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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
← 1968년 6월 1일 여의도 윤중제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부부가 ‘한강개발’이라는 자필 휘호가 새겨진 40만3천1장째 화강암 블록을 내려다보고 있다.
1968년 6월 1일 서울시가 수해를 방지하고 현대식 택지로 조성하기 위해 7,533m의 윤중제를 축조하여 한강의 기적이 열매를 맺게됐다. 이날 오전 10시15분쯤 공사현장에서 베풀어진 윤중제 준공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내외를 비릇, 삼부요인, 주한 외교사절, 각계대표, 시민, 학생 등 1만여명이 참석했다.
여의도 윤중제공사는 서울시 한강개발의 일환으로 2월 20일 착공, 1백여일 만에 준공하게 됐다. 시당국은 이 공사를 위해 1월 4일 한강건설사업소를 신설, 전 하수과장이던 이종윤씨를 소장으로 기용하고, 50명의 직원을 한강건설사업소 건설요원으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한강개발공사는 한강의 한복판에 버려진 달걀모양의 여의도를 개발키로 하고 26억원의 예산을 책정, 우선 7억원의 돈으로 여의도 둘레에 제방을 쌓는 윤중제공사를 시작했다.
서울시는 윤중제준공을 1968년 말까지 계획했었으나 서울시장의 강한 의지와 한강건설사업소장의 밤낮없는 투지로 예정기일의 80%를 앞당겨 준공, 한국 기술진의 새기록을 수립했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52만명이 동원되었다. 20∼30m 폭의 윤중제 위에는 길이 7.5km의 4차선도로가 마련되었고 둘레에는 15년생 수양버들이 7m 간격으로 1천그루가 심어졌다. 가로등은 30m간격으로 1개씩 506개가 가설돼있으며 윤중제 강변둘레에는 2m폭으로 36만7천2백35장의 잔디가 곱게 깔렸다./조선
[2005년] 페루의 생후 13개월된 ‘아기 인어공주(다리가 붙은 채 태어남)’ 다리 분리 수술 성공
← 2005년 6월 1일(현지시간) 페루 리마의 병원에서 의사가 9개월된 아이 세론을 진찰하고 있다.
페루에서 다리가 붙은 채 태어난 생후 13개월짜리 ‘아기 인어공주’ 밀라그로스 세론양이 2005년 6월 1일(현지시간) 페루 수도 리마의 병원에서 다리 분리 수술을 성공적으로 받았다.
스페인어로 ‘기적(밀라그로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세론 양은 2004년 4월 27일 페루 우앙카요 마을에서 두 다리가 붙은 ‘인어 증후군’으로 불리는 선천적 기형아로 태어났다. 이 증후군은 신생아 7만 명 당 1명 꼴로 발생하는 것으로 현재 전 세계에 생존해 있는 사례는 3명에 불과하다. 페루 리마의 솔리다리티 병원 정형외과와 심장과, 소아과 전문의 등 11명의 의료진은 이날 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세론양의 발목부터 넓적다리 부분까지 완전 분리에 성공했다. 이번 수술로 세론양이 정상적인 다리를 가질 수 있게 됐지만 생식기와 소화기 등이 기형이어서 장기를 재건하고 회복하려면 최고 15년 간 교정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조선
[2004년] 로버트 김 8년 만의 귀환. 정식 출감 전 가택연금
← 로버트 김(오른쪽)씨가 2004년 6월 1일 오전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 소재 자택으로 귀가, 부인 장명희씨와 식사를 마친 뒤 나란히 앉아 있다.
8년 만의 귀환이었다. 2004년 6월 1일 오전 9시 미국 버지니아주 애시번의 자택으로 돌아온 로버트 김(한국명-김채곤)씨는 그러나 감옥에서 8년을 보낸 사람 같지 않게 표정은 온화하고 밝았다. 김씨는 이날부터 정식 출감 전 집에서 생활하는 가택연금(Home Confinement)에 들어갔다. 만기 출소는 7월 27일. 출소 뒤에도 3년 동안은 집 근처 일정 지역을 벗어날 수 없는 보호관찰을 받아야했다.
로버트 김 사건은 8년 전인 199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 24일 당시 미 해군 정보국에서 근무하던 로버트 김씨는 스파이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에 체포됐다. 김씨가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인 백동일 대령에게 미국의 ‘국가 기밀’을 넘겨줬다는 것이었다. 김씨가 전달한 정보들은 주로 북한 관련 고급 정보였다. 국내에서는 김씨 후원회가 결성되는 등 구명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으나 정부는 이 사건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다.
로버트 김씨는 전남 여수 출신으로 경기고와 한양대를 졸업한 뒤 24세 때 유학차 도미(渡美), 4년 후 미 항공우주국(NASA)에 취직했고 미국 시민권도 얻었다. 그는 이어 1996년 9월 국가기밀 누설 혐의로 체포될 때까지 1978년부터 19년 동안 미 해군 정보국에서 군사 기밀을 다루는 정보분석관으로 근무해왔다.
한편, 6월 4일. 장남의 출소를 손꼽아 기다리다 지난 2월 별세한 부친 전 한국은행 부총재 김상영씨를 따라 어머니 황태남씨 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에 로버트 김은 미 법무부 감찰관에게 한국 방문을 요청했지만 감찰관은 전례에 없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조선
[2003년] 세계최대 수력댐 중국 ‘싼샤(三峽)댐’ 저수시작
← 2003년 6월 11일, 중국 싼샤댐의 물을 방류하는 가운데, 한 중국인 불어난 물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
환경 파괴와 유적지 수몰 등 수많은 우려 속에 2003년 6월 1일 세계 최대의 수력댐인 중국 싼샤(三峽)댐이 저수를 시작했다.
이날 0시부터 물을 채우기 시작, 수위는 전날보다 8m 상승한 해발 106m에 달했다. 싼샤댐은 일일 수면 상승폭 5m 이하를 유지하며 서서히 물을 채워나가 15일 최고 수위 135m에 이르자 저수 작업을 끝냈다. 저수가 끝난 다음날인 16일부터는 선박 통행이 시작되고 8월엔 발전기가 가동됨으로써 싼샤댐은 저수·통항(通航)·발전의 3대 기능을 모두 수행하게 됐다. 하지만 최종 완공은 최고 수위가 175m에 이르게 될 2009년까지 기다려야 한다.
15일 저수가 끝난 후 댐 상류에 길이 약 400km, 폭 최고 3km의 거대한 저수지가 형성되어 중국 경제의 주요 에너지 공급원으로서 그 역할이 기대됐다.
그러나 주위의 수많은 유적들도 차례로 수몰되는 처지에 빠졌다. 1일 오전 이미 한(漢)대 건축물과 협곡 절벽의 잔교(棧橋)가 물속으로 사라졌다. 또 유비가 숨진 백제성과 장비 사당인 장비묘, 절벽 누각 석보채, 굴원 기념관도 곧 수몰되거나 일부 피해를 입게 됐다. 쓰촨(四川)성 펑제(奉節)현에 있는 백제성은 유비가 오(吳)의 군대에 쫓겨 피신했다 임종을 맞은 곳이며, 윈양(雲陽)현의 석보채는 이백(이白)·두보(杜甫)·백거이(白居易)·소동파(蘇東坡) 등 수많은 시인들이 머물며 명작을 남겼던 유서깊은 곳이기도 하다. 저지대에 위치한 인근 신·구석기 유적지들은 지난달 본격적인 저수 준비를 위해 수위를 올리면서 이미 물속에 잠겼다. 일부 유적은 수중박물관으로 보호되거나 해체된 뒤 다른 장소로 옮겨졌지만 역사적 가치가 크게 떨어질 것으로 전망됐다. 싼샤댐 때문에 수몰되거나 이전되는 문물은 모두 1087곳에 달했다./조선
[2002년] 김남수 주교 사망
← 천주교 주교단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했던 김남수 주교.
김남수 주교가 2002년 6월 1일 향년 80세로 선종했다. 김 주교는 동갑인 김수환 추기경, 두 살 아래인 윤공희 대주교 등과 함께 20세기 한국 천주교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김 주교는 한국 천주교의 공식적 대표인 주교회의 의장을 1987년부터 1993년까지 6년 간이나 역임했으며, 1980년대 초에는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사업 위원장을 맡아 103위(位) 성인에 대한 시성(諡聖) 추진 등을 주관했다. 또 주교가 되기 전인 1966년부터 1973년까지 주교회의 사무총장으로 실무적인 일을 총괄하는 등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한국 천주교의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그는 1970년대 이후 한국 천주교 주교단의 보수적 입장을 대변하면서 진보적 입장의 윤 대주교, 중도적 입장의 김 추기경과 함께 삼각 축을 형성했다.
만주 간도에서 태어난 김 주교는 이 지역을 관할하던 베네딕도 수도회가 설립한 함경남도 덕원신학고등학교와 덕원신학교를 졸업하고 1948년 서품을 받았다. 이어 서울 혜화동 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우르바노 대학에서 `불교의 근본교리`라는 논문으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했다.
1953년 귀국 후에는 경북 왜관 순심고와 부산 대양중 교장, 부산 양정동-서면 교회 주임신부 등을 역임했다. 주교회의 사무총장을 거쳐 가톨릭대 교수로 재직하던 1974년 주교로 서임돼 수원교구장에 임명됐다. 이후 1997년 수원교구장 자리를 최덕기 주교에게 물려주고 정년 퇴임할 때까지 23년간 재임했다./조선
[2001년] 네팔 디펜드라 왕세자, 국왕 일가족 등 9명 살해
← 네팔의 디펜드라 왕세자
2001년 6월 1일 네팔의 나라얀히티 왕궁에서 디펜드라 왕세자가 부모인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슈와리야 왕비를 비롯, 왕자·공주 등 국왕 일가 9명을 총으로 살해하는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사귀어 오던 애인과의 결혼을 자신의 어머니가 반대하자 순간을 참지 못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범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범행동기에 대해서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하자 네팔 국가평의회는 긴급회의를 소집, 국왕의 섭정이었던 갸넨드라 공을 새 국왕에 추대한다고 선포했으나, 사고경위를 믿지 않는 국민들은 "정확한 사건 진상을 밝히라"며 연일 시위를 벌였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디펜드라 왕세자는 밤 9시쯤 나라얀히티궁 왕족 가족실에서 빠져나갔다가 군복으로 갈아입고 M-16 소총과 우지(Uzi) 기관단총을 들고 나타났다. 이때만 해도 참석자들은 새로운 게임을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디펜드라는 먼저 아버지 비렌드라 국왕을 총으로 쏴 죽이고, 응접실에 있던 왕족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다. 디펜드라는 자동 총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해, 총구가 위아래로 향하며 천장과 바닥 양탄자에도 총탄이 박혔다. 이어 정원으로 나간 디펜드라는 뒤따라온 어머니와 남동생을 죽였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 총질을 한 뒤 머리를 쏴 자살했다는 것이다. 목격자의 친척은 디펜드라가 살려달라는 숙모와 여자 사촌에게도 총을 쐈고, 15분여 총을 난사하는 동안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으며 표정에도 전혀 변화가 없었다고 전했다. 당시 모임에는 왕족 30여명이 참석해 있었는데, 왕세자의 총에 9명이 죽고 20여명이 부상했다./조선
[2001년]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작가 행크 케트첨 사망
← ‘개구장이 데니스’의 만화가 행크 케트첨.
만화 ‘개구쟁이 데니스 (Dennis and Menace)’로 유명한 미국의 만화가 행크 케트첨(81)이 2001년 6월 1일 심장병과 암으로 캘리포니아주 페블비치의 자택에서 숨졌다.
1951년 3월 처음 등장한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주근깨 투성이 얼굴의 다섯 살 난 장난꾸러기로, 어른들도 깜짝 놀랄 기지를 발휘해 이웃의 성미 까다로운 윌슨 아저씨를 골려주는 역할로 50년 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만화 주인공 데니스는 개구쟁이였던 케트첨의 네살배기 아들 데니스를 모델로 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만화가 히트를 치면서 지난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미 CBS 방송에서 TV 연속극으로 만들어졌으며, 1993년에는 영화도 나왔다. ‘개구장이 데니스’는 케트첨이 숨진 순간에도 전세계 48개국 1000여개의 신문에 19개 언어로 연재되고 있었다. 케트첨은 1920년 3월 14일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개구쟁이 데니스’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개인적으로는 1959년 약물 과다복용으로 숨진 부인 앨리스와 사별하는 아픔을 겪었으며 두번째 결혼도 이혼으로 끝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조선
[1998년] 유물복원 1인자 ‘마이더스의 손’ 이상수씨 별세
←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으로 활약했던 이상수씨.
1998년 6월 1일 52세의 아까운 나이에 타계한 이상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은 우리나라 문화재 보존처리 분야의 개척자 중 한사람이었으며, 평생 `보존기술자`라는 명칭에 자부심을 지녔던 장인(匠人)이었다. 그는 부식되기 쉬운 철기유물 보존처리 등에서 특히 1인자로 꼽혔다.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감은사터 서탑 출토 사리장치, 금령총 출토 말탄 사람의 토기,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금동향로 등 숱한 국보급 유물이 그의 손을 거쳐 원형의 색과 빛깔을 찾았다. 1973년 출토 직후 자작나무판의 균열로 퍼즐조각처럼 조각난 천마도 역시 그의 손을 거쳐 출토 직후의 원형을 찾았다. 문화재계에선 이런 그를 두고 `마이더스의 손`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그가 개발한 보존처리기술 중 찜통의 원리를 이용, 철기유물을 푹 쪄서 염분을 빼내는 방법은 보존과학이 우리보다 훨씬 앞선 일본에서조차 도입할 정도였다.
최종학력은 철도고등학교. 지난 1971년 중앙박물관 미술부 유물실측요원으로 박물관인생을 시작했다. 그의 손재주를 눈여겨 보았던 최순우 전 관장이 보존처리기술을 공부할 것을 권유, 1974년 대만 고궁 박물원 연수를 시작으로 보존과학기술자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조선
[1990년] 한국 네트워크, 인터넷에 처음 연결됨으로 한국 인터넷시대 개막
← 1990년 6월 1일 국내에 인터넷시대를 본격 개막한 선구자들이 웃고 있다. 왼쪽부터 한근희(한시큐어 사장) 변옥환(연구개발정보센터 실장)전길남(KAIST 교수) 허문행(한국통신 실장)김양욱(삼성전자 과장).
1990년 6월 1일. 서울 홍릉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전자계산소 빌딩에서 작지만 한국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이벤트가 열렸다. KAIST 전길남 교수가 썬 스팍1이라는 워크스테이션을 켜자 국내 HANA망(KAIST 및 연구기관들끼리 연결 된 것)과 미국 하와이대학간에 설치된 56Kbps 인터넷 전용선을 따라 이메일과 데이터 파일이 흐르기 시작했다. 국내 네트워크가 인터넷에 직접 연결돼 국제사회에 처음 출생신고를 하게 된 것이다.
사실 국내 인터넷의 효시는 1982년 서울대 전자계산기학과와 한국전자기술연구소(경북 구미)간 전용회선으로 연결한 SDN이었다. 이 네트워크는 인터넷 표준 규약인 TCP/IP를 이용하고 있었지만 미국과는 연결되지 않는 국내 온라인망이었다. 미국은 군사적인 이유로 전용회선 접속을 불허했고 국제전화를 이용하는 이메일은 비용이 너무 비싸 인터넷 선구자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KAIST와 한국통신을 중심으로 약 1억5천만원을 각출, 해외 인터넷에 직접 접속하는 HANA망 구축 프로젝트를 계획해 오늘에 이르렀다./조선
[1988년] 미-소양국, 중단거리 핵미사일(INF) 폐기조약 비준서 교환
← 중거리 핵전력(INF) 폐기에 합의한 레이건 미국 대통령(왼쪽)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
레이건 미국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서기장이 1988년 6월 1일 모스크바에서 만나 지난 1987년 12월 8일 조인한 유럽과 아시아지역에 배치된 중단거리 핵미사일(INF)폐기 조약 비준서를 교환했다. 1985년 11월 첫 회담이 열린 후 2년 7개월 만이었다. 첫 회담의 의제는 공격용 전략무기 50% 감축, 유럽배치 중거리 탄도 미사일 제거, 미국이 추진중이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한 협의였다.
고르바초프는 미국이 SDI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 아무것도 합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답보상태에 빠졌던 군축회담의 전기는 1987년 2월 고르바초프가 유럽에 배치된 미국의 중거리 탄도미사일 제거를 다른 의제와 분리, 협상할 수 있다고 한걸음 물러난 데서 마련됐다. 이로인해 두 정상은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4%(소련 1천8백46기, 미국 8백46기)를 폐기하는데 합의했다. 이 협정은 미소양국이 핵무기개발경쟁 이래 처음으로 핵감축시대를 열었다는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조선
[1972년] 군납(軍納) 부정사건
육군 보안사령부는 1972년 6월 1일 군납 부정사건과 관련, 국방부 조달본부 제1국장 김용찬 준장과 전 제1국장 하중원 준장 등 장성 2명과 구매1과장 김흥만 대령, 전 구매1과장 조병모 대령, 구매장교 박성환 중령 등 6명을 수뢰와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 위반혐의로 구속,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또 군납부정과 관련, 23개 민간업체 직원 34명을 뇌물공여 혐의로 서울지검에 넘기고 죄질이 가벼운 하급장교 30여명은 경고조치했다.
김 준장 등은 1969년말부터 약3년 동안 군작업복, 천막, 내의, 드럼통, 농구화 등 26개 품목을 군납하는 과정에서 불량품을 눈감아 주거나 납품가격을 시가보다 높여주는 조건으로 1억6천여만원을 받았다. 한편 육군보통군법회의는 6월 29일 선고공판을 열고, 하 준장에게 사형, 김 준장에게 무기징역, 김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5년, 조 대령 등 2명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했다./조선
[1961년] ROTC 창설, 1기생 전국 16개 대학에서 모집
← 1961년 8월 26일 6개 대학에서 뽑힌 총 9백8십여명의 ROTC 제1차 수료식이 부평의 33사단 연병장에서 개최됐다.
전국 16개 대학 ROTC 1기생 모집이 1961년 6월 1일부터 시작됐다. 3대1의 경쟁을 뚫고 합격한 학생은 모두 2천6백42명이었다. ROTC에 대한 이같은 호응은 문맹률이 40%에 이르러 한글로 쓰여진 야전교범조차도 읽지 못하는 장교가 있을 정도였던 당시 우리나라 군의 발전을 위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이들은 실제로 사병들의 문맹퇴치에 적극 나서기도 했다.
ROTC(학생군사훈련단)제도는 문교부와 국방부가 미군사고문단의 제안을 받아들여 1960년 9월13일 학군단 실시를 확정함으로써 시작됐다. 1기생중 1천7백68명만이 1963년 2월 임관했다. 이들 중 군 장성은 10명이 배출됐다. ROTC의 명칭은 창설 초기 미국 제도를 본따 ‘예비역 장교 훈련단’으로 출발했으나 5기생 때부터 자주국방사상 고취를 위해 ‘학생군사훈련단’으로 바뀌었고, 1971년 현재 이름인 ‘학생군사교육단’으로 변경됐다./조선
[1958년] 프랑스, 드골내각 성립
← 개선문을 통해 해방된 파리에 입성하고 있는 드골.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프랑스는 전쟁의 위기를 잘 극복해 재빨리 민주적인 새국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전후를 주도하면서 연합군이 북아프리카를 해방한 후 알제리에서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를 프랑스공화국 임시정부로 개조하여 총리가 되었다. 이로써 파리해방과 함께 파리에 돌아온 그는 전후 프랑스 최고의 지도자로 등장했다.
그러나 전후체제의 향방을 둘러싸고 공산당을 비롯한 여러 당과 대립, 총리직에서 물러나 프랑스국민연합을 조직했다가 해산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 알제리 재류군(在留軍)등의 반란 위기에 즈음해 다시 등장하여 1958년 6월 1일 내각을 결성, 총리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조선
[1957년] 국립극장,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
← 명동의 중앙국립극장 건물 앞을 행인들이 지나고 있다.
국립극장이 1957년 6월 1일 명동에 있는 구 명동예술회관으로 이전했다. 당시 예술인들은 700석 규모의 좌석을 메운 관객들과 함께 연극,무용,창 등 문화의 꽃을 이곳에서 피웠다. 이 건물은 이후 1973년 10월 국립극장이 중구 장충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이 나라 예술의 산실로 한 시대를 풍미하다 1975년 10월 당시 대한투자금융에 21억원에 팔렸다.
이 건물에서는 오태석의 ‘환절기’와 차범석의 ‘산불’ 등이 공전의 히트를 쳤고 번역극으로는 ‘안네프랑크의 일기’가 인기를 끌었다. 이 건물에는 당시 시대상이 녹아있다. 자유당 시절 ‘정치깡패’로 악명을 떨쳤던 유지광이 해방이후 이 극장의 문지기를 봤으며 장면 전부통령이 이곳에서 저격당하기도 했다./조선
[1994년] 개마고원 유격대장 김봉 대장 별세
← 故 백두산 호랑이 김봉 대장
6.25가 발발하기 전 백두산 자락 험산준령에서 청년유격대를 이끌고 북한 정권에 대항했던 한 전설적인 인물이 오갈 데 없는 무의탁노인 수용시설에서 1994년 6월 1일 쓸쓸히 눈을 감았다. 북한군에겐 증오의 대상이었던 백두산 호랑이 김봉. 그도 처음엔 민주청년동맹 선전부장까지 했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러나 곧 이념의 허구에 회의를 느낀 그는 1948년 11월 지하조직 서북광복동지회를 만들어 반김일성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적색기관에 복무하는 양심분자에 고함` 이라는 삐라 등을 곳곳에 뿌리다 조직이 발각돼 산으로 들어갔다. 백산, 두문봉 등 해발 2천m 안팎의 높은 산과 봉우리가 즐비한 개마고원은 게릴라전에 최적이었다. 화전민 움막을 근거지로 삼고 일본군이 버리고 간 무기와 사냥용 엽총 등으로 무장, 유격전을 벌였다. 이 때문에 마을 곳곳에는 김봉을 생포하는 자에겐 현상금과 훈장을 준다는 김일성 명의의 공고문이 나붙을 정도였다. 1971년 잡지에 응모한 그의 투쟁수기에 감명을 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개마고원 자유의병` 이란 친필휘호를 선사했다.
그러나 김씨 자신의 말년은 비참했다. 군번없는 반공유격대원에게는 보훈혜택도 돌아오지 않았다. 1985년 잇달아 중풍으로 쓰러진 김씨 부부는 양로원, 단칸 월세방을 전전하다 1993년 2월 결국 가평 꽃동네에 찾아들어 이곳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조선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 개최
← 고희동이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자화상>(1915), 60.6×50.0cm
1922년 6월 1일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가 개최되었다. 3·1운동 이후 문화정치를 표방한 일제는 한국 근대미술의 일본화를 꾀하며 조선미술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려 했다. 1921년 조선인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가 전시회를 개최하자, 일제는 일본의 관전인 문부성전람회와 제국미술전람회를 본떠 조선미술전람회를 설치했다. 1922년 제1회 전람회에서 출품작 403점 가운데 215점이 입선되었고, 이후 23회에 걸쳐 개최되면서 대규모의 미술전람회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선미술전람회의 전통이 8·15해방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로 연결되면서 일제식민지 잔재를 온존시키고 바람직한 미술발달을 저해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해방 이후 서화협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고희동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협회가 결성되었다./브리태니커
[1918년] 재야운동가 문익환 목사 출생
← 문익환
"얼음이 녹아야 봄이 오는 것이 아니라, 봄이 와야 얼음이 녹는 것이다." - 문익환
문익환은 제3공화국 이후 군사정권 시절에 재야민주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한 목사이다. 만주 북간도 출신으로 일본과 만주의 신학교를 거쳐 1947년 한국신학대학(지금의 한신대학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1955년과 1966년에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과 유니언신학교에서 공부했고, 한국신학대학과 연세대학교 교수, 한빛교회 목사를 지냈다.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 이후 투옥된 것을 시작으로,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고발해 여러 번 옥고를 치렀다. 1985년에는 재야단체들을 규합해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을 발족시키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1989년에는 통일의 길을 열기 위해 북한을 방문해 김일성과 3단계 통일방안원칙에 합의했으나,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다시금 투옥되었다. 1993년 출소해 새로운 통일운동체 결성을 위해 힘쓰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1992년에는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브리태니커
[1915년] 소설가 임옥인(林玉仁) 출생
1915. 6. 1 함북 길주∼1995. 4. 4 서울.
주로 생사(生死)의 문제를 다룬 소설을 발표했으며, 아름답고 세련된 문체를 사용했다.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39년 일본 나라[奈良]여자고등하범학교를 졸업했다. 귀국하여 모교인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있을 때 〈문장〉에 단편 〈봉선화〉·〈고영 孤影〉·〈후처기 後妻記〉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다. 〈후처기〉는 아이를 낳지 못해 이혼당하는 여인의 이야기인 〈전처기 前妻記〉(문장, 1941. 2)와 함께 여주인공의 심리 묘사가 뛰어난 작품이다. 1945년 함경남도 혜산진 대오천(大五川)에 가정여학교를 세우고 농촌 여성을 가르치다가 이듬해 월남했다. 그 뒤 〈부인신보〉·〈부인경향〉 등의 편집장을 지냈고, 덕성여자대학교·건국대학교 등에서 강의했다. 대표작 〈월남전후〉(문학예술, 1956. 7∼12)는 고향인 길주에서 맞이한 8·15해방과 월남하기까지의 생활을 그린 작품이고, 〈일상의 모험〉(현대문학, 1968. 1∼1969. 4)은 살인범과 양로원 할머니, 고아 출신 학생의 인생관을 그린 작품이다. 1975년 이후 창작활동을 중단했다가 1986년 소설집 〈새 손을 드립니다〉를 펴냈다. 1956년 아세아자유문학상, 1968년 한국여류문학상, 1981년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브리태니커
[1907년] 독립운동가 박기성(朴基成) 출생
1907. 6. 1 충북 진천~?
구양군(歐陽軍)·이수현(李守鉉)·이수현(李壽鉉)이라고도 한다. 1924년 도쿄[東京]에서 정찬진(丁贊鎭)·홍영유(洪永裕) 등과 같이 자유청년연맹을 조직하여 한인유학생들과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1926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무정부주의자 백정기(白貞基)·엄순봉(嚴舜鳳) 등 10여 명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고 일제의 밀정제거에 주력하는 한편, 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를 암살하고자 했으나 백정기·이강훈(李康勳) 등이 검거됨으로써 실패했다. 또한 남화한인청년연맹의 기관지 〈남화통신 南華通信〉을 발간하여 항일투쟁·선전운동에 주력했다. 1937년 중국 중앙군관학교를 제11기로 졸업했으며, 이듬해 6월 충칭[重慶]에서 나월환(羅月煥)·이하유(李何有)·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 등 10여명과 같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창립하여 중국 시안[西安]에 본부를 두고 적지구 내에 지하 공작대를 밀파하여 후방공작을 했다. 또한 한국 청년훈련원을 설치하여 본부에 집결한 100여 명의 청년들을 교육시켜 간부로 양성했다. 1941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총사령부가 충칭에서 창립되자 청년전지공작대를 해체하고 이듬해 1월 1일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하여 나월환이 지대장에 임명되고, 그는 이하유·김동수·이해평 등과 같이 간부로 임명되었다. 지대 분대장으로서 시안에 근거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했으며, 새로 모집한 사병을 훈련시키는 등 허베이[河北]·북만 등지에서 활약했다. 1943년 총사령부로 전임되어 최용덕(崔用德) 총무처장 밑에서 중령으로 과장에 임명되었으며, 김홍일(金弘壹) 참모장 밑에서 대령으로 정보과장의 임무를 맡아보다가 8·15해방을 맞았다. 1946년 국군에 입대하여 1959년 육군준장으로 예편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브리태니커
그밖에
2005/06/01 영국 퍼시부부 기네스북의 ‘세계 최장 결혼 기록’ 경신
2005년 제60회 청룡기 전국 고교야구 선수권대회 개막
2005년 에듀엑스포 2005 교육 인적자원 혁신박람회 개막
2005년 청계천 통수식
2005년 국보 제 224호 경회루 일반인에게 공개
2005년 한일 해경경비정 `502신풍호` 놓고 해상대치
2004년 이라크 임시정부 출범, 신임 이라크 대통령에 알 야와르 피선
2004년 한국, 군(軍) 첫 ‘부부원사’ 탄생
2004년 횡단보도 정지선 위반시 범칙금 부과
2003년 일본 스모계 스타 다카노하나 은퇴
2001년 일본 법원, 원폭 피해 한국인에 첫 배상 판결
2000년 라틴재즈 ‘살사의 황제’ 티토 푸엔테 사망
1998년 러시아,북한 어선 13척 나포
1997년 북한, 나진, 선봉 주민 자영업 허용.화폐체계 단일화 실시
1997년 일본, 스톡옵션제 전면허용 실시
1997년 서울, 인천, 경기도 제외한 전국 아파트분양가 전면 자율화 실시
1996년 러시아, 루블화 규제 완전 철폐
1996년 건교부, 도쿄-베이징간 운항기 서울 통과 허용
1996년 보건복지부, 금연구역서 흡연시 2~3만원 범칙금 부과
1991년 김용강 WBA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1987년 중앙기상대, 비 눈 여부에대한 확률예보제 실시
1987년 라시드 카라미 레바논총리, 군헬리콥터 탑승중 폭탄폭발로 사망
1985년 화장품, 밀가루 등 65개 품목 수입 자유화
1983년 김정일 중국 방문(~12일)
1982년 경기도 성남부근서 군수송기 추락으로 장병 53명 사망
1981년 교보문고 개점
1981년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국내 최대 점자도서관 개관
1980년 CNN 방송 개국
1979년 짐바브웨-로디지아 공화국 발족
1978년 제11회 월드컵 아르헨티나서 개막
1977년 한국은행 새 5,000원권 발행
1973년 그리스, 공화제 선언
1973년 가격표시제 실시
1973년 가정의례준칙 발효
1973년 호남매일 폐간
1972년 이라크, 석유국유화 발표
1969년 미국 노동운동가 루이스 사망
1968년 미국 교육자 헬렌 켈러 사망
1967년 신민당 국회위원후보 김재화, 반공법위반혐의로 구속
1966년 월남파병 전투사단 백마부대 창설
1965년 일본 복강현 광산폭발사고 236명 사망
1965년 청소년 선도위원 사랑의 종치기 시작
1965년 동파키스탄 태풍으로 3만명 사망
1964년 제1전투비행단 창설
1962년 김상동, 조중서등 민주당계 41명 반정부음모혐의로 피검
1961년 대학생 교복착용, 중고생 삭발령
1960년 과정(過政), 부정축재 자수기간 설정(~20일)
1960년 동아대생, 부산일보 집단습격 인쇄시설 파괴
1959년 제5차 아시아 민족 반공 대회, 서울서 개최
1959년 한국-중국 과학협조 협정
1958년 공산당 기관지 '홍기'창간
1957년 한국-미국, 유엔군 주둔지 자문위 설치에 합의
1957년 KBS 제1방송 종일방송 실시
1952년 미국 교육학자 존 듀이 사망
1950년 6년제 의무교육 실시
1948년 군정재제 폐지
1943년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사망
1939년 조선, 주민등록실시
1934년 독일.유고슬라비아 통상협정 조인
1928년 최초로 과학적인 용도의 유인정류장을 만든 소련의 우주비행사 도브로볼스키 출생
1927년 이기연, 단오절비행대회서 기체고장으로 추락사
1926년 미국의 여배우 마릴린 먼로 출생
1925년 미국의 28대 부통령 마셜 사망
1923년 일본해군, 중국 장사에 상륙, 배일운동 탄압(장사사건)
1922년 월간 ‘부인’ 창간
1910년 영국 탐험가 스코트, 남극탐험을 위해 영국 출발
1909년 미국 뉴욕서 전미흑인위원회(NNC)가 결성
1908년 김기중 등에 의해 기호학교 설립
1906년 미국-일본 해저전선 준공
1878년 영국 계관(桂冠)시인 메이스필드 출생
1873년 캐나다 정치가 조셉 하우 사망
1864년 태평천국의 난을 일으킨 홍수전 자살
1863년 근대올림픽 경기의 창시자 쿠베르탱 출생
1780년 ‘전쟁론’의 저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출생
1613년 광해군, 원군(院君) 김제남에 사사(賜死)
1270년 삼별초의 난 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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