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왕으로서 베르샤유 출생이다. 루이 15세의 손자이며 루이16세의동생이다. 처음에는 프로방스 백작으로 불렸다. 1771년 사르디니아왕의 딸 L.M.조제핀과 결혼하였다. 혁명이 일어나자 국외로 망명하였으며, 독일의 코블렌츠에서 결성된 반혁명 해방군의 수령에 추대되고, 그 뒤 이탈리아, 영국 등지로 유랑하였다. 1793년 왕과 왕비가 처형당하자 스스로를 조카 루이 17세 왕세자의 섭정으로 선포했으며 1795년 루이 17세가 죽은 뒤에는 자신을 루이 18세로 선언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추방되자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입법권과 사법권의 독립, 신성불가침적 세습왕권과 함께 법 앞의 평등, 소유권의 불가침, 기본적 인권 등을 규정한 헌법을 제정하였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파리로 진군하자 미셸 네 원수가 1815년 3월 17일 마음을 바꿔 나폴레옹에게로 돌아서자 루이 18세는 강으로 도망쳤고 워털루 전투가 끝난 뒤인 7월 8일에야 돌아아 다시 왕위에 올랐다. 1815년 8월 초의 선거에서는 과격왕당파가 압승하였으나 왕은 온건파인 리셜리외공을 총리로 삼아 극우파의 과격행위를 억제하였다. 1816년의 의회 해산으로 실시된 선거에서는 입헌왕당파가 다수파가 되어 구귀족과 부르주아와의 타협으로 안정된 정치가 이루어졌으나, 1820년 왕제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이 파리에서 암살된 사건은 과격왕당파를 공격할 기회가 되었고, 1821년에는 과격왕당파의 J.B.빌렐 백작이 수상이 되어 자유주의파를 탄압하였다. 이리하여 혁명정신은 후퇴하고 반동세력이 지배하는 가운데 1824년 왕이 죽고, 왕제 아르투아 백작이 뒤를 이어 즉위하여 샤를 10세가 되었다.
<두산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