160명 한정된 인원 체크에 들어갔다.
문화행사 일정은 4, 15(월)07:30, 삼문동 오리배 타는 선착장이다.
4월 12일 금요일, 사무실에서는 분주하게 월요일 행사를 위해 도움주실 몇 분과 함께 진행프로그램과 인솔자, 도우미 선정, 후식분배 등 답사하루 일정을 봉투에다 160인분으로 나눠 담으며 만반의 준비를 해 가고 있지만, 앞주부터 일기가 고르질 못해 오전, 오후를 분별하기가 힘이 들 정도였었고 일요일엔 비가 온다는 소식에 보채는 마음은 달랠 길 없기도 했다.
다음날 포개놓은 걱정사이로 보시시 뜨는 눈 밑으로 아침햇살이 눈곱을 떼며 밝은 표정으로 반가이 맞이하고, 하늘도 관광버스 4대의 붉은 광채를 어루만지며 깔고 앉는 포근한 방석 밑으론 오늘의 건강과 무사 안일함을 노래하듯 인솔자의 구령에 맞춰 서서히 피스톤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에선 시작의 봄이 져가고 있건만 북으로 갈수록 창밖으로 들려오는 봄노래엔 벚꽃으로 수놓아 눈살 와 닿고, 밝게 비춰주는 전광은 오늘 만나는 선현들의 얼까지 달음박질치는 고속질주 속에서도 고이 잠드는 듯 쉬는 숨소리까지도 귀를 쫑긋거리는듯하다.
한참을 달려 정각11시, 천마웅비상이 태극기거리와 국립대전현충원을 보호한 채 우리를 반긴다.
좌측으로 호국장비 전시장이 자리하고 보훈길을 따라 백호길로 들어서고 현충광장으로 서서히 접어들면서 엄숙한분위기는 초 다툼으로 일어나고 검은 정장에 넥타이는 경건자태에서 맑고 깨끗한 충정심이 흰 장갑으로 묻어난다.
원장님을 필두로 나열하고 숨소리조차 찾기 힘든 가운데 충혼탑으로 거니는 모습들은 차분하면서도 참혹했었던 당시를 떠올리기라도 하듯 붉어지는 얼굴엔 아침마다 들려오는 북한의 신경전에 맞물리는 순간까지 느껴가며 경건한 마음으로 머리 숙여 명복을 빌 때 초계같이 벗어던지신 임들의 조국애가 끓어오르기도 한다.
주변으론 많은 사연 담아 조국의 부 름에 잠든 묘지를 내려 보는 하늘마 저 눈시울을 적시게 한다.
훈련을 막 마치고 첫 휴가도 없이 자 대배치를 받은 20세 초병의 묘지라는 해설사의 말에서 또 다시 엄마 아버지의 그림자라도 찾고 있을 순직병사의 손짓 형상이 눈앞을 가리는 듯 멍석 깔은 피고름 속에서도 잊어버릴 수도 부인 할 수도 없는 바로 애국애족, 민족애를 생각케 하고, 선화하신 분들의 위령제 앞으로 순간일진 몰라도 가슴엔 질퍽한 피고름 때를 몰고 옴을 느끼게 한다.
천안함 따라 오시는 날
박동영(2010, 4, 15)
잦아드는 바람이 당신께로 갑니다.
쥐어뜯는 가슴에 피를 토하며
걸어오시는 백령도 지평선 따라
오열에 쌓여 앞장세우지 못 하였습니다.
무조건 귀환하라는 명령을 잊으셨습니까?
당신을 싸잡은 대한민국 깃발만이 온 우주의 눈물로
따뜻한 봄날 살얼음의 따가움 앞에
핏물의 링거에 묶인 채
바지선 자락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충격의 흔적은 부셔진 임들의 가슴으로
안고 말았습니다.
종이 짝 같은 함정은
늠름하게 쓴 군모를
하늘에 휘날리며
뛰고 즐거움을 줬던 그때 그
당신 사랑의 증표로 바라보입니다.
당신께서 흘리는 아픔
명령의 시간차를 가늠하지만
바라보는 이 시간
활화산의 따뜻함처럼
같이 가고 싶은 심정입니다.
보고 찾고 찾는 속에
당신의 잠자리는
차가운 물결을 스치며
피칭과 롤링의 엄습이
뉴스와 티브이에서 세상의 어둠과 함께
배 멀미 일으켜 전신을 마비 시켜 버립니다.
당신께선
통곡의 귀환소리를
실낱같은 희망의 애타는 가족과
동료들이 찾아 헤매는
초계함 772 함대를 보시 나이까?
정녕 이렇게 영면의 길이
귀환 명령의 자리라고
임이라 부르기 전
당신께선 영원한
대한의 아들이요
대한의 남아로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편히 영면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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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당신들께서 가셔야할 하루 전
박동영
오늘은
하늘도 소리치지 못하고 흘리는 눈물
당신의 집 시끌 도여에도
주룩주룩 눈물바다 이루고 있습니다.
뒤적이는 당신 앨범에도
피멍든 눈물만이 고랑을 타고 흘러
애도의 물살로 몸부림치는 날
당신께선 임무수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툴 시간마저도 다음 수행에 나서야하는 당신이 밉습니다.
허나
자꾸만 기억에서 기억으로 잊을 수가 없어
꺼지지 않는 불빛의 몸살로
긴 여행에 나서실 정성어린 도시락 한 움큼 살 준비에 따뜻한 나의 마음을 담아봅니다.
새벽 닭 울 시간이 다 되어가지만 당신을 깨워서 보내 드려야 할 시간은 자꾸 멀어지는 마음으로 꽉 털어 막아버리는 가슴엔 숨쉬기가 힘이 들어 당신의 얼굴을 쓰다듬어 보지만 기척 없는 당신이 원망스럽고 한이 서려 하얗게 지샌 밤이 되었답니다.
나 두고 가시더라도
나 없이 살더라도
후회 말고 돌아도 보지 말고
부디 대한의 아들로 영원히
영면 하소서
보이지 않고 삼키는 속눈물에 마음 풀어가며 약 1시간 30분을 달려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탑)에 도착하고 보니 중앙탑 주변에는 넓은 잔디밭에 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으며 충주박물관과 술박물관이 위치해 있다. 한편 바로 옆으로 남한강에 조정지댐을 만들어 형성된 탄금호에는 여름철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어 휴양레포츠 형 충주의 모습을 제공하는가 싶더니 차에서 내리는 순간 열일을 마다않고 충주 문화원 노광호 사무국장께서 우리가 오기를 기다리며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 아닌가.
즉, 이 탑은 신라의 석탑 중 현재 남아있는 것 중 제일 높은 것으로 통일신라기에 신라 원성왕 때 국토 중앙에 조성되었다고 하여 중앙탑이 라 불렸다고 하였으며, 국보 제6호 7 층 석탑(중앙탑 14.5m)으로 지정되 었다.
건립 시기는 8~9세기 초로 파악이 되고 있다고 하며, 기단은 10여개의 크고 작은 돌로 지대석을 마련하여 2층 기단을 쌓았는데 전체 높이는 12,951m지만 너비가 좁아서 가늘게 치솟은 느낌이 강하여 웅대함과 안정감 보다는 상승감이 두드러지는 탑의 형태라고 보면 되겠다.
1917년에 해체, 복원 당시 6층 돌 몸에서 훼손된 고서류 일부와 구리거울 2점, 목제칠합, 은제사리함이 나왔으며, 기단부에서는 청동합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활용품 등 많은 것들이 변화 하 듯 이 당시에도 구리거울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이 된다고 하며, 탑도 여러 차례 해체, 복원된 것으로 보아 원형모습과는 달라진 것이 많았다는 것이다.
중앙탑 주변경관을 둘러보며 몇 천 년의 역사를 한 눈에 살필 수는 없었지만 역사의 한 페이지를 두껍게 꿰매어 보면서 약 30분의 소요시간으로 답사를 마치고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금을 탄주 했다는 유명한 탄금대를 10여분의 시간을 소요하여 도착 한 곳이 바로 탄금대이면서 현재 충주문화원, 야외음악당, 충혼탑, 감자꽃 노래비, 탄금정, 탄금대기비, 악성 우륵선생추모비, 신립장군순절비, 열두대, 조웅장군 기적비, 궁도장, 대흥사 등이 있고 조각공원과 체육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해설사를 따라 몇 미터의 거리를 두고 있는 비의 기록현판을 보면서 일제의 항거를 노래한 비를 읽어 보니 간단하지만 내력은 이러하다.
일제시대인 1930∼40년대 충주가 배출한 아동문학가 권태응 시인의 시비에 새겨진 <감자꽃> 전문이다. 아이들이 부르는 평범하고 짧은 노래지만 한국 사람은 한국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항일정신을 담고 있는 저항 시로도 읽힌다.
자주꽃 핀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다시 발길을 돌리며 여러 곳을 거 치면서 짧지만 역사의 의미는 깊이 새겨가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여기는 원래 대문산이라고 불리워 오던 작은 산으로 그 밑에는 남한강 과 기암절벽에 송림이 우거져서 경치 가 좋은 곳이었는데 지금부터 1400 여년전(AD 536년겅)신라 진흥왕 때에 가야국 가슬왕 때의 사람으로 악성 우륵선생이 가야국의 멸망을 예견하여 신라에 귀화하니 흔쾌히 받아드려 충주에 거주케 하여 신라 청년 중에서 법지, 계고, 만덕에게 춤을 수습시켜 우륵을 보호케 하였으며, 우륵은 산상대석에 앉아 고향을 생각하며 가야금을 탄주케 하였다 한 이곳이 바로 탄금대이면서, 임진왜란 당시 순변사 신립장군이 휘하장병 8천 여 명을 거느리고 배수진을 치고 왜장 소서행장을 맞아 격전 끝에 전운이 불리하여 참패하게 되자 장강백파에 투신 순국한 전적지로 유명하며 탄금대 북쪽 남한강 언덕에 100척이나 되는 절벽 열두대라는 곳이 있는데 신립장군이 전시에 열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줄을 물에 적시어 쏘면서 병사들을 독려하였다 하여 열두대라고 하는 곳을 마지막으로 답사를 마무리 지우면서 해설사의 설명 중에는 최근 탄금대토성에 대한 발굴조사결과 삼국시대 백제세력에 의해 축조된 토성으로 밝혀져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먼발치의 서녘하늘이 기울어가는 가운데 충주문화원 사무국장의 따뜻한 인사와 금석문을 선물로 받으며 마지막 관문을 향하여 충렬사를 향해 달리고 있다.
도착을 하니 미리 전통 되었던 해설사분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본원160명 회원들의 표정 속으로 빨려들듯 몇 시간 속에 다졌던 역사의 기억들이 얼굴에 명백히 묻어 있음을 느끼면서 임경업장군의 내력을 해설 하는 순간순간마다 집필의 현장으로 빨려가고 있다.
충렬사는 인조때 임경업장군 (1594~1646)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숙종23년 (1697)에 건립하고 영조3년 (1727)에 사액되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며, 장군의 충렬비와 부인 완산 이씨의 정열비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충렬비는 정조 15년 왕이 친히 글을 지어 비석에 새겨 전하게 하였으니 어제달천충렬사비이다. 또한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실려 있으며, 임경업장군은 선조 27년 (1594)에 판서 임정의 후손인 임황의 아들로 충주 풍동에서 태어나셨으며 자는 영백이며 호는 고송이라 했으며 본관은 평택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여러 방면으로 재능이 뛰어났으며 전쟁놀이를 좋아했고 전쟁놀이를 할 때마다 스스로 항상 대장이 되어 남을 지휘하는 성품이었다.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아 25세 때인 광해군 10년(1618)에 무과에 급제를 하였으며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 훈일 등으로 공신이 되었고 인조 14년 (1636) 병자호란 때에는 의주부 윤으로서 청군의 침입을 저지코자 백마성을 쌓아 지키고 있었는데, 청군은 이를 피하여 서울을 함락하고 남한산성을 포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반청친명의 인물로서 북벌의 명장이었다.
명나라의 힘을 빌어 청에 대항코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명나라에 망명하였고, 청이 명나라의 남경을 함락하자 포로가 되었으나 끝까지 충절을 굽히지 않았다. 때마침 심기원의 모반사건에 관련되어 인조는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선으로 송환하였다. 인조는 그가 모반에 관련이 없음을 알고 석방하려 하였으나 반대파인 김자점의 모함으로 피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에 50년 후인 숙종23년(1697) 관작이 회복되었고, 숙종 32년(1706) 에는 충민의 시호가 내려졌다.
충분한 해설을 듣고 눈으로 보면서 문화유적지 순례의 마지막 마무리를 접어며 2013년 중춘(仲春)을 맞아 몰랐던 것과, 잊었던 것, 선현의 얼, 유적보존, 역사기록, 유물 발굴, 시대적 배경 등 많은 스토리텔러를 통하여 개인각자 기억의 업적을 명시나 하듯 좋은 점을 느끼면서 마무리를 지우지만 우리의 고장에서도 보다 더 발전적이고 활성화의 방안을 모색하여 찾아가는 유물 바라보는 유적에서 향상시켜가는 게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라는 마음을 다시 한번가지면서 오늘을 접어가며 남겨본다.
남기는 글(遺書)
팔방을 다니며
지키고 보존하고
관리하는 유물들을
수다히 봐 왔었지
지금은 말없는 글과
유서, 유언, 현충원
마지막 남긴 쪽지도
군번줄에 걸려있는
붉은 혈투의 현장
금강과 남한강으로
함성의 무리는
몇 천 년을 가르며
범람 할 자세로 탄금대 아래
웅크린 채 내일을 내다본다.
돌아오는 길목으로
내 삶의 유서(遺書)도 묻어놓고
영령의 가슴 깊이
함께 용솟음 솟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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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