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판 탄호이저의 득과 실 – 국립오페라단 탄호이저 마지막날 B팀 후기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탄호이저>의 메시지는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니컬한 물음표를 지니고 살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은
이런 의문이 들지 않았을까요......(그리고 MZ 가 답합니다)
Q : 정신적 사랑이 승리할 수 있는가
A : 종교도 못한 일이다, 어렵다고 본다
Q : 육제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은 진정 별개의 것인가
A : 몸 가는데 마음 간다 는 말이 있다
Q : 아름다운 여인을 얻기 위한 뭇 남성의 경연이 과연 지금도 가능한가?
A : 요즘 남자들은 한 여자를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아니면 말고 라서
Q : 여인의 희생과 사랑으로 타락한 남자를 구원할 수 있는가?
A : 타락한 남자는 구원할 수 없다 그렇게 살다가 죽을 수 밖에
Q : 사랑은 이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린 것은 아닌가?
A : 남녀의 사랑이건, 부모의 사랑이건, 애국이건 사랑만큼 타인을 옭아매기 좋은 것은 없다
<탄호이저>룰 비롯, 사랑을 주제로 한 많은 드라마들은 모두 한가지 공통된 지향점을 갖습니다
사랑이 구원이라고,
그 사랑의 주체는 분명 둘 인데 언제나 희생은 한쪽인 경향이고 희생을 치러야 얻어내는 구원입니다
그런데 희생을 해야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진정한 삶의 희열과 기쁨을 주고 그것을 위해 인간이 그 많은 고뇌와 사색의 시간을 들일 가치가 있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매우 오랫동안 익숙해져 왔고 어쩌면 다른 방식의 감정적 견지를 하는 법조차 모르는 많은 이시대의 중, 장년과는 달리 지금의 청년들은 과연 바그너의 <탄호이저>에서 구하는 정신적 사랑의 승리(?), 그리고 결과적 구원에 공감할지 모르겠습니다
“ 경직된 사회적 이데올로기의 요구와 개인의 내면 속에 숨겨진 욕구 사이의 딜레마는 인류 역사 이래 여전히 지속되는 끝나지 않는 이야기. <탄호이저>는 결국 인간 조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
라고 연출가 요나 킴은 말합니다만
여전히 지속되는 이야기일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본능적인 욕망이 촉발시키는 사랑에 익숙하고
원나잇, 환승연애, 양다리 등등
남녀 간의 사랑을 표현하는 그 많은 아름다운 연시의 애절하고 고결한 언어들과는
너무나 간극이 큰 용어들이 난무하는 지금,
“사랑을 통한 구원이 가장 선” 이라고 어떻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바그너 시대도 아닌, 바르트부르크 성이 있는 중세 독일도 아닌 21세기 한국에서
육체적 쾌락에 빠진 자신의 속죄를 구하는 탄호이저가 있을지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할 엘리자베트가 있을지
의구심이 더 크지만
현실의 사정이 그러하다고 주저앉아 인정해버리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품성의 스펙트럼을 확 좁혀버리고 산다는 것 또한
감내하기에 마땅치 않습니다
어쩌면 예술의 역할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안에 저 어딘가에 숨겨져있는
<탄호이저>와 <엘리자베트>가 기회를 잡아 다시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실패해도 음악이 아직 남아있으니
바그너의 오페라와 여전히 다 화해가 안되어도 결국 그의 우리의 마음 저 깊은 곳을 흔들어 주는 음악의 위대함으로 여전히 바그너를 듣고 그의 오페라를 보러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제 생각이고
연출가 요나 김 역시 파리 버전(1861년)과 드레스덴 버전을 섞고 독창적인 무대 설계와 의상 디자인을 가미해 '서울 버전'을 기획하면서
"오페라 자체가 우리나라 문화가 아닌 데다 어렵고 낯설다. 그럼에도 요즘 세대의 기호에 맞춰 작품을 기획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사를 소비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이러한 낯선 스토리텔링이 도리어 의미가 있지 않나“
"관객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대는 계속된다. MZ세대에게 이런 경험이 얼마나 놀랍고 새로운 건지 상상해보라"
"익숙한 틀을 깨면서 사고의 전환도 일어날 수 있다“
라고 연출의도를 피력합니다
그러나 오늘 1막~3막을 감상하면서 연출가의 의도가 좀 느껴지다가 말다가 오락가락합니다
결론은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가지고 가는 힘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지만
신선한 시도에는 공감이 되는 부분도 많았습니다
1막은 언짢았고
2막은 웅장한 합창씬과 이제 몸풀린 주역배우의 호연에 힘입어 비호에서 호로 전환되었고
3막은 다시 1막 첫 부분부터 흘려놓은 떡밥이 그런대로 회수되는 연출로 새로운 해석의 탄호이저로 기억에 남았습니다
1막이 언짢았던 이유는
현대적 해석이기에는 너무 구태의연한 성 인식의 이분법이 극명한 연출이었고 곳곳에서 피력하고 있는 육체적 쾌락과 정신적 사랑의 양대 구도가 본처와 첩, 성녀와 창녀를 연상시키는 대비로 일관되어 분노했고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는 베누스 여신이 너무 저급한 밑바닥 인생으로 그려지고 무대 곳곳에 빨간 슬립을 입고 늘어져 있는 배우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부각되어서 이 극의 본질이 어디로 향할지 불안케해서 1막을 보는 내내 불편했습니다
오페라를 기대하다보니 당연히 주역가수들의 연기와 소리에도 호 불호가 달라지는데
1막에서는 탄호이저도 베누스도 만족스러운 연기과 발성이 아니었던 것도 공감을 방해합니다
2막에서 불편했던 1막의 감정이 변화를 가지는 데 가장 주효했던 씬은 합창단이 관객석으로부터 등장하여 입장 행진곡을 부르는 씬이었는데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국립오페라단 공연 오페라에서 합창은 정말 고퀄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어요
오늘 연출의도 중 가장 맘에 들었던 것도 관객석 양 끝에서부터 입장행렬을 구현한 것이었는데 연가경연대회 라는 극 중 서사를 관객이 제대로 느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좋았습니다. 합창 뿐 아니라 2막에서는 주인공 탄호이저 역의 다니엘 프랑크 테너의 목이 풀려 좋은 소리가 나기 시작해서 더욱 극의 몰입을 높였고 엘리자베트 역의 문수진의 호연으로 점점 난해한 연출의 극이 이해로 접어듭니다
3막은 첫 부분부터 다시 1막에서 넌지시 풍겼던 서사의 실체를 확고히 해 주는 장치로 풀밭 위에 두 개의 십자가가 달린 장대가 가로질러 놓여있다가 클오즈업되면서 가로로 놓여진 십자 장대는 끊어져 사라지고 세로로 놓여있던 십자 장대가 남는데 그 십자가에는 못박힌 예수상이 보입니다 의도는 육제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서로 교차된 대비를 통해 양자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결국 정신적 사랑의 승리라는 메시지로 읽혀집니다
그리고 바그너 탄호이저의 주제인 사랑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는 엘리자베트의 자살로 탄호이저를 위한 희생을 극대화시키고 그걸 깨달은 탄호이저 역시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연출을 통해 구현해 낸 것이 저는 오히려 원작의 애매하게 미화된 죽음보다 현대적 해석에 걸맞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만
오늘 탄호이저 극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특징은
연극적, 영화적, 오페라적 요소를 결합하여 진정 오페라였다 말하기 어려운 연출방식으로 무대 앞에서 오페라가 진행되는 내내 뒤쪽 배경으로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상영하고 있는 듯한 설정으로 캐릭터의 내면세계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연출적 의도를 극명히 보여주려고 끝없는 극한적 대치상황를 끼어넣는 방식이 어떤 씬에서는 이해를 도왔지만 대체로 극의 흐름을 끊거나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부분도 적잖이 있었습니다 특히 촬영기사가 같이 무대에서 촬영을 하면서 배우들을 쫓아가는 방식은 집중을 방해한 면이 더 컸습니다 한마디로 오페라가 30, 연극이 30, 다큐멘터리 영화가 40 정도 되는 혼합형 극 오페라(?)였습니다
주제의식의 부분에서는 3막에서 베누스와 엘리자베타가 하얀 면사포 하나 속에 같이 들어가 똑같이 슬픈 표정으로 무대를 걸어나가는 씬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누구나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둘 다를 희구하며 그 두 가지 방식의 사랑은 서로 배척관계도, 하나가 다른 하나를 부정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닌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결론이 정신적 사랑의 승리같이 귀결된 면과 좀 모순적인데 바로 그런 부분이 오늘 연출이 의도한 효과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은 육제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의 대치같이 그려지는 것 같고 또 어떤 부분은 두 방식의 사랑이 결국 하나라는 메시지를 주는 듯, 좀 오버랩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연출가는 현대적 상황에서 바그너 시대의 사랑에 대한 해석과 이상이 통할 리 없어서,
"오페라 자체가 우리나라 문화가 아닌 데다 어렵고 낯설다. 그럼에도 요즘 세대의 기호에 맞춰 작품을 기획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사를 소비하지 않는 시대이기에 이러한 낯선 스토리텔링이 도리어 의미가 있지 않나“
라고 말합니다만
이 낯선 스토리텔링이 어떻게 다가올 지는 관객 각자의 몫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첫댓글 질문과 MZ세대의 답 재미있네요.
사실 답은 개인차가 클 것 같습니다만 요즘의 세대들의 삶을 조금 들여다 보니 그럴 것 같아서 적어봤습니다 ㅎㅎ
서곡만이라도 듣고싶어 갈까 고민했었는데요.
후기 고맙습니다~^^
4시간 공연이 헛되지는 않았습니다 음악을 듣는 방식이 변한만큼 해석도 진보든 퇴보든 변화가 있는 게 당연하죠 선택을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의자가 좋아서 4시간 가능한거 같아요. 대학로극장 소극장에서 4시간짜리 옴니버스 세개 보러 갔었는데 의자가 쿠션이 부족하고 옆사람과 거의 닿아있게 좁아서 옴니버스 2개 보고 탈출 한적 있습니다. 몸이 아파와서..
의자 중요하죠~ 소극장에서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의자가 아무리 좋아도 공연이 불호이면 그 4시간을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