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처리 투수
이승희
나는 그게 마음에 쏙 든다 지는 것에도 순서가 필
요하다는 것 질 때까지 잘 지기 위해 남은 시간을
책임져야 하지 날마다 길어지고 연장되는 절망
에도 놓을 수 없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담장 아래
에 꽃을 심는 마음 같은 걸까 글러브 속에서 공을
만지는 손가락들이 설렌다 내가 지나온 모든 끝
은 당겨쓴 나의 청춘들이어서 당신을 만나면 나
는 이제 줄 게 없어서 공을 던진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대안도 갖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들로만
서 있다 갈색 약병 속에서 웅크린 여름, 그 속으
로 흩어진 마음들 여기가 분명 끝이었는데 나는
또 어디로 밀려가나 이제 알아서 달아날 곳이 없
어 다행이다 지금은 오직 한 끝 손가락 끝에서 날
아간 공은 중심에서 늘 비껴간다 중심을 눈앞에
두고 떨어진다 땅바닥을 치고 간다 아무도 내 공
을 치지 않는다 내가 원한 것은 이제 그만 끝내는
것 당신들에게 내가 졌다고 인정받는 것 이런 세
상 따위는 다시 내게 돌아오지 않게 하기 위해 여
기 서 있다 보이는 끝이 자꾸만 멀어질 때 끝에
닿을 수 없어서 썩지도 못할 때 나는 아무도 죽이
지 못한 채 혼자 죽어가는 사람 어떤 끝은 끝없이
연장된다 나의 전력투구는 그렇게 끝으로 던져
지는 것 나는 이미 세상에 읽힌 기억이지만 견뎌
낸 기억들이 둥글게 모여 하나의 공이 된다 모든
끝은 손가락 끝에서 시작되고 끝날 것이다 지는
건 두려운 게 아니라 우리가 닿아야 하는 시작 나
는 다시 중심을 바라 본다 끝은 늘 중심에 있는
한 점이다
- 시집『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문예중앙,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