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작시|석미화
귀룽나무 외
저 높이가 왜 불 같지
초록이 붉은 것보다 문득 뜨겁다
나무 둥치가 잎을 밀고 나오기 시작할 때
연두를 거치지 않고 초록으로 냅다 번지고 있는 기운; 귀룽
밤낮없이 쏟아져 나오는 혼란은 출렁거린다
저런 속도가 있다니
구름나무라고도 불리는, 들판을 질러가는 푸른 밤이 궁금해지고
흥건히 입 안에 고이는 것이 있다
깊은 산골짜기에 자란다는 나무가 나의 이마 위로 어른거리고
흐드러지는 건 꿈이 말하는 방편이 아닌 것, 소스라치게 뻗어 오른 산물 냄새가 아스팔트 양쪽으로 그득하다
허공이 초록을 삼키다 받아내는 수목한계선
틀어막고 있는 말을 뱉으라고 뱉어내라고
숲을 뒤로하고 일갈했다
더 이상 밀리지 말 것
흰털귀룽, 차빛귀룽 녹털귀룽이라는 꽃술의 의견 묻지 않아도 구름이 흩어지는 골짜기, 알 수 없는 나의 체증을 다스리고 있는 뜨거운 초록
총상총상 새들이 구름 나무에 앉으면 소리가 귓가에 닿는다 잎맥을 실토하는 문맥이 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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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식물성
노루귀꽃을 보고 탄식하는 동안
킬레나무와 사랑을 나누는 방드르디를 꺼내들었다
나뭇잎은 나무의 허파, 허파 그 자체인 나무, 그러니까 바람은 나무의 숨결
무엇이 그를 나무와 사랑을 나누게 했을까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 하랑하랑
느랑느랑, 풀어놓는 흰 빛
나는 노루귀꽃을 몸짓으로 안아보았다
고독은 아름다운 형벌
호흡을 느끼고 영혼을 쓰다듬고 무릎 꿇고 다시 주저앉는 일 시간이 흘러 알 수 없는 눈물
나무와의 밤
꽃과의 낮
나의 식물성과 이제 맞닿은 것이지
반죽음이 된 후에야 신을 찾아나서 듯
몸의 소문에 구색을 갖추기는 싫은 것이지
킬레 나무와의 사랑을 한 사람은 방드르디가 아닌 로빈슨,
왜 이렇게 오랫동안 착각했을까
로빈슨의 종 방드르디, 방드르디
나이테처럼 그 이름을 떠올리며 살았다
어느 섬을 오르면서
하루 종일 노루귀 솜털을 쓸어주며 신음을 낼 수 없을 정도로 터치
귀를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을
혼자가 넘쳐날 때 꽃들의 입으로 숨을 쉰다
나의 일이 땅에 눕고
하늘을 향하는 일임을 알았다
나비처럼 떨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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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미화|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2014년 《시인수첩》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 『당신은 망을 보고 나는 청수박을 먹는다』가 있다.