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대포' '왼발의 마술사'. 이는 푸스카스의 닉네임이다. 50년대 초 무적 헝가리 팀을 이끈 축구 영웅 푸스카스는 공격수의 역할이 무엇인지. 슛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몸으로 보여준 선수다.
그의 가공할 왼발 슛은 골키퍼를 떨게 했다. 1954년 월드컵에서 우리 나라 홍덕영 키퍼의 가슴에 멍이 들게 한 선수가 바로 푸스카스다. 그는 54년과 62년 월드컵에 출전했다. 54년 에는 헝가리 대표로 준우승의 주역이었고 62년에는 스페인 대표로 나갔으나 예선에서 탈락 했다. 마법의 헝가리 팀 스타 페렌스 푸스카스(Ferenc Puskas).
그는 1927년 9월 2일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도 축구선수였다. 43년 16세 때 푸스카스는 아버지가 선수로 뛰다 코치로 있던 축구 클럽에 키에스페스트(Kiespest)에 입단했고 입단 초부터 왼쪽 인사이드로 활약했다. 그의 슈팅은 골키퍼들의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는 거의 왼발만으로 공을 다뤘는데 48년 18세 때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그 해 푸스카스는 국가가 후원하는 새로운 팀인 혼베드(Honved)로 키에스페스트 팀의 동 료와 함께 옮겨갔다. 콕시스 , 히데구치, 푸스카스, 이들 세 공격수의 활약으로 혼베드 팀은 국내 챔피언이 됐다.
푸스카스는 50골을 기록해 득점왕의 자리에 올랐다. 이 공격 트리오는 국가 대표팀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해 헝가리가 무적의 팀으로 4년간 군림하도록 했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헝가리는 52년 올림픽에서 우승했으며 홈 구장에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잉글랜드를 웸블리 구장에서 6대 3으로 눌러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53년 부다페스트에서는 잉글랜드 팀을 7대 1로 이긴 것이다. 이제 어느 팀도 헝가리를 겁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54년 월드컵에서 푸스카스를 앞세운 헝가리는 우리 나라를 9대 0으로 대파하는 등 승승장구했다. 드디어 서독과 헝가리의 결승전, 헝가리는 이미 예선에서 서독을 8대 3으로 크게 이긴 바 있어서 모두 헝가리의 승리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푸스카스의 부상이 심각했다. 웬만한 선수라면 출전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무적함 대 헝가리가 월드컵에서 우승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며 또 월드컵은 안아야만 실제로 세계 제일이 되는 것이었다. 팀의 주축인 푸스카스는 아픈 몸으로 출전해 골을 뽑아냈다. 놀라 운 투지요, 본받을 프로정신이었다. 그러나 그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는 서독에 3대2로 져 준우승에 그쳤다.
이 1패는 바로 4년간 이어 언 무패행진이 종지부였다. 56년 혼베드 팀이 유럽컵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원정중일 때 헝가리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 푸스카스는 몇몇 동료와 함께 귀국하지 않고 서방세계에 눌러 앉았다. 그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팀에서 제 2의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나이 30세였으나 기량은 조금도 퇴색하지 않았다. 그는 스페인 리그에서 네 번이나 득점왕이 됐다. 파트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센 터포워드 디 스테파노였다. 푸스카스와 디 스테파노가 벌인 경기의 절정은 60년 유럽컵 결 승전이었다. 영국의 글래스고에서 13만명이 운집한 가운데 서독 프랑크푸르트와 겨룬 경기 에서 레알 마드리드가 7대0으로 이겼다. 이 골은 디 스테파노가 3골, 푸스카스가 4골을 성공 시켜 얻어낸 것이다.
62년 스페인에 귀화한 푸스카스는 스페인 대표로 그 해 월드컵에 출전했다. 1승2패로 예선 에서 탈락했으나 그는 스페인에서도 헝가리에서처럼 사랑을 받았고 66년 39세 때 선수생활 을 마감했다. 헝가리 대표로 국제경기에 84회 출전해 83골을 성공시킨 그는 또 축구사상 1 부 리그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로 기록되고 있다. 그는 생애 통산 511골을 뽑아냈다. 은퇴 후 그리스에서 팀을 맡기도 한 푸스카스는 헝가리 개방 후 조국을 방문해 뜨거운 환영 을 받았으며 94년 월드컵 때는 헝가리 대표선수의 뒷바라지에 앞장서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