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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17주일설교 도리(道理):에베소서5:22-6:9
본문: 에베소서5:22-6:9
제목: 도리(道理)
오늘은 에베소서5:22-6:9의 말씀을 가지고 도리(道理)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도리(道理)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아시듯이 지난 5월 2일 토요일 저녁 밤 11시 경쯤에 가슴의 심한 통증으로 견딜 수 없어서 119를 불러 용인세브란스 응급실로 갔습니다. 딸과 아내와 임장로님 부부가 수고해 주어서 응급조치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아침에는 견딜 만하여 제 혼자 생각으로는 외출을 하여 주일예배를 드리러 올까를 생각 했으나 의사가 회진을 나오더니 급성심근경색이니 움직이면 안 된다고 중환자실로 옮기라고 하였고 침대에서 내려와도 안 되고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을 침대에서 하라고 하였습니다. 가족들이 예배드리러 가서 옆에서 도와줄 사람도 아무도 없는데 말입니다.
가족들이 오기 전까지는 화장실도 갈 수 없었고, 물도 한잔 마실 수 없었습니다. 오후에 간호사가 물 좀 마셨냐고 물어 보기에 가져다 줄 사람이 없어서 못 마시고 있다고 하니 자신들이 쓰는 물병에 물을 담아다 주어서 먹을 수 있었습니다.
몇 시간 마다인지 모르지만 피검사하고, 심전도 하고, 혈압재고, 체온재고, 계속해서 3개 수액을 맞고 있었습니다. 주일 저녁에는 용인에 계시는 목사님들과 수원지역에 계시는 목사님들이 소식을 듣고 와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와 주영이가 와서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보호자 침대에서 둘이 부둥켜 자는 모습이 좀 그랬습니다.
월요일 아침 첫 스케줄로 나의 검사와 시술이 시작되었습니다. 심장의 근육을 먹여 살리는 다시 말해 심장을 뛰게 하는 혈관이 세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완전히 막혀서 심장의 근육이 괴사가 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심장 근육이 움직여 주어야 피가 온몸으로 돌게 되는데 괴사가 되면 마비가 되고 심장이 멈추면 죽게 되는 것입니다.
검사는 몸과 다리 사이에 있는 동맥에 관을 집어넣어 사진을 찍는 것이었는데 그 비용만 180만원 정도 였다고 합니다. 피가 혈관을 통해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원인을 알았기에 곧바로 시술을 했습니다. 원인은 세 개의 혈관 중 하나가 막힌 것입니다.
그것은 막힌 혈관에 스턴트를 집어넣는 시술입니다. 삼성 이건희씨도 심장 마미가 와서 삼성 병원에서 했다는 시술입니다. 예전 같으면 가슴을 열고 해야 했지만 지금은 기술이 발전해서 큰 주사 바늘 같은 관을 동맥에 삽입하여 그것을 통해 사진도 찍고 스턴트도 집어 넣어 시술을 한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가슴 여는 것만 해도 많은 시간이 걸리고 완전 마취를 해야 합니다. 지금은 마취도 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서 시술하는 시간에 모든 과정이 보이지는 않지만 소리가 들렸고 심장으로 무엇인가 들어와서 시술하는 느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참 놀라운 기술의 발전입니다. 아마도 옛날 같으면 빨리 발견하여 병원에 갔다고 하여도 큰 수술을 했을 것이고 아니면 심장마비로 죽었을 것입니다.
급성심근경색은 생사가 확실합니다. 쓸어져 병원에 가지 못하면 죽는 것이고 골든타임이라고 그 시간 안에 가면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119 대원들이 말했습니다. 가장 시급한 환자가 바로 급성심근경색 환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술을 하고 나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표시도 안 나고 문제도 없어 보입니다.
물론 한 일 년 정도는 적응기간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막혔던 것이 뚫어져 새롭게 움직이니 적응이 필요하고 잘못되어져 재발하거나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10%정도는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노회 목사님들과 친지들과 친구들의 기도 덕분에 은혜를 주셔서 저는 응급처치도 잘 했고 시술도 잘 마쳐서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도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인간된 도리를 지키라고 합니다. 도리를 알라고 합니다. 인간된 도리가 무엇일까요? 지금은 도덕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의 도리에 대해서 말하기 보다는 기독교인 우리 곧 하나님의 자녀의 도리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1.세상이 말하는 사람들의 도리
하지만 비교하기 위해서 세상의 도리를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리란 무엇일까요?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1.사람이 어떤 입장에서 마땅히 행하여야 할 바른 길, ② 어떤 일을 해 나갈 방도(方道)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도덕적인 기준은 상당수가 유교적인 관점에서 왔습니다. 물론 불교에서 온 것도 있지만 선비들이 숭상해 온 것이 유교였기에 유교가 도덕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인간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다"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하는 생각은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졌다 삼강오륜이 무너졌다는 말과 동일시해서 씁니다. 삼강오륜을 잘 알고 지키면 도덕적인 사람이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못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삼강[편집]
삼강(三綱)에는 다음의 세 가지가 있다.
군위신강(君爲臣綱):임금은 신하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부위자강(父爲子綱):아버지는 자식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부위부강(夫爲婦綱):지아비는 지어미의 벼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벼리(綱)는 규제하여 총괄하는 사람 이라는 의미로, 각각 임금은 신하의, 아버지는 자식의, 지아비는 지어미의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 하는 것이 옳습니다.
오륜[편집]
오륜(五倫)에는 다음 다섯 가지가 있다.
父子有親(부자유친): 어버이와 자식 사이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君臣有義(군신유의):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의로움이 있어야 한다.
夫婦有別(부부유별): 부부 사이에는 구별이 있어야 한다.
長幼有序(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朋友有信(붕우유신): 친구사이에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親, 친함이란 단순히 친밀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仁)을 의미하는 것이며, 別, 구별이란 단순히 구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부 간의 역할이 다르며 이를 존중한다는 禮의 정신을 담고 있다. 삼강오륜의 親, 義, 別, 序, 信은 인의예지신(仁, 義, 禮, 知, 信)이라는 유교의 다섯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반영하고 있다.
여러분들은 삼강을 알고 오륜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것들을 잘 지켜 나가고 있습니까? 사극을 보면 엄격하게 잘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것을 겉으로가 아닌 마음속으로 잘 지켰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많지 않았겠지만 그들은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정치가 제대로 서지 못하고 가정이 바르게 서지 못하고 사회가 무질서 하게 됩니다. 좋은 길이 있지만 가지 않으니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길이다 외쳐도 죄악 된 인간이 자신의 잇속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어둡고 혼란스럽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몰라서 못 가는 경우도 많습니다. 알면서 안가는 사람은 더 나쁘지만 몰라서 안 가는 것도 나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길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아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이용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2.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도리
성경이 말하는 신자의 도리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과 성경이 말하는 중심이 다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은 인간이 중심일 수 있고 특히 왕정시대에는 왕이 중심이었고 이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이 중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중심이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성경이 잘못인 것처럼 보여 집니다. 사람이 중심이지 어떻게 다른 것이 중심이 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알고 신앙이 있다면 하나님이 중심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안다면 우리의 도리는 다릅니다. 중심이 어디인가에 따라서 다른 원 다른 그림이 그려지게 됩니다. 사람이 중심이고 힘있는 자가 중심인 삶의 도리와 하나님이 중심인 삶의 도리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삼강에서 제일 먼저 언급하는 것은 임금과 신하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륜에서도 부자 사이를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부부를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사회의 중심이 임금과 신하에게 있다고 보는 것이나 부자에게 있다고 보는 것과 부부에게 있다고 보는 것에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부부가 중심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중심은 부모와 자녀사이가 아니라 부부가 중심입니다. 부부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부모와 자녀간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가정이나 사회생활의 권면에서 제일 먼저는 부부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모습을 보면 종종 자녀들은 소중히 여기고 부모는 소중히 여기고 직장에서나 사회에서 관계는 소중이 여기는 반면에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소 닭 보듯이 보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 나가서 원수처럼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한걸음 더 나가 교회와 그리스도와 관계처럼 부부 관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5:29-33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대할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함과 같이 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내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대할 때 주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듯이 남편의 아내의 머리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가정에서 중심은 부부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는 그리스도가 중심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부부끼리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중심에 있어서 그 중심 안에서 행하는 것이 전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도리는 첫 번째로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 있지 않으면 그것이 탐심이고 우상숭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중심 아래서 부부가 있고 자녀가 있고 부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 이웃이 있고 나라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말씀하듯이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도 주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아비가 자녀들을 훈계하는 것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합니다.
종들과 주인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종에게 있어서 주인은 모든 것을 쥐고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곳에는 상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직장에도 있고 사회에도 있고 교회에도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최고입니다. 주께 하듯 그들을 대하지 않습니다. 내가 필요하면 조금 숙이는 정도이지 윗사람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합니다. 소중하다거나 섬긴다거나 주님께 하듯 하지 못합니다.
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주의 종을 주께 대하듯이 대했습니다. 남편을 주께 대하듯이 대했습니다. 자녀들을 주께 대하듯이 대했습니다. 그리고 주의 종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주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전이라고 해서 멋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본문 6:9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그렇습니다.
위협을 그치라고 합니다. 내가 상전이니 나한테 이렇게 해라고 위협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부모이니 나에게 이렇게 하라. 내가 남편이니 이렇게 하라 내가 목사이니 이렇게 하라고 위협을 그치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상전이라고 해도 나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목사라고 해서 그냥 봐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장로라고 해서 그냥 봐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내가 신자의 도리를 했는지 살펴서 하나님께서 그에 따른 심판 곧 상과 벌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사회적 질서를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복을 받고 살게 하려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것을 그것을 통해서 복을 받아 형통하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자의 도리를 지키며 살도록 하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좀 하겠습니다. 저는 몇 년 동안인지 모르지만 어버이날에 자녀들로부터 꽃을 받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버이 주일에 교회에서 청년들이 주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물로 그 청년 안에 저의 딸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정작 어버이 날에는 선물도 꽃도 받지 못했습니다.
핑계는 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어버이날에는 같이 있었습니다. 이제 직장생활도 합니다. 그래서 엄격하게 말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녀들이 직장생활을 한다지만 제가 능력이 더 있습니다.
그래도 강력하게 말했습니다. 선물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선물을 받았습니다. 어버이날 선물입니다. 지금 제가 매고 있는 넥타이입니다. 왜 제가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은 딸들이 복 받고 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모에게 하지 못하는 딸이 어디 가서 잘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한다고 해도 그것은 아부 성으로 잘하는 것이지 정상적으로 잘하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억지라도 시켰습니다. 나의 딸들이 신자의 도리를 잘해서 복 받고 살기를 위해서입니다.
여러분들에게도 권고합니다. 제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많은 분들이 찾아 오셨습니다. 집에 왔을 때에도 찾아오신 분들이 있습니다. 음식을 해서 가져 오신 분들도 있고 과일을 사오신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하지 못하신 분들이 있다면 억지로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신자의 도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여러분의 목사로 세웠습니다. 저를 통해서 여러분들에게 복을 주는 통로로 세우셨습니다. 그렇다면 신자의 도리를 다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이 복을 받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나 자녀들에게 사회에서 윗 사람이나 아래 사람에게 직장에서 상사에게나 아래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신자의 도리를 다하셔서 하나님이 예비한 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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