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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3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일곱째 주)
우리 앞에 놓인 복과 화(2)
창45:3~8, 15; 고전15:35~38,42~49; 눅6:27~38
지난 주일에 우리는 “복과 화”에 관한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복과 화”는 구약성경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구약성경을 펴면, 창세기1장부터 복이 나오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라...”(창1:28). 사람이 창조되어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복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의 직계 선조로 불리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너를 축복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베풀고,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을 것이다.” 아마 많은 기독교인들이 좋아하는 구절일 것입니다. 여기서는 마치 아무 조건도 없이 무조건적인 복만 전해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보았던 구절에는 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화도 있음이 전해집니다. 특별히 구약의 예언자들은 누구보다도 화를 많이 선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주일 본 예레미야서의 본문도 복보다 화를 전하지요.
저주를 받고 있다, 이런 사람! 사람을 의지하고, 육신을 자기 팔의 힘으로 삼고, 마음이 주님한테서 돌아선 사람!
이런 사람은 거친 땅의 가시덤불과 같다.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며, 광야 용암 지역에 자리 잡을 것이다. 소금기 때문에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에!
복이 있다(복 되어라) 이런 사람!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그의 의지가 되는 사람!
이런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다. 물길에 그 뿌리를 내려서, 더위가 닥쳐와도 두려워하지 않고, 잎이 무성하다. 가뭄이 계속 되도 걱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열매를 맺는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렇게 복보다도 화를 먼저 전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이 주로 이스라엘의 위기 앞에서 심판을 경고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지침서와도 같은 책이 있었는데, 그것은 율법서인 신명기였습니다. 그런데 신명기30장에 아주 유명한 구절이 있지요. “보십시오. 내가 오늘 생명과 번영, 죽음과 파멸을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당신들이 잘 되고 번성할 것입니다....그러나 당신들이 마음을 돌려서 순종하지 않고, 빗나가서 다른 신들에게 절을 하고 섬기면, 오늘 내가 경고한 대로, 당신들은 반드시 망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오늘 하늘과 땅을 증인으로 세우고,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당신들 앞에 내놓았습니다.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손이 살려거든, 생명을 택하십시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의 말씀을 들으며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면 살 것입니다....”(신30:15~20)
이 구절은 가나안 진입을 앞두고 모압 땅에서 모세가 하는 마지막 설교입니다. 이런 신명기의 말씀들은 구약의 많은 예언자들과 지혜문서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섬기면 복을 받고, 다른 말로 하면, 잘 되고, 하나님을 떠나면 화를 입는다, 다시 말하면, 망한다(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잠언이 지혜가 이런 도식을 인과응보로 말한 책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말씀을 너무 기계적이나 도식적으로 적용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기가 있고, 전도서가 있는 것이지요.) 또 이런 말씀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협하거나 달래려는 말씀으로 보아서도 곤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협하거나 달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두려움과 수치처럼 낮은 의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의식, 아주 높은 의식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깊은 의미에서, 아니 우리의 실제적인 삶 속에서도, 우리 앞에는 생명과 사망, 복과 화(저주)가 놓여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잠언의 지혜는 우리의 삶의 기본에 깔려 있습니다) 이 땅에서 소위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복이요, 어렵게 살고 고통당하는 것은 화다, 라는 단순한 전제나 선입견을 내려놓고 본다면, 우리 앞에는 분명 생명과 사망, 복과 화(저주)가 놓여 있습니다. 요즘 우리 식으로 말하면, 행복과 불행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이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고 있습니다.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의 차이는, 지난 주일에 살펴 본 대로, 시편과 예레미야서에서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나타났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수직으로 곧게 선 나무와 바람에 수평으로 이리저리 흩날리는 겨(혹은 가시덤불)였습니다. 한쪽이 안정감, 견고하게 뿌리내림, 중심 잡힘의 이미지라면, 또 한쪽은 흩날림(불안정), 뿌리 없음, 허망하게 사라지는 이미지였습니다. 이 이미지는 우리 안에 분명히 새겨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는 겨와 같은 삶인가, 아니면 물길 곁에 뿌리내린 푸른 나무와 같은 삶인가를 늘 식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너무 도식적으로, 혹은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면, 오히려 식별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식별을 하는 이유는 내가 지금 어떤 자리에 있는지를 강박적으로 알아보려는 것이 아니라,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에 너무 많은 가치를 두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뿌리내릴 그라운드를 알아보고 그 바탕에 집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습니다. 행복한 사람, 복 있는 사람은 무성한 잎, 잘 생긴 열매를 맺으려 하기보다, 자신의 뿌리를 어떻게 내릴 것인지를 늘 기억합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뿌리내린 그 땅, 그라운드(바탕)를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성한 잎, 어떤 화려한 열매를 빨리 맺을 것인가에 더 골몰합니다. 그러나 그의 뿌리는 땅에 온전히 뿌리내고 있지 않아서,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뿌리 내릴 땅이 없어서, 바람이 한번 불고 나면 다 사라지고 맙니다.
살림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복 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복을 이 세상에서 “실컷” 잘 먹고 “원 없이”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복)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행복은 매우 허약하고 제한적일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실컷”과 “원 없이”가 완전히 채워질 가능성은 너무 적다는 것과, 또 하나는 행복의 근거(토대)가 너무나 허약한데 있다는 것입니다.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난 주일에 우리가 본 대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복과 화를 말씀하십니다. 그 복과 화는 우리가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불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고, 지금 굶주린 사람이 복이 있고, 지금 우는 사람이 복이 있고, 따돌림 받은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시니까요. 반대로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사람들에게 좋은 말을 들을 때 화가 있다고, 슬프고, 안타깝다고 말씀하시니까요.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 설교는 지금 제자들에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들을 설교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 초대교회에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초대 기독교이 신앙은 부활에 기반한 신앙을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것이 무엇입니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말씀하시지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복이 있다, 보지 않고 믿는 사람들은!”(요20:29)
사도바울은 지난 주일에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직역하면, 일으킴을 받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헛된 것(즉, 쓸데없는 것)이 되고, 여러분은 아직도 죄 가운에 있을 것입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죄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말은 여전히 저주(화/불행) 아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았습니다. 물론 육체의 소생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보이는 육신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몸(영적인 몸)으로 다시 일으킴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몸은 모든 보이는 몸의 바탕이 되신 것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보이지 않는 몸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으키심(부활하심)으로 인해 일어난 일의 실재를 알았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잠들어 있는 사람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이렇게 묻는다는 겁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부활합니까? 어떤 몸으로 돌아옵니까?” 이것은 우리의 보이는 몸(사륵스)은 죽지만, 보이지 않는 몸(소마)으로 살아난다는 것이지요.
42절 이후를 보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것으로, 보잘 것 없는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약한 것이 강력한 것으로, 자연에 속한 몸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 흩날리는 겨와 같은 것들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력하고, 영적인 몸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죽은 다음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제자들이란,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란, 보이는 것,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에 목숨을 걸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 영적인 몸에 주의를 집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 보이지 않는 영적인 몸이 우리의 바탕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행복이란 보이는 것들에 목숨 걸지 않고, 자신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영적인 몸을 알아차리고 사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물론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나쁘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미하는 뜻이 아닙니다. 정말 그냥 말 그대로 “잠깐 있다가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기엔 세상의 모든 대상들, 그리고 우리의 보이는 몸과 심지어 우리의 마음도 포함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마치 여기에 우리의 모든 행복이 달린 것처럼 살 때 우리는 제대로 누리며 살지 못하게 됩니다. 늘 흔들리고 날아가는 것을 붙잡느라(대상들은 그런 것입니다) 일생을 다 보내게 될 것이고, 마침내, 우리의 몸도 어느 순간 그렇게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 사도바울은 첫 사람 아담은 흙에서 나온 “흙의 사람”이었는데(여기서 흙은 “땅(그라운드)”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먼지”<아파르>라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사람은 하늘에서 난 “하늘의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흙의 사람인 그 사람의 모습(형상)을 지녔지만, 또한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형상)도 지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하늘”은 우리의 가장 깊은 심층이라는 의미도 있고, 또한 우리 속마음의 활짝 열려있는 넓고 넓은 광활함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시편 119편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32절)는 말씀이 있습니다.(개역개정) 다른 성경에는, “당신께서 내 마음을 넓혀 주셨기에, 당신 계명의 길을 달립니다.” 혹은 “주님 명령의 길로 내가 달려갑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혀 주셨으니까요”라고 번역합니다. “주께서 내 마음 넓히시면...”, “주께서 내 마음을 넓혀 주셨기에...” 주님께서 넓혀주시는 마음은 단순히 우리의 심리적인 마음만이 아니라, 우리의 바탕을 넓혀주시고, 그래서 우리의 사랑의 능력, 우리의 수용성을 넓혀주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하늘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빌라 데레사의 말에 의하면, 이런 사람은 어떤 대상에서 기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는 기쁨을 맛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넓혀주셔야 넓어질 수 있습니다. 시편 시인도 그것을 잘 알았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 가리이다.” 하지만, 이 일은 우리가 잠깐 지나가는 것에 목숨을 걸고 거기에 집착하고 매달리는 한, 하나님도 우리의 마음을 넓히실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의 단비를 거부하고 그릇을 뒤집어 놓은 한, 우리는 어떤 은총도 누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소위 평지설교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 해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치는 사람에게는 다른 쪽 뺨도 돌려대고, 네 겉옷을 빼앗는 사람에게는 속옷도 거절하지 말아라(내주어라). 너에게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사람에게서 도로 찾으려 하지 말아라...”
솔직하게 말하면, 우리는 이게 가능한가 아닌가를 따질 필요 없이,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킬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을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말씀이라고 치부하고 캄캄한 창고에 처박아 두어서도 안됩니다. 복과 화에 관한 말씀처럼, 이 말씀도 우리의 생각과 상황을 전복시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삶의 근원을, 행복의 근원을, 잠깐 있다 사라지는 것에 두지 않고, 보이지 않는 몸인 그리스도에 두는 사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흙의 사람이 아닌 하늘의 사람, 즉 그리스도로 삶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삼은 사람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비록 우리 우리의 마음이 하늘처럼 넓지 않고, 심지어 밴댕이 속 같이 좁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우리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 받는 근거, 우리가 행복해지는 근거가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36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이 구절을 새한글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마음 따듯한 사람이 되세요. 여러분의 아버지도 마음 따듯한 분이신 것처럼요.”
사실, 이 길은 분명 그렇게 쉽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행복해지는 길, 땅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길임이 분명합니다. 요즘, 뇌과학을 이야기하는 분도 우리 안에 긍적인 내면소통을 이야기합니다. 용서, 연민, 사랑, 수용, 감사, 존중. 물론 이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보다 나 자신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명상을 말하는데, 우리로 하면,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하늘의 사람을 우리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고, 주님께서 내 마음을 넓혀주는 것이고, 우리의 바탕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오늘 창세기에서 우리가 읽은 요셉의 삶이 바로 이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지혜로운 사람, 복 있는 사람의 전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