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소망
(벧전 1:3-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2007년 대통령 선거가 한창일 때 두 후보는 엄청난 공약을 쏟아냈습니다. 그때 이명박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 공약을 내놓았습니다. 시민단체, 환경단체들은 환경파괴 공약이라고 하고, 경제성이 없는 토목사업일 뿐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시민들은 한반도 대운하가 왜 필요한지, 가능성이 있는지를 의심하였습니다. 이명박 후보 캠프에서 내놓은 대답은 ‘이명박은 할 수 있다’였습니다. 이 말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그 공약은 쓸데없는 공약이었고, 불가능한 공약인 것이 드러났습니다. 정치인들은 수많은 개발 공약을 쏟아내지만, 대부분 효과적이지도 않고, 쓸데없어 폐기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정치인들의 약속은 믿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도 지키지 못할 약속을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 밥 한번 먹자’고 하고 지키지 않기도 하고, 전화한다고 하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일을 겪는 사람에게 기도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지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 속에서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많기 때문에 의심하고, 불신하는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국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믿지 않고, 의사들은 대통령의 발언을 의심합니다. 불신과 의심이 쌓이면 갈등이 깊어집니다. 우리는 약속한 것을 지켜 신뢰받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세상에 불신이 가득하니까 때로는 신앙까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심각한 병으로 입원한 교인을 목사와 신도들이 심방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꼭 낫게 해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기도하고 모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나오면서 권사님이 작은 소리로 말합니다. ‘목사님, 일어나기가 어렵겠지요?’ 그때 목사님이 말합니다. ‘아까 기도할 때 낫게 해주신다고 믿고 아멘 하셨잖아요.’ 기도는 기도고 믿음은 믿음인 것입니다. 바람을 기도하지만 믿음으로 확신하지는 못하는 우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약속, 축복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의심하고,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우리 삶입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확신하지 못한다고 변명할 수 있지만, 믿음을 갖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이겠지요.
그렇다고 실망하지는 마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말씀을 의심하고 불신하며 걱정과 두려움 속에 지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해 세 번씩 예고하셨지만, 제자들은 믿지 못했습니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믿을 수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고난받는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고,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도마 사도는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우리가 보았다고 알렸는데도 ‘나는 그 몸의 상처를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약속, 그리고 다른 제자들의 증언을 듣고도 믿지 못하는데, 주님을 본 적도 없이 부활의 증인들이 전하는 증언만으로 예수님의 약속을 믿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신앙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산 소망은 희망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질 것으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으면서 제자들은 더 이상 의심하지 않습니다. 걱정과 두려움도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서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고 증언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전파하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약속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주님의 말씀은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을 부활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의심과 불신 속에서 늘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불행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단순히 성경에서 증언하고, 믿음의 선생들이 전해주기 때문에 믿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증거하는 사람들의 삶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의 삶이 변화하였고, 초대교회 신도들의 삶이 변화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변화된 삶은 ‘산 소망’이 있는 삶입니다. 믿음으로 거듭나서 구원 받은 자의 삶입니다. 확실한 소망이 있으면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믿는 삶으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은 어떻게 살까요? 천국 가기 위해서 그 삶이 변화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확실한 소망이 있으면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해 삶이 바뀌어야 합니다. 산 소망의 내용은 4절에 있습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 곧 하늘에 간직한 기업을 얻는 것’입니다. 산 소망은 세상의 것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은 한마디로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었습니다. 이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해주신다고 5절에서 약속하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수도 있고, 예수님을 의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 말씀들, 약속들도 역시 의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셨을 때 그 모든 의심은 사라졌습니다. 의심이 사라졌을 때 삶이 변화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 전에 제자들은 모여 문을 닫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였습니다. 협박, 매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증언하지 말라고 해도 더 크게 전하였습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행 4:20)고 하였습니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프로그램처럼 ‘우리 사도가 달라졌어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달라졌어요’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이 사도들의 증언에 귀를 기울인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저항한 것처럼 사도들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진리에 귀를 막은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도 당연히 박해가 따랐습니다. 목숨을 위협하는 박해에도 초대교회 신도들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6절에도 박해 상황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산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받을 때 오히려 기뻐합니다. 박해는 그리스도인을 고통 속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연단’을 통해 순수한 신앙에 이르러 주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고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단련하고 우리의 소망을 확신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고난과 시련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부활의 영광은 십자가의 고난을 지나야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옛것을 벗어버리는 어려운 결단을 통해서 새 옷을 입고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은 약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은 피하고 싶어 합니다. 피하기만 하면 어려움 뒤의 기쁨과 영광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시련을 피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믿음으로 이겨내고, 은혜와 축복의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믿는다’는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이 기쁘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즐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괴롭게 만드시지 않습니다. 협박도 하지 않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이렇게 산 소망을 가지고 변화된 사람들의 공동체, 곧 초대교회의 모습이 사도행전 2:42-47절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대교회 모습은 세상의 모든 교회가 닮아야 할 모습입니다. 초대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고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느니라’(행 2:42)고 하였습니다. ‘배우고 친교하고, 성찬에 참여하여 주님과 그리고 서로 하나 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구체화하여 신도들은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개인 소유가 없이 서로 필요에 따라 나누며 기쁨으로 모이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을 따르기는 어렵습니다. 이 정신을 본받는 것이 서로 돌보고 돕고, 배려하고 지원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을 기쁨으로 하는 것은 기본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웃을 살핀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욕심과 교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나누는 삶은 바보 같은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썩어 없어질 세상의 것들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게 될 것을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걱정과 염려가 많으면 나누지 못합니다. 주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기쁨을 주십니다. 항상 기쁨으로 서로 사랑하며 우리의 것을 나눌 때 우리가 받을 축복이 하늘에 쌓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걱정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기쁨으로 주님을 닮습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누고, 베풀며, 주님의 생명을 얻은 성도의 삶으로 변화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예수 믿고 달라졌다’는 칭찬을 들을 수 있도록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이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